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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폐막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로렌스 아부 함단의 <하늘의 일기>와 일본의 필름 작가 니시카와 도모나리의 <빛, 소음, 연기, 그리고 빛, 소음, 연기>를 같은 섹션에 상영했다. 이스라엘이 침공한 레바논 상공의 긴급한 기록을 담아낸 비디오 에세이와 일본 여름 축제의 불꽃놀이를 촬영한 16mm 핸드메이드 필름 작업은 일견 별다른 접점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영화는 하늘에서 만난다. 시작도 끝도 없고, 깊이를 확신할 수도 없는 비정형의 대기에서 만난다.
관객들은 상영 순서에 따라 <하늘의 일기>를 본 뒤에 <빛, 소음, 연기, 그리고 빛, 소음, 연기>를 감상한다. 상공에 떠오른 전쟁의 흔적을 눈과 귀에 새겨둔 관객들에게 고요한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놀이의 아름다운 광경과 수많은 사람을 환호하게 만드는 폭발음은 단순한 축제의 기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의 일기>에서 베이루트의 하늘이 폭
[비평] 대기의 교향곡, 전장의 미장센 - <하늘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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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머리)에서 작동해야 하는 프로세스가 점점 여기(가슴)에서 발생하고 있어.” 프로그램대로 움직여야 하는 로봇 로즈는 아기 기러기를 키우면서 발생한 오류에 혼란을 느낀다. ‘느낀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겠다. 로즈는 입력된 명령대로 결괏값을 도출해내는 로봇일 뿐이니까. 섬에 불시착한 도우미 로봇(루피타 뇽오)은 실수로 둥지를 덮쳐 어미 기러기를 죽였다. 이후 불행한 사고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아기 기러기를 ‘획득’한 로봇은 기러기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다시, 결심이란 단어도 부적절하다. 무엇이든 임무가 필요했던 로봇은 기러기를 책임지고 키워 무리로 돌려보내는 것을 임무로 설정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억지스럽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기적과 비약은 이 순간에 발생한다. 영화는 로즈가 왜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대신 어떻게 엄마가 되는지 과정을 성실히 따라간다. 마음을 움직이는 건 정답을 향해 닦인 매끈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미처 해결하지 못한 구멍, 미지와 불투
[비평] 감정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 이성과 감성 사이, 우연처럼 기적의 다리를 놓은 <와일드 로봇>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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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머리에 이고 대지를 가로지르던 영화적인 움직임은 이제 구식이 되었다. 말을 타고 사막과 평원을 건너던 카우보이, 열차 위에서 모험을 즐기던 방랑자, 자동차를 타고 도심을 누비던 갱스터의 모습은 어느 순간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영토의 확장을 꿈꾸는 수평적 운동을 대신하여 창공을 지배하기 위한 수직적 운동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제 고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앉아 부를 과시하거나, 비행기나 우주선을 타고 높이의 한계를 시험하거나, 그도 아니면 초인적인 힘으로 비행하면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들이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상승에 대한 영웅의 욕망은 파에톤의 마차가 통제력을 잃은 것처럼 또는 이카로스의 날개가 꺾인 것처럼 좌절로 이어지고는 한다. 수직적인 세계의 비극적 결말을 추락이 장식한 것이다.
