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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리얼리즘 영화들의 계보 속에 있으면서도 고유한, 그래서 정말로 귀중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여기에 로르바케르의 첫 ‘마술’이 있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답사할 가치가 있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미래의 시점에서 무언가의 처음을 목격한다는 건 늘 생경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심지어 그 무언가가 마술이라면 보는 이의 입장에서 놀라움을 느낌과 동시에 마음의 벽까지 허물 수도 있다. <더 원더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마술이 그렇다. 이 쇼의 마술사는 가족의 대표 젤소미나(마리아 알렉산드라 룬구)이고, 관객은 젤소미나 가정에 위탁된 외부인 마르틴(루이스 휠카)이다. 젤소미나는 마르틴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입에서 벌을 꺼내는 마술을 선보인다.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그럼으로써 관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되는 이 마술이 알리체 로르바케르 영화의 본질이라는
[비평]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다, <더 원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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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안양은 왜 이렇게 평범하지?” 이 질문이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이하 <수카바티>)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수카바티>의 공동연출자인 나바루 감독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언가에 미친 자들만이 내지를 수 있는 함성에 홀리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그 함성의 주인공인 FC안양의 서포터스 ‘RED’는 노잼의 도시였던 안양을 극락의 도시로 도약시킨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축구의 힘인가? 아니면 안양의 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 그렇게 <수카바티>는 출발점에서 제기된 질문을 질적으로 다른 질문으로 이어가며, 관객을 ‘수카바티’를 미친 듯 외치는 RED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극락(極樂)의 세계에 당도한다.
안양은 아미타불의 정토이자 ‘깨달음이 동반된 즐거움’의 세계를 의미하는 ‘극락’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극락을 뜻하는 산스크리스트어가 바로
[비평]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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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두달차,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수 19만명을 넘어서며 예상치 못한 호응을 얻고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주제의 무게와 영화의 비상업적 화법을 떠올리면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평단만이 아니라 대중 또한 이 작품이 전위적인 형식으로 압도적인 체험에 이르게 하며, 무엇보다 그 과정이 ‘윤리적’이라는 견해를 공유한다. 망설임 없는 호평의 물결 속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견을 제기하려고 한다.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형식적 야심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재현하는 두 가지 선택에서 빚어진다. 우선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수용소 바로 옆에 긴 담장을 치고 사는 나치 가족에 초점을 두는데, 한자리에서 움직임을 자제하는 카메라가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반면, 담장 건너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로만 나치 가정의 장면을 부유한다. 요약하자면,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와 외부의 사운드가 접촉하며 일으킨 불쾌한 긴장이 이 영화의 도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구역질의 만용, 가장된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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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그림, 만화, 광고, 영상 작품처럼 여러 영화도 <최후의 만찬>(1495`~98)을 인용한다. 최후의 만찬 도상은 반복적으로 그려진 기독교 도상 중 하나이고,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구도는 에펠탑의 실루엣만큼이나 유명하다. <최후의 만찬>은 인터넷 밈처럼 가볍게 사용되는가 하면, 짐짓 심각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비리디아나>(1961),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맘마 로마>(1962) 같은 경우가 그렇다. 매춘 포주를 도상 속 예수의 자리에 배치한 <맘마 로마>는 최근 논란이 된 파리올림픽 개막식 장면 못지않게 불손한 장면일 것이다. 이번 올림픽 개막식에선 센강 다리 위에서 스트리트댄스를 추던 드랙 퀸, 어린이, 장애인, 초고도 비만인 등이 디오니소스로 분장한 가수 뒤쪽에 서며 활인화(tableau vivant, 살아 있는 모델이 회화, 조각, 문학 속 구성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인간 예수, 소수자 예수, 올림픽과 교회 그리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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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의 중핵은 인간 신체를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훼손하는 변형의 공포가 아니다. 물론 그의 영화는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절단되는 신체와 부서지는 살덩어리, 쏟아지는 분비물과 짓이겨진 얼굴을 스크린에 전시하며 정상적인 인간 규격에 야유를 보내는 혐오스러운 비체(abject)의 영화다. 크로넨버그는 신체의 일관된 질서로부터 추방된 부위들의 조각과 점액을 건조한 기계장치들과 병치시키며 스크린의 매혹으로 교정한다. 그의 영화는 고정된 몸을 변형하는 급진적인 유혹과 역겨운 형태로 변형된 몸이 건네는 두려움의 모순적 체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는 표면의 진실만을 가리키는 진술이다. 그가 묘사하는 과격한 신체의 변형은 한 가지 특수한 절차를 전제하고 있다. 크로넨버그 영화의 유혹은 이 절차에서 비롯되는 긴장에 있다.
