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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살의 여인이 13살의 소년과 성관계를 맺다 현장에서 체포된다. 여인은 감옥에서 소년의 아이를 낳았고, 타블로이드 신문은 이들의 관계를 세기의 스캔들로 만들었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의 주인공인 그레이시(줄리앤 무어)와 조(찰스 멜턴)는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부부로 살아간다. 이 스캔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엘리자베스(내털리 포트먼)가 그들을 방문한다. 토드 헤인스 감독의 관심은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실제 사건의 주인공과 그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가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미묘한 긴장감이다.
거울 속에 사는 여자
그레이시 부부와 처음 마주한 엘리자베스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예상과 달리, 그들의 삶은 화목하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밝은 표정의 그레이시는 듬직한 조의 품에 안긴다. 그것도 야외 정원에서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심지어 한 이웃은 “늘 자기가 원하는 걸 확실히 안다”라며, 그녀에 대한 칭찬을 늘
[비평] 실패한 영화에 대한 영화, <메이 디셈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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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는 관객의 굳은 선입견을 점잖게 훈계하는 대사를 초반부에 배치하고 시작하는 <파묘>는 바로 그 전제에 고통받는 척하면서 뻔뻔스럽게 그 전제를 배반하고 심지어 거기에 고상한 명분을 칠하면서 영화적 자살과도 같은 과도한 장식의 전시로 나아가는데, 오컬트에 특화된 재능의 소유자로 주목받던 장재현 감독은 이로써 오컬트와 괴수물을 난폭하게 결합했는데도 상찬받으며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영광의 월계수를 쓰게 되었다. 내게는 얼빠진 소리처럼 들리는 이 영화에 대한 온갖 고급한 비평적 담론과 SNS를 통해 넘쳐나는 진영 논리에 기반한 (좌파 반일영화라는 모 다큐멘터리 감독의 비난에 대한 대중의 응징이라는 투의) 찬가를 존중하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보다 담백한 접근이 필요한 건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이 글을 쓴다.
싸움의 비장한 명분
<파묘>는 변칙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한 과격한 서사의 뒤틀림
[비평] 악의 존재를 전면화한 쾌락의 후유증, <파묘>가 내세우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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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여자는 일본어로 안내하는 승무원에게 짧게 대답하고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장면 둘. 유년기를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에 이민 간 여자는 24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두고 “그 사람은 진짜 한국인(Korean-Korean)”이라는 표현을 쓴다. 한쪽에서는 일본어로, 다른 한쪽에선 영어로 한국인을 호명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 사람과 진짜 한국인. 서로 다른 영화에서 흘러나온 두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굴절된 거울상을 형성한다. 누군가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한국인’이라고 불린다. 어떤 연관성도 없는 두 영화의 인물들은 이렇게 뜻밖의 장면에서 같은 단어를 공유한다. 그런데 그들이 공유하는 단어가 같은 의미를 전하고 있는 걸까?
‘한국인’을 가리키는 두 편의 영화가 한국 안팎에서 나란히 도착했다. 한 영화는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며 극장가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고, 다른 한 영화는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얻은 호
[비평] <패스트 라이브즈>와 <파묘>에서 호명되는 ‘한국(인)’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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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 말할 필요 없이 <파묘>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화두는, 오니의 출현을 기점으로 서사가 급격하게 굴절된다는 점이다. 영화를 비판하는 측은 이 비약을 용인하지 못하며, 호의적인 측은 이 비약을 납득시키는 감독의 과단성에 매혹된다. 나는 후자에 해당하지만, 비평이란 예술가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긍정하는 대신 작품의 구체적 효과가 그 의도를 정당하게 납득시키는가를 논하는 작업이므로 감독의 뚝심이 기특하다는 식의 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파묘>의 도발적인 전략이 지니는 시의성을 논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잠시 우회해 그 전략을 시의성 있게 만드는 동시대 픽션의 상황을 간략하게 점검해보자.