디지털 시각효과를 연구한 크리스틴 휘셀은 1990년대 이후 수직축의 세계를 다룬 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와이어 제거 소프트웨어, 모션컨트롤,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추락의 몸짓이 의미하는 것 - 1990년대 이후, 영화가 다루는 수직축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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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료타는 헤이세이 30년간(1989~2019) 일본 문학의 내러티브를 논하며 재난의 자장에 있는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인 정서를 발견한다. 가령 그는 다이쇼 시대(1912~26)에 활발히 생산되던 ‘유토피아’가 1923년 간토대지진과 부딪히면서, (연역적인 진단이지만) 그러한 묘사가 마침 찰나의 “현상”으로 그려지던 게 흥미롭다고 간주한다. 그는 이같은 양상이 헤이세이에서 대두되는 ‘덧없음’의 감각으로 이어졌으리라 짐작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재와 연관되지만 진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한신·아와지를 지나 동일본대지진까지 일본인들은 파국을 목격했지만, 어째서 세계는 아직 말소되지 않았고, 그리하여 모순적으로 외부의 강력함과 내부의 무상함을 동시에 감각하는 분열의 세대에게 시공간은 고정되지 못한 채 다만 ‘오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 시선을 옮기면 동시대의 대표적인 예시로 하마구치 류스케가 떠오른다. <아사코>나 <드라이브 마이 카>에
[비평] 지붕이 된 어두운 방에서, 함께와 혼자, <새벽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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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장손>은 가부장제의 끈질긴 유산이 남아 있는 대구 소재 일가족의 삶을 주인공인 ‘장손’ 성진(강승호)의 입장을 축으로 풀어낸다. 시대착오적 어감을 주는 제목을 굳이 고집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전근대적 가족 유산에 대해 양가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 영화는 다소 묘한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주인공 성진은 오랜만에 집을 찾아 모든 게 데면데면하면서도 자신을 살갑게 맞이하는 할머니의 환대에 따뜻한 정을 느끼는데, 완고한 할아버지와의 대면이 거북하고 무능한 아버지의 변하지 않는 모습을 꼴 보기 싫어하면서도 누이의 츤데레 성격에 맞장구를 치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오히려 편안함을 얻는 그의 모습은 이 영화의 입장과 통한다. 10여명의 캐릭터의 면면이 다들 개별성을 띠며 살아 있고, 잘 조율된 화면구성이 상당한 재능을 증거하는 이 영화가 문제적 지점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할머니의 죽음 뒤에 남은 것들
이 영화는 무더운 여름을 배경으로 제사를 치
[비평] 이해와 단념 사이에서, <장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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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에서 흩어지거나 반복되는 지표들을 물고 늘어지는 건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좋은 태도가 아닐 것이다. 가능한 한 투명하게 영화를 감각하고 그 감각을 길어 올리는 것이 그의 영화를 논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 영화와 가장 먼 것은 ‘의미’이며, 의미의 총체로서의 ‘정치’다. 사적인 것이 정치성을 통과한 뒤라야만 의미를 얻는다고 인식되는 한국 사회에서 진정 사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유독 홍상수 영화의 ‘일상’만은 정치성의 침범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남겨졌다. 예컨대 홍상수 영화는 정치적인 의미망 속에서만 점잖게 묘사되던 섹스를 정치에서 해방했다. 그의 영화 속 섹스는 쾌락에 종속되지 않고, 그 안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사적인 민낯을 발견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유천>은 그의 영화와 가장 멀리 떨어뜨려 놓아온 ‘정치’라는 개념을 가까이 불러오도록 충동한다. 시언(권해효)은 자신의 누나이자 전
[비평] 경계 없는 장소와 경계하는 시간, <수유천> <새벽의 모든>에서 감지되는 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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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모픽렌즈 기술은 플레어와 왜곡 등의 특징을 통해 일반 렌즈보다 훨씬 다양하고 낯선 화면의 효과를 구현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애너모픽렌즈 이펙트의 구체적인 효과와 사례들을 아주 상세히 설명하면서, 왜 한국의 많은 영화와 시리즈가 이러한 애너모픽렌즈의 특수함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제언을 남기고자 한다.애너모픽렌즈 기술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탱크 안에서 군인들이 밖을 더 넓은 화각으로 잘 보기 위해 개발됐다. 하나의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는 인간의 시야보다 더 넓은 시야의 화각을 확보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렌즈의 이미지 압축을 통해 인간이 볼 수 없는 넓은 풍경을 압축해서 보게 만든 것이 애너모픽렌즈다. 이 기술을 1952년 미국 영화 제작사인 (당시) 20세기 폭스가 ‘시네마스코프’라는 이름을 붙인 와이드스크린 구현을 위해 활용한다. TV의 등장으로 극장이 영화산업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극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몰입형 와이드스크린을 저렴한 비용에 제작
