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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숲’, 죄지은 자(죄를 목격한 자)에게 아무도 없는 숲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어떤 일이 일어났건, 나 하나만 눈 꼭 감고 모른 척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곳이 되니 말이다. 불현듯 날아온 돌멩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회색지대를 남긴다. 어쩌면 그 회색지대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통사람’의 자리일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 누구와도 공모할 수 있는 자들의 회색지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피해자의 편에 서서 가해자를 징벌하는 표면적 이야기 속에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쿵, 하는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라고 말이다. 달리 말해, 아무도 없는 숲속에 홀로 서 있는 당신은 누구와 공모할 것인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라는 질문.
침묵과 외면의 돌
삶의 터전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상준(윤계상)이 운영하는 레이크뷰 모텔의 살인사건은 만천하에 공개되고, 영하(김윤석)가 운영하는 펜션의 살
[비평]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공모자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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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1500년 무렵 레오나르도 다빈치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부인의 정체에 대해선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스푸마토 기법을 고안하기 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읽고 노트했던 도서 목록이 발견된다면 학술 뉴스 레터에 실려 미술사학자들에게 전달되겠지만, 16세기 유럽의 귀부인이 다빈치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적은 편지가 발견된다면 그 소식은 일간지에 실리고, 일간지의 유튜브 영상 채널에 오늘의 세계 소식으로 제작될 것이다. 사람들은 유명한 초상화나 인물상을 볼 때면 누구를 앞에 두고 그린 것인지 묻곤 한다. 작가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작품의 삶, 세계, 가치는 모델의 삶, 세계, 가치와 동일하지 않지만 모델의 정체에 대한 사람들의 집요한 관심은 작품이 모델이라는 존재의 현존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루브르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연극 극단 사진사로 예술계에 입문한 프랑스 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여러 차례 카메라로 초상화를 그렸다. 첫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모델의 의미를 묻다, 아녜스 바르다의 초상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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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허구를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 이는 동명의 소설을 원형으로 삼고 있는 <딸에 대하여>에 대해 우리가 흔히 품을 수 있는 기대이자 의심이다. 대중으로부터 이미 응답받은 서사 위에 세워졌다는 친숙함과 안도감, 그리고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면 할수록 점점 더 크게 드리워지는 원작의 그림자. <딸에 대하여>는 이러한 경계에서 출발하는 영화이다. 여기에 영화의 인물들이 속한 상황은 찬반으로 극명하게 양분되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동시대의 담론들과 연결된다. 자신의 이름보다는 엄마 혹은 여사님으로 불리는 주희(오민애)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그녀의 딸 그린(임세미)과 그의 동성 파트너 레인(하윤경)은 LGBT 이슈를, 주희가 요양원에서 극진히 간병하는 제희(허진)는 본래의 다정한 뜻과는 달리 이제는 정책 앞에 붙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진 돌봄 이슈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물리적 현실을 구현할 수 있다는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믿음에 따르면,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비평] 배웅과 마중의 시간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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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영화를 중단한다. 정이삭의 <트위스터스> 후반부에선 거대한 토네이도가 도시를 강타하는 상황이 묘사된다. 위협적인 폭풍의 경로를 따라간 카메라가 도착하는 장소는, 뜻밖에도 영화관이다. 토네이도는 극장을 위협한다. 영화를 보던 관객들을 대피시키고, 오래된 흑백영화가 상영되던 스크린을 파괴한다. 폭풍이 지나가고 극장에 남은 사람들은 스크린이 있던 자리에 뚫린 구멍을 통해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잔해를 지켜본다. 재난이 남긴 광경은 영사기의 빛을 받아 스크린 속의 이미지로 남는다. <트위스터스>는 극장이라는 장소를 빌려, 이미지로서의 재난을 응시한다. 광폭한 태풍을 길들이는 첨단 과학기술을 전면에 내세운 서사의 결말에 나타난 오래된 극장은 마치 20세기에 봉인된 시대착오적인 장소처럼 다가온다. 이 친밀하지만 이질적인 장소에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왜 영화는 끊임없이 재난을 불러오는가? 그리고 영화가 불러온 재난은 왜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관측되는
[비평] 영화가 재난을 응시할 때, 김병규 평론가의 기후의 영화들 - <트위스터스>와 <태풍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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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연대기적으로는 <에이리언> 오리지널 시리즈 1편과 2편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에이리언> 프리퀄 시리즈 이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번 작품은 어쩔 수 없는 ‘핸디캡’을 하나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더이상 영화 속 ‘에일리언’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공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프리퀄 시리즈에서 ‘제노모프’의 기원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리퀄 시리즈가 인류의 기원과 함께 제노모프의 기원을 파고들기 시작하며 1979년 처음 스크린에 등장한 이 괴물의 신비함이 많이 희석됐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페데 알바레스 감독은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이미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익숙한 공식을 극에 끌어들인다. 먼저 남루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고립된 공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청년 무리가 있다. 이들은 고립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비평] 잊혀진 공포의 그림자, <에이리언: 로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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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연출 방식 중 하나였던 롱테이크의 지위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디지털카메라의 기록 능력이 향상되면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아피찻풍 위라세타꾼, 페드로 코스타처럼 이미지의 정적인 흐름을 통해 관객의 관조적 관람을 유발하는 작품, 즉 슬로 시네마(slow cinema)에서 롱테이크가 자주 나타난 바 있다. 