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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인어공주'와 '토리와 로키타', 영화와 현실의 관계 재고하기

디즈니 실사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공개 전부터 논란에 직면했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설정을 깨고 주인공 에리얼 역에 흑인 배우를 기용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 인 거다. 저항의 원인을 원작 파괴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눙칠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 반영을 통한 변화는 리메이크의 본성이라는 점에서, <인어공주>에 대한 반감은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화이트 워싱’에 대한 비판의 반작용으로 ‘블랙 워싱’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흑인 배우 기용을 둘러싼 거센 저항은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판타지 세계의 어선을 빠르게 현실 세계의 항구로 복귀시켰다.

현실의 무거움을 안고 실사화된 <인어공주> 서사를 마주했을 때, 바다 아래와 위, 두 세계 사이에 선 에리얼의 갈등은 현실을 정확히 복사한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 판타지는 수면 아래에 있지만, 에리얼에게 판타지의 세계는 곧 우리의 현실인 수면 바깥의 세계다. 트라이튼은 바깥 세계의 위험을 강조하며 에리얼의 환상을 가로막으려 하지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흑인화된 세계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인 것과 마찬가지다.

<인어공주>를 둘러싼 논란은, 더 들어가보면 영화의 현실 반영에 관한 모종의 거부감과 연결된다. 제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주인공을 흑인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한 것으로 규정되며, 올바름의 추구는 ‘영화를 영화로 보고 싶다’는 논리에 의해 거부된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할 때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게 된다. 과연 정치적인 것은 영화적인 것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혹은 현실은 영화와 공존할 수 없을까. 이 질문은 다소간 어리석다. 애초에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환상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세계에 완벽히 편입됐다 해도 기원을 거슬러 가면 실화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다. 다만 사적 경험이 기반일 경우 허구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편입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현실이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다룰 경우 현실과 영화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재현 비판론의 계급성

<인어공주>를 둘러싼 환상과 현실의 개입 문제를 전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논의의 방향을 정반대로 돌릴 필요가 있다. 역사 영화 혹은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에 관한 비판론에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 관한 생각이 내재해 있으며, 이것이 현실 개입 영화에 관한 거부감을 설명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다. 허문영 평론가는 <변호인> 비평, ‘그를 전설의 서사로 추어올리지 마라’에서 영화가 노무현의 생애를 다루며 논쟁적인 정치인의 삶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청렴결백한 변호인의 삶만을 취사선택했다고 비판한다. 복합적인 측면을 가진 현실은 허구화되는 과정에서 납작하게 눌린다. 이러한 비판점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의 대중 서사화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으로 볼 여지가 있다. <변호인>이 실존 인물의 삶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면 글의 비판점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논리가 극단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역사적 사건의 영화화를 거부하는 논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송경원 기자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에 대한 비판론,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들의 한계와 우려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역사 영화 재현에는 당대의 현실이 반영되기 마련이며, 이는 관객의 쾌락과 맞닿은 오락성으로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앞선 논의와 달리 허구(역사영화)와 현실(오락성)이 역전된 채로 논의된다. 필자는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가 가진 조심스러운 태도와 영화가 지향하는 오락성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지만, 실상 그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나 평자의 모순과 분리될 수 없다.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 관한 질문은 (오락성을 포함한) 재현의 외설성을 둘러싼 논란과 맞닿는다. 자크 리베트가 ‘천함에 대하여’를 발표하고, 그것이 다른 평자들에 의해 후대에도 힘을 얻은 이후, 우리는 단 하나의 잘못된 숏만으로 해당 영화를 거부할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구조 안에서 올바르지 않은 재현을 비판하는 논의가 지향하는 것이 올바른 재현이 아니라는 사실은 종종 은폐된다. 다시 허문영 평론가의 글로 돌아가보면, 논의의 핵심은 ‘불온한’ 인물을 불온하지 않은 인물로 묘사했다는 데 있다. 노무현이 대중적인 캐릭터 송우석이 되기 위해 논쟁이 될 만한 불온함을 모두 제거해야 했다. 위안부 피해자 재현에서도 주된 쟁점은 불온할 수 있는 피해자를 순진무구한 소녀로 과잉 대표화한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온한 캐릭터 구현의 가능성과 한계를 충분히 실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온한 재현 역시 실제와의 비교에서 미끄러지거나 과잉 해석되는 부분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불온한 재현을 요구할 때, 다른 편에는 재현이 가진 본래의 불온함을 지적하며 재현 불가를 설파한다. 두 논의를 마주 놓을 때, 후자의 논의는 전자의 논의로 대응할 수 있다. 재현 불가능에 대한 요구는 영화를 순수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전자가 비판하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현의 불온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기로 할 때, 이제 문제의 초점은 재현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가 아닌, ‘천한가, 천하지 않은가’로 옮겨진다. 이렇게도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충분히 예술적으로 불온한가, 아니면 천박하게 불온한가. 예술적으로 불온하다면 방어되거나 추앙받을 수 있다. 반면 천박하게 불온하다면 평가 절하될 것이다. 올바른 척하는 불온한 영화만큼이나 참기 힘든 건 스스로 올바름을 요구한다고 믿는 순진한 비판이다.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영화의 윤리성을 비판하는 논의 대부분이 이러한 혐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중적인 것은 곧 일정 부분 천한 것이다. 자신의 비판에 숨겨진 계급적인 지점을 직시하지 못하는 글은 불쾌한 재현만큼이나 불쾌하다.