[박홍열의 촬영 미학] 주변의 시선을 영화의 중심으로 - 애너모픽렌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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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녁 해가 지고 나면 반드시 아침 해가 뜬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소설 <새벽의 모든>에서 제목의 의미를 암시한 문장은 이 한줄 외엔 전무하다. 그렇기에 문장이 기술된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 비로소 주인공 후지사와와 야마조에, 두 사람이 겪은 고난을 밤의 시간에 대입해보게 된다. 영화에 묘사된 밤의 시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플라네타륨 시연 장면이다. 플라네타륨이 구현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참여자들에게 후지사와(가미시라이시 모네)는 회사 선배의 메모를 들려준다. “(…) 밤이 찾아와줘서 우리는 어둠 너머 무한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종종 이대로 쭉 밤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영원히 밤하늘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둠과 정적이 나를 이 세계와 연결하고 있다.”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 모두 원작 소설, 실존 인물의 자서전을 영상화했다. 하지
[비평] 어둠을 통해 삶을 말하기, <새벽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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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시언(권해효)과 학교 건물에서 나오던 전임(김민희)은 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전임이 불편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안다. 영화 도입부에서 전임은 시언에게 촌극 연출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들려준다. 원래 연출을 맡았던 이가 함께 연습하던 학생 일곱명 중 세명을 따로 만났고, 그 사실을 접한 세명이 그만뒀으며, 공연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지만 남은 학생들이라도 새로운 촌극에 출연시키고자 시언을 불렀다는 것이다. 전임과 시언은 이 이야기를 조금은 조심스럽게, 별 어처구니없는 일도 다 있다는 듯 가볍게 나누고서 여기 그 이상의 말을 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밤 장면에서 영화는 이 사연을 깊은 감정으로 다시 일깨운다. 시언, 교수 은열(조윤희)과 술자리를 가진 후 전임은 혼자 학교로 돌아와 건물 바깥에 담요를 깔고 조그마한 램프를 켜는데, 잠시 누웠다가 일어나서는 어딘가를 향해 손짓한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작은 빛 아래, ‘사람임을 잊지 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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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쥬스 비틀쥬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신비로운 세계는 겉보기에는 혼란스러워 보이나 그 가운데 개개인은 시스템에 아주 잘 적응해 있고 한 시스템은 또 다른 시스템과, 그리고 시스템 전체와 잘 어울려 돌아가고 있어서, 한 인간이 그로부터 잠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자신의 자리를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위험을 느끼게 된다.” -너새니얼 호손 <웨이크필드>
<영화, 물질적 유령 : 이론과 비평의 경계를 넘어>(질베르토 페레스 지음 | 이후경, 박지수 옮김 | 컬처룩 펴냄)
<비틀쥬스 비틀쥬스>에서 가장 슬픈 이미지는 비틀쥬스(마이클 키턴)가 준비한 리디아(위노나 라이더)와의 결혼 계약서다. 그가 품에서 꺼낸 두루마리엔 몇십년을 고대하며 준비해놓은 결혼 관련 조항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아스트리드(제나 오르테가)를 이용해 부활을 시도하던 살인마 제레미(아서 콘티)를 단숨에 지옥 불에 던져넣어버릴 만큼
[비평] 팀 버튼의 결혼 이야기, 세계의 규칙을 따르기, <비틀쥬스 비틀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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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페이스였을까? 기차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성진(강승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살. 택시는 눈부신 미래로 향하는 것일까? 햇빛이 따가웠는지 성진은 손으로 눈을 가린다. 이 숏이 잔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의 시선을 그의 입에 강력하게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왜 웃지 않는 것일까? 성진의 얼굴에 속 보이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입의 정도에 따라 성진을 대신해 우리는 그가 지었을 만한 표정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숏은 관객의 신체적 반응을 일으킬 만한 강력한 힘을 지녔다. 성진의 직업은 연기자다. 하지만 택시라는 공간은 잠시 머무는 공간일 뿐 무대가 아니다. 하지만 성진은 누구를 의식이라도 한 것일까? 관객은 유일한 목격자이자 김씨 가문의 비밀에 연루된 공모자가 된다. 성진이 들키고 싶지 않은 그 무엇. 성진의 입꼬리에 <장손>이 보여주지 않은 하나의 계절, ‘봄’이 잔인하게 맺힌다.
‘텅 빈’ 가족의 실체
오정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비평] <장손>의 봄이 의미하는 것, <장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