가시적 무대와 비가시적 침입
많이 거론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것은 새로운 발명품이나 현상을 발표하고
[비평] 기계는 벌레를 포획할 수 있는가?, <미래의 범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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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의 총성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 탄생했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매트릭스>(1999)는 주인공 네오가 몸을 젖혀 총알을 피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360도로 움직이는 가상 카메라를 통해 네오의 움직임과 총알의 궤적을 느리게 표현한 그 장면은 관습적이면서도 혁신적이다. 과거 서부극이나 필름누아르의 주인공이 총격전에서 뽐낸 것과 같은 민첩함과 더불어 총알의 속도와 움직임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매트릭스>의 블릿타임은 디지털 영화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영웅의 형상, 즉 속도의 한계를 넘어서 시공간의 질서를 다스리는 영웅을 상징적으로 그리는 영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블릿타임은 정지된 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전환하는 영화의 기본 법칙을 뒤흔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법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새롭다는 말은 아니다. 일찍이 움직임의 환영을 중단하기 위해 슬로모션이나 프리즈프레임을 사용한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총알의 시간과 정면 승부, 블릿타임의 도래와 할리우드의 신영웅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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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현실이고, 현실은 환상이다. 이렇게 말하면 동의할 사람은 잘 없다. 지어내어서 거짓이고, 따라 해서 모방이며, 있지 않아서 허상인 영화가 현실일 리가. 그래서 때때로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어떤 영화를 두고 걸작의 칭호를 부여하는지 모른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영화는 환상에 가까운데 현실과 환상 사이의 낙차로 울림을 준다. 마치 물웅덩이에 물체를 떨어뜨릴 때 더 높은 곳에서 낙하시킬수록 물웅덩이에서 벌어지는 파탄의 정도가 다른 것처럼. 아니 그건 파탄일까. 물웅덩이 주변으로 흐트러지고 난잡한 사태는 누군가에겐 축복이다. 또 낙차가 크면 클수록 축복의 크기도 커진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이 낙차의 크기를 최대치로 가져가는 영화다. 최대한 현실에 천착하고, 있는 힘껏 환상을 키운다. 그 끝은 환상일까, 현실일까.
영화는 먼저 현실에 밀착하는 방안으로 몸을 택한다. 재키(케이티 M. 오브라이언)가 등장할 때 관객 다수는 그의 신체에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비평] 현실로 그리고, 환상으로 본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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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정치드라마 <돌풍>에 대한 칼럼 제안을 받고 잠시 머뭇거렸다. 12화를 전부 보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이 아까운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긴 시간을 들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것을 알았고, 그런 불쾌함을 표현한 글이 또 다른 이들을 불쾌하게 할까봐 미리 불편해지는 게 싫었다. 요즘의 비평 세태가 종종 그렇듯, 나와 비슷한 감상을 가졌던 이라면 ‘불쾌함의 이유’에 공감하겠지만, 재밌게 본 이들이라면 자신이 느낀 ‘유쾌함’에 찬물을 끼얹는 글을 접하고는 필경 ‘586 꼰대’를 운운하며 불화살을 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물어봤다. <돌풍>이 어떻더냐고. 다수는 아직 보지 않았는데, 그 보지 않은 이유가 나와 비슷했다. 보았던 소수는 나와 비슷한 이유로 불쾌감을 느꼈다. 그 와중에 그럭저럭 재밌게 본 이들도 없지 않았다. 소수 중의 소수에 해당했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결국 <돌풍>을 보고 난 내 감상의 구성비와 비슷했다.