앙드레 바쟁은 새로운 매체와 예술이 부상하면, 그것이 기존의 예술과 상호 간섭하며 새로운 스타일을 창출한다고 말했다. 가령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냉엄한 문체가 카메라를 연상하는 비인간적인 객관주의를 체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미디
[비평] 있어선 안될 존재를 직시하는, 알려지지 못할 싸움에 대하여, <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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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를 보고 난 뒤 혼란한 감정에 휩싸였다. 무엇을 기준에 두고 영화를 판단하거나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오컬트 장르에 초점을 두는 것이 무난하지만, 분명 캐릭터 무비의 성격이 보다 도드라진다. <검은 사제들>에서 하나의 집단으로서 두 사제가 보여주었던 앙상블이 <파묘>에 이르러 도무지 섞일 것 같지 않은 이들에게서 발휘된다. 결혼식 단체 사진을 찍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진사의 주문에 의해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져 서게 된 이들의 위치는 서로 떨어진 자리에서 묘한 균형을 이루는 별자리와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멀고도 가까운 그 미묘한 거리감과 위치 선정이 <파묘>의 본질임을, 마지막 장면은 말하는 것 같다.
화림(김고은), 봉길(이도현), 상덕(최민식), 영근(유해진) 등 4명의 주인공은 알려지지 않은 전사에 의해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다. 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쿨하게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사이란 뜻이다. 무속, 풍수,
[비평] <파묘>, ‘몸의 메커니즘, 장르의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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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은 노동자계급을 주로 다룬 그의 다른 작품들과 결을 달리한다. ‘영국인’으로서 자국의 식민 지배로 인한 아일랜드 내전을 다룰 때, 감독의 포지션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테리 조지 감독의 <호텔 르완다>(2004)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벨기에의 분할 지배의 결과로 후투족과 투치족은 1994년 100만여명이 사망하는 상호 학살극을 낳았다. <호텔 르완다>는 강대국을 상대로 피식민 주체의 협상 전략을 다룬다.
두 작품은 제국주의로부터 형식적인 독립을 이룬 국가들의 식민성(콜로니얼)과 그 유산(포스트 콜로니얼)에 관한 텍스트다.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해방 후 국가 건설 방식과 통치 시스템을 둘러싸고 혼란과 분열을 겪었고, 급기야 침략자에게 향했던 총을 ‘동족’에게 겨누었다. 한국전쟁은 그중 가장 큰 규모의 비극이었다. 8·15 해방과 함께 시작된 제노사이드인 4·3은 “일정(
[비평] 르상티망의 정치와 진영 논리, 영화 <건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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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에서 끔찍한 노인 혐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플랜 75> 속 세상은 평화롭다. 특정 세대를 향한 증오가 살인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발현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계속하며 각자의 미래를 계획 중이다. 영화의 첫 번째 주인공인 미치(바이쇼 지에코)는 건강검진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두 번째 주인공인 청년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는 친절한 태도를 유지한 채 노인들을 응대한다. 세 번째 주인공인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 역시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 <플랜 75>의 전반부는 이 이상한 지속 때문에 서늘하다.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이에 관해 말하지 않아서. 말하자면 사람들 모두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눈을 뜬 기분이 드는 것이 <플랜 75>의 전반부의 인상이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오프닝에서 제공하는 또 하나의 끔찍함은, 이 나라가
[비평] 영화가 고약한 냄새를 풍길 때, <플랜 75>와 <오키쿠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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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를 향한 사랑의 시도
관음과 절시는 영화에서 대상을 훔쳐보는 행위, 더 나아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을 말할 때 소환되곤 한다. 6부작 시리즈 드라마 <LTNS>를 말하려는데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함께 떠올랐다. 영화에서 청년 토멕은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여인 마그다를 매일 밤 망원경으로 지켜본다. <LTNS>의 우진(이솜)과 사무엘(안재홍) 또한 불륜 남녀를 미행하고 잠복하며 대상을 몰래 지켜본다. 이들의 훔쳐보기에 프로이트적 결론을 동원하기보다 도시(盜視) 행위 그 자체를 돌아보면 보이는 것이 있다. 토멕의 훔쳐보기의 끝에는 마그다를 향한 순애가 있고, 우진과 사무엘의 훔쳐보기에는 영화를 기억하고 떠올리게 만드는 짙은 향수가 배어 있다. 증거 수집을 위해 우진과 사무엘이 끌어오는 방법 중에 어떤 단서는 분명하게, 또 어떤 단서는 희미하게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 태어나 영화를 회고하는 장면임을 지시한다.
