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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게 뭐야?” 블랙아웃의 화면 위로 던져진 첫 질문이다. 산드라(잔드라 휠러)의 입을 빌려 쥐스틴 트리에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 성공한 한 여성의 남편이 의문의 추락사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관객을 유혹하는 미끼일 뿐이다. 미끼의 떡밥으로 배를 채울 수 없듯,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추락의 해부>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 궁금증을 관객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 결국 <추락의 해부>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빈틈, 진실의 자리
작가 산드라와 그 작품 세계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인 학생 조에(카미유 루더퍼드)의 인터뷰는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 음악을 크게 틀면서 중단된다. 하지만 사뮈엘은 (그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음을 통해 자신이 중단시킨 인터뷰를 지속시킨다. 그르노블에서 다시 만나 인터
[비평] 사실의 빈틈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들, <추락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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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과 서사가 명백히 지시적인 영화가 지닌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클럽 제로>에 대해 할 말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말들은 이 영화가 특별한 감응을 불러일으키기에 파생되기보다는 영화가 요청하고 있는 사회적 시각 때문이다. 예시카 하우스너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약점을 지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밝히며, “<클럽 제로>는 영양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곧 너무 지나쳐서 학생들의 생각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바뀌며 급진화와 조작”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실로 영화는 국적이 불분명한 엘리트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백(미아 바시코프스카)이 새로운 식사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합리적인 생각을 점차 급진적으로 바꾸어가는 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엄밀하게 다루며 그에 따른 결과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 결과란 아이들이 금식을 하는 ‘클럽 제로’의 회원이 되어 노백이 이끄는 그림 속 저편의 낙원을 향해 가고
[비평] 충격의 두께, <클럽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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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를 비평하는 방법은 간단해 보인다. 영화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사뮈엘의 돌연사를 두고 아내인 산드라의 연루 여부를 파헤치는 법정 공방을 다룬다. 그런데 종막에 이르기까지 진상을 밝히지 않고 여러 인물의 변론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모름지기 모호한 것이며, 이 영화는 인간의 주관성이 얼마나 연약한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요약하면 깔끔한 정리가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이 작품의 전부인가.
김철홍 평론가는 <씨네21> 20자평(1442호 참조)에서 인간 주관의 불완전성을 까발리는 기획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고 썼다. 그러게 말이다. 현실의 복수성을 지목하며 주관적 인식의 한계를 지목하는 전략은 이제 꽤 익숙한 화법이 됐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그 익숙함을 근거로 <추락의 해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추락의 해부>에는 쥐스틴 트리에가 법정 공방을 통해 최종적 진실에 도달하거나, 반대로 그 도달에 실패
[비평] <추락의 해부>를 감싸고 있는 피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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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를 벗어나 유럽으로 망명하려는 자라는 자동차에 타기 직전에 걸음을 멈추고 가발을 벗는다. 그녀는 남편 박티아르에게 전달받은 여권을 들고 멈춰 선다. 그리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모니터 스크린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는 연출자 자파르 파나히에게 외친다. “우리 삶을 영화로 만든다고 했죠?” 파나히의 대답. “맞아요.” 자라의 질문. “그런데 이건 뭐죠?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박티아르의 여권이 유효하지 않은 위조 여권이라고 밝힌다. “모두 가짜잖아요. 우리가 가짜가 됐다고요.” 자라는 지금 연출자가 ‘해피 엔딩’을 위해 배우들의 삶을 가짜로 조작했다고 항의한다. 이 장면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노 베어스>의 후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 혹은 자파르 파나히가 원격으로 연출하는 영화 속 또 다른 영화의 장면, 동시에 박티아르와 자라가 처한 현실을 소재로 삼은 허구적 영화의 일부분, 그러나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않은 ‘가짜’ 장면
[비평]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노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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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환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은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진부하다는 걸 일깨운다. 김대중을 존경하든, 김대중을 증오하든 오랫동안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입장은 선입견으로 단단해져 불변의 것이 되었다. 어느 편이건 초기에 형성된 관점은 새롭게 다듬어지지 않고 굳어졌다. 존경도, 증오도 다 진부하다. <길위에 김대중>은 다큐멘터리의 근본을 지킴으로써 우리를 진부함에서 구해낸다. 그에 관한 팩트에서, 팩트의 구성에서 차곡차곡 그의 일대기를 역사에 포개놓는다. 팩트의 구성 다음엔 주석과 해석이 남는다. 그 단계에서 굳은 관점을 해체하고 새롭게 보기 위해 우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길위에 김대중>은 그 나침반이다.