그 작품들은 기록의 사실성이 허구적 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몽타주를 금지하자고 했던 앙드레 바쟁의 요청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디지털 합성과 CGI 기술 발전에 힘입어 액션영화, 전쟁영화, 공포영화, SF영화처럼 시각적 볼거리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강화하는 작품에서도 롱테이크 기법이 적용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프레임 내부에 공존하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거나 하나의 숏이 다른 숏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음매 없이 결합하여 관객이 롱테이크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도록 연출된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영화에서 롱테이크는 리얼리티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영화의 끝없는 표류, 디지털 롱테이크가 부른 대항해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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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적 차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이상 구경거리가 되지 못하는 미래가 바로 <미래의 범죄들>이 그리는 시대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보디 호러 장르의 <비디오드롬>에서 <엑시스텐즈>에 이르기까지 신체와 기계라는 물질과 그를 통해 보는 환각과 꿈이라는 비물질을 탐구해왔다. 비물질인 환각 이미지마저도 신경전달물질의 이상 체계로 인해 망막에 맺히는 영상이라고 본 크로넌버그에게 있어 정신은 내부와 외부로 나눌 수 없기에 그의 세계에서 내면은 인체의 내부, 장기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또 <미래의 범죄들>에서 예술로 규정하는 해부와 그 행위자는 <네이키드 런치>의 괴물 형상을 한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쓰는 작가 윌리엄과 문학적 행위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네이키드 런치> 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 윌리엄은 아넥시아의 경계에 이르러 작가임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품 안에서 펜을 꺼내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평] 포스트 포르노 시대의 새로운 쇼, <미래의 범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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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터스>가 <트위스터>(1996)로부터 빌려온 건 인물의 성격과 갈등 구도만이 아니다. 익히 알려진 영화를 영화 속에 인용하는 방식도 둘의 공통점이다. 주인공이 만든 토네이도 실험기구의 이름이 ‘도로시’라는 데서부터 인용은 이미 시작된다. 도로시는 주디 갈런드가 연기한 <오즈의 마법사>(1939) 주인공 소녀의 이름이다. 비록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수단으로 쓰였다 해도, 이 영화가 일종의 토네이도 영화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토네이도가 재난과 파괴로 등치되는 현실 속에서, 토네이도를 다른 세계를 여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식한 기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함을 넘어 놀라움을 안긴다. <트위스터>와 <트위스터스>는 토네이도가 주는 매혹과 두려움을 취사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재난영화의 명랑한 기원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 속 영화
영화관의 관객들이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는다는 것도 두 영화의 공유점이다.
[비평] 왜 극장에는 <프랑켄슈타인>이 상영 중이었을까, <트위스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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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OTT가 HDR이란 용어를 들고 나오기 전까지 영화 속에서는 풍부한 블랙의 계조(밝기의 단계)를 만날 수 있었다. HDR은 High Dynamic Range의 약자로 이미지 암부의 블랙부터 하이라이트의 화이트까지 밝기의 단계가 더 넓어지고 많아진 것을 말한다. 블랙의 표현이 풍부하다는 OLED TV가 등장하고, 핸드폰 디스플레이도 HDR을 지원한다고 광고한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그간 보지 못했던 블랙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막상 우리는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와 시리즈물들에서 블랙의 계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둠이 많은 공간에서 그 공간 안에 배치된 어둠과 각각의 사물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블랙의 계조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화면 속 사람이 갖고 있는 블랙도 마찬가지다. 블랙의 계조가 풍부한 머리카락의 구분은 사라지고 하나의 검은 머리카락 덩어리로 보이기 일쑤다.
영상기술은 휴먼 비전 인간의 눈과 똑같이 보이는 것을 목표로 발전해왔다. HDR도 그 목표 중 하나다. 인간의
[박홍열의 촬영 미학] 영화, 어둠의 계조를 잃다, HDR 시대에 ‘Black’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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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업영화의 주요 흥행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기류를 꼽아보자면 ‘밴드왜건효과’(band-wagon effect)와 ‘언더도그효과’(underdog effect)를 들 수 있다. 전자가 대세·강자를 따르는 심리에서 비롯된다면, 후자는 열세·약자를 응원하는 마음이 이끄는 효과다. 역대 한국영화 최대 흥행 연작 <범죄도시> 1~4편(2017~2024)의 관객 총합은 4175만명. 작품의 안과 밖에서 밴드왜건효과가 확연하다. 최강 주먹이 최악 빌런을 후련하게 때려잡아줄 것이라는 악단 마차가 관객을 모았다. 한편으로 김한민 감독의 역대 한국영화 1위작 <명량>(2013)을 포함한 ‘이순신 3부작’도 총 2945만명이 봤다. 이 경우는 서사 내부에 언더도그효과가 뚜렷하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지원으로 보나 왜군의 세력으로 보나 누가 봐도 열세인 상황에서 나라를 지켰다.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라는 홍보 문구는 언더도그효과의 최대치를 노려 적중한 사례다. 그
[비평] 열세 서사의 징후적 조류, <행복의 나라>를 계기로 본 한국영화의 한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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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단지 생계 때문만은 아니다. 일이 우리를 만성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하고 공황장애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일을 그만두느니 삶을 그만두는 게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하게 할지라도, 우리는 일을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다. 왜일까? 우리가 일을 너무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일이 삶을 완전히 망치고 부숴주기를, 천천히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망하고 있는 마조히스트이기 때문일까? 2022년 6월 훌루(한국에서는 디즈니+)를 통해 첫 시즌, 그리고 마찬가지로 올해 6월 세 번째 시즌이 공개된 드라마 <더 베어>는 주인공 카르멘(‘카미’) 베어제토를 통해 우리가 일과 맺고 있는 애증 병존의 교착 관계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집안 출신인 카미는 마약중독자였던 형의 자살 이후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를 주 종목으로 하는 형의 가게 ‘더 비프’를 운영하기 위해 고향 시카고
[이연숙의 장르의 감정] 일의 고통과 고통, <더 베어>와 자기 파괴적 열정으로서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