[비평] 시네마를 향한 사랑의 시도, 'LT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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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항: 이 영화는 인물의 깊은 슬픔을 보존·전달하기 위해 유머를 충전해 포장하였음.
노스탤지어의 시대다. 사람들은 현재에 충실하기 어려울 때 종종 과거를 떠올린다. 자존감 높은 자는 그저 오늘 할 일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후회를 한다. 비전이 있는 사람의 가설은 지금을 설계하는 데 쓰이지만 미래가 불안한 사람의 가정법은 지난날들을 헤맨다. 그때 그 주식을 샀더라면,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 사회의 자존감이 낮아질 때, 공동체가 비전을 찾아내지 못할 때, 구성원들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삼는 영화·드라마는 그래서 자주 과거로 향한다. 저때 저 쿠데타 세력을 처단했어야 하는 건데, 저때 저 대통령이 재평가를 받았어야 하는 건데…. 과거시제 가정법은 간혹 성찰적이어서 의미 있지만, 대개는 선별적인 탓에 일시적 위안이나 선동에 머물고 만다. 수많은 웹툰과 TV시리즈의 주인공들이 초자연적으로 시간을 되돌리거나 신분이
[비평] 향수의 시대에 찾아온 현재의 영화, <바튼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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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사회. 정제된 표현으로 감쌌지만 결국 ‘늙었다’는 속삭임이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는 데 몰두했다. 늙음은 자주 수술대에 오르듯 공론의 장에 올라 이리저리 들춰지고 해부된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 적 있었나? 적어도 나는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활자와 숫자를 넘어, 뜨거운 숨을 내쉬는 이들에 대한 응시가 필요한 때. 이 시기에 노년의 마지막을 다룬 두편의 영화, <소풍>과 <플랜 75>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소재는 비슷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닮은 점이 없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꿀 같은 잠이나 편안한 휴식은 아니다. 그들은 몸이 망가져서, 혹은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해서 누웠다. 이 상태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 그래서 누운 노인의 형상은 죽음에 대한 인
[비평] 눕고 일어나는 생의 행위, <플랜 75>와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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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웹소설이 원작인 드라마가 늘어날수록 ‘드라마 덕후’는 바빠진다. 예전에는 드라마만 보면 되었지만, 이제는 ‘쿠키’를 굽고, 코인을 구매해 원작을 정주행한 후 드라마를 영접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드라마를 먼저 보고 원작을 순례할 때도 있다). 드라마와 원작을 함께 보는 건 ‘제3의 눈’을 가지게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 유익할 때가 많다. 물론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처럼 ‘차라리 원작을 안 봤더라면 재미있게 봤을 텐데’라는 후회가 몰려올 때도 있다.
웹툰의 질문, 드라마의 질문
시청자뿐 아니라 창작자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의 눈’으로 원작과 비교 분석하는 깐깐한 원작 팬들을 설득시켜야 함과 동시에 드라마 팬들도 만족시켜야 하기에 마치 저글링하듯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을까? 원작이 소위 ‘레전드’ 반열에 오른 유명한 작품일수록 그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
[비평] 복잡하고 난감한 질문은 어디로, <살인자ㅇ난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