민주주의자로서의 일관된 자기 정체성
김대중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연대기순으로 전개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를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기초적인 전기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그에 관
[비평] 부재했지만 존재할 가치를 위해, <길위에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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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는 디즈니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100’이라는 숫자는 월트 디즈니의 탄생 100주년은 아니다(그는 1901년에 태어났다). 디즈니의 첫 애니메이션 커리어 100주년도 아니다(1919년에 처음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 그가 세운 첫 스튜디오도 아니다(‘래프 오 그램’(Laugh-O-Gram)이라는 스튜디오를 1921년에 만들었다). 미키마우스가 탄생한 100주년도 아니다(미키마우스는 1928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고 첫 장편애니메이션의 100주년도 아니다(<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1937년에 개봉했다). 그러니까 ‘디즈니’라는 말로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가 여럿 있는데, 인간 월트 디즈니와 그의 분신인 미키마우스,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100주년의 당사자가 아니다. 100주년은 ‘월트디즈니 컴퍼니’ 설립 100주년에 해당한다(처음부터 그 이름은 아니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였고, 19
[비평] 디즈니가 디즈니했습니다만?, <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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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나는 켄 로치의 정공법이 시효를 다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일찌감치 등을 돌린 이들에 비하면 훨씬 늦은 축에 속할 테지만 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웅변까지도 감동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미안해요, 리키>에서 리얼리티를 위해 인물을 사지로 몰아가는 방식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 이유가 영화 속 현실이 아니라 영화에 있다는 사실은, ‘확신 불능증’을 앓고 있는 나조차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의 올드 오크>를 마주하기 직전의 심정은 기대감보다는 의무감에 가까웠다. 이미 무언가가 끝났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에 응답하듯 영화 역시 무언가가 끝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켄 로치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공언된 영화는 끝을 형상화하는 대신 이미 끝난 후에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통제되지 않는 것, <나의 올드 오크>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제스처는
[비평] 영화를 멈춰 세운 두개의 동작, <노 베어스>와 <나의 올드 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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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의 SF영화 <외계+인> 2부작에서 내가 가장 싫었던 게 뭐였는지 말해볼까. 바로 외계인의 촉수다. 보존법칙을 위반하며 끊임없이 생성되어 늘어나고,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기에서부터 USB 연결성까지 온갖 기능을 수행하고, 주인공이 한번 휘두른 칼에 잘려나가는 바로 그것.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자기 몸무게의 몇배나 되는 신체기관이 갑자기 생겨나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갈 때 배우가 그 조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묻고 싶다.
요샌 다들 최소한의 물리법칙을 지키는 데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최근 마블 영화를 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차라락 헬멧이 나타나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물리법칙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없이 그럴싸한 그림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액션은 붕괴된다. 최근 마블 영화 <더 마블스>는 CG가 들어간 액션에 반영된 물리법칙이 너무 랜덤이라 이 우주에서 중력이 유지되는 것 자
[비평] <외계+인> 시리즈가 시도한 ‘한국형 SF’의 한계, <외계+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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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하면 두 가지를 자주 말한다. 하나는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대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다수를 포함해 예사 영화보다 더 많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등장인물의 앙상블이다. 그러나 <외계+인> 연작을 보면서 그의 작품이 품은 장소에는 관심이 적었단 생각이 든다. 더 정확히는 다양하게 꺼내고 빈번하게 바꾸는 장소를 바라보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이건 단순히 하이스트 영화라면 여러 인물 군상을 드러내고 강탈 과정을 풀어내느라 필연적으로 많은 장소를 제시할 수밖에 없어서는 아니다. 그의 영화는 직관적으로 땅으로 인식되는 곳에 국한하지 않고 예기치 못한 대상도 장소로 삼는다. 또 그가 잘 구현하는 활극은 장소를 관장하는 주체인 인물이 장소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웅을 겨루는 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달리 보면 그의 영화만큼 장소 대결이 이뤄지는 각축장도 없다. 대결 양상은 다름 아닌 점유와 점거, 퇴각과 이탈이다.
<외계+인> 1부 시작에서 그간
[비평] 장소 바꾸기에 주목하기, <외계+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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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첫 장면부터 정교하게 통제된 롱테이크다. 이러면 자파르 파나히가 아니지 않나. 행상이 지나간 상점가 이면도로에 거리의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잠시 전 지나쳐간 행인이 카페테리아에 앉으면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는 다른 손님에게 맥주를 낸 뒤 남자와 만나 긴 대화를 나눈다. 삼각대 위 카메라가 360도 돌아가는 가운데 인물들은 철저히 계획된 동선에 맞춰 나오고 빠진다. 느린 패닝숏은 얼핏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솜씨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반대다.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여러 인물들이 카메라에 맞춰 움직이는 쪽에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컷” 하는 음성과 함께 영화 촬영 현장임이 드러난다. 이어 화면은 촬영장을 맥북으로 들여다보며 원격 연출하는 감독의 어깨 뒤로 커팅 없이 빠진다. 여기서부터는 카메라가 인물을 뒤쫓는 쪽이다. 테이크는 7분에 육박한다. “전문 편집자의 기술”(감독의 전작 <3개의 얼굴들>의 대사)이다. 노트북 안과 밖이 얽
[비평] 곰은 우리 안에 있다, <노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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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이 영화는 유럽 사회의 어느 단면을 서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거나 도난 사건을 발단에 둔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다다를 법한 결말로 향할 것이라 믿게 만든다. 1.37:1의 화면비와 핸드헬드 카메라가 빚어낸 <티처스 라운지>의 화법은 이따금 다이렉트 시네마를 모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게 한다. 그렇지만 두말할 것 없이 이 영화는 일정 부분 장르 법칙을 따르고 있다. 관계의 정치학과 그 반응의 화학작용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은 한편의 심리 드라마다.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는 대체로 자연 발생한 듯한 사건들이 연쇄되며 파문에 파문을 일으키는 듯한 양상을 띠며 카메라는 그런 현상의 관찰자처럼 행동한다. 공들여 살펴보지 않더라도 드러나는 건 독일 학교와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차별이라는 유럽 정치 사회의 민낯이다. 그러나 <티처스 라운지>는 사안의 핵심에서 비켜서 세워진 세계다. 당연한 세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오랜 시간 우리
[비평] 진실의 윤리학, ‘티처스 라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