[비평] 과잉으로 허술함을 가리다, <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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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도 히라야마(야쿠쇼 고지)는 입을 열지 않는다. 혼자 살고, 혼자 일하고, 혼자 먹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각의 이유를 변명하며 끝없이 말을 걸어오는 동료 타카시(에모토 도키오)에게도 그저 손짓으로 말을 대신할 때는 언어장애를 지닌 인물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좀이 쑤신 데가 있다. 히라야마의 지나친 과묵함은 빔 벤더스의 1987년작,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직접 소통이 불가능했던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를 떠올리게 한다. 말없이 지켜보는 선한 시선은 오래전 다미엘의 것이자, 지금 히라야마의 것이기도 하다. 천사를 볼 수 없는 어른들과 달리 천사를 알아보는 아이들과 소통했던 다미엘처럼, 히라야마는 엄마를 잃고 우는 아이를 달래며 처음으로 입을 연다.
히라야마의 과묵함은 캐릭터의 개성을 만드는 방식도, 서사를 위한 기능적인 설정도 아니다. 그의 말 못할
[비평] 야쿠쇼 고지의 과묵함에 관하여, <퍼펙트 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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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색은 지각 가능하다. 하지만 강력한 서사와 캐릭터 앞에서 우리의 감각은 색에 대해 인식 불가능 상태로 놓일 때가 많다. 색에 대한 지각이 곧장 반응으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영화 속 색은 분명히 있다.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미처 인식하지 못한 영화 속 색들이 쌓여 긴장과 감정을 잘 만드는 영화 중 한편이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다.
영화의 룩과 관련된 색감을 구현하는 빛의 색은 옐로와 블루가 주를 이룬다. 가시광선의 스펙트럼 안에서 조명기의 광원이 만드는 색온도(빛의 색을 파장으로 표현하는)가 옐로에서 블루까지기에 카메라와 조명기에서 만들어내는 빛의 색도 옐로에서 블루 사이다. 이 두 가지 색으로 이 세상 모든 영상의 색감이 표현된다는 것은 무한의 옐로와 무한의 블루가 존재한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영상의 색감을 카메라나 조명, 후반작업인 색보정에서 조정하는 색만으로 모두 구현할 수는 없다. 미술과 의상이 함께 작용하여 표현될 때 영상의 색감이 제대
[박홍열의 촬영 미학] 서사에 가려진 채로 서사를 빛내는 색,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옐로와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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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빚어내는 단언적 인상에 비해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의 일상엔 순환의 피로감과 은근한 불화가 가득하다. 당초 공중화장실 개선 작업인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발한 영화는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의 일이 더러움에서 깨끗함이라는 일회적 전환이 아닌 그 두 상태의 지속적 순환임을 절감시킨다. 히라야마는 마치 정화를 목표로 도를 닦는 일종의 ‘수행자’처럼 정성껏 화장실을 쓸고 닦는다. 그런 히라야마의 모습을 카메라는 장인의 기예를 관찰하듯 공들여 포착한다. 말하자면 히라야마는 내일이면 더러워져 있을 공간을 오늘 깨끗이 하는 일에 온 힘을 쏟는 자다. 동료 타카시가 궁금해하는 것처럼 다분히 호기심을 자아내는 히라야마와 그의 사연에 대해 영화는 히라야마의 과묵함을 반영하듯 그저 그의 일상을 조용히 담아내며 그가 듣고 읽는 노래와 소설을 통해 그의 전사를 종종 은유할 뿐이다.
노동만큼 중요한 일상과 루틴
히라야마의 일상엔 노동만큼 중
[비평] 지극히 영화적 순간들, <퍼펙트 데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