구조 재현에 반대한다

실화영화에서 이상적인 허구화가 작동할 때 부정적으로 인식된다면, 대중적인 판타지영화에 ‘올바른 현실’이 개입하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로 밀쳐질 수 있다. ‘올바른 현실’ 개입에 반대하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특정한 조건 속에서 도출되는 기본값처럼 이해되어 무조건적인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세계는 ‘흑인 여성주인공 서사=올바름’으로 만들어, 흑인 여성주인공이 판타지 세계에 편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캐릭터들은 불온해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온건한 캐릭터로, 시작도 하기 전에 밀쳐진다. 이러한 방식의 밀침은 성난 대중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신중한 평자들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이 된 실제적 현실에 관한 과도한 집착이나 해석으로 드러난다. 디즈니 영화처럼 대중적인 서사영화가 아니기에 반감이 덜했으나, 그와 비슷하게 처음부터 정치적이라고 인식된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난민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역시 올바름의 목록에 이견 없이 포함된다. 난민을 다루는 방식에서 <가버나움>이 보여준 주목할 만한 태도는 난민 소년 주인공에게 허구의 이야기를 주고 그를 배우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불쌍한 피해자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대신, 배우가 되도록 만든 것이 <가버나움>이 실험한 불온함의 실체다.

나는 <씨네21>에 기고한 비평, ‘나는 고발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자인(자인 알라피아)이 지닌 배우의 면모를 강조하며 영화의 불온함에 응답하려 했다. 김지미 평론가는 후속 평론, ‘베이루트 삶을 바라보는 한계’에서 자인이 가진 스타성은 안쓰러움을 자아낼 뿐이라며 애써 판타지로 돌려놓은 자인 캐릭터의 특징을 다시 현실로 옮기며 영화가 비판의 화살을 시스템으로 충분히 돌리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시스템을 둘러싼 논평은 ‘현실’을 반영한 영화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한다. 박지훈 평론가는 ‘<러브리스>가 비극적인 세계와 단절된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방식’이라는 글에서 내가 사라진 소년에 중심을 두고 애써 복원한 존재의 이미지를(‘<러브리스>에서 카메라는 왜 아이를 놓쳐버렸나’) 다시 부재쪽으로 돌려놓는다. 부재를 강조하면서 말하고자 한 것은 결국 국가라는 이름의 구조이자, 시스템 혹은 시스템 속의 인간이다. 종종 영화가 시스템을 온전히 짚지 못한다는 논지의 비판이나 영화에서 시스템(만)을 읽어내는 방식의 비평을 마주할 때면 묻고 싶어진다. 진정 영화에서 보고 싶은 것이 시스템인가? 시스템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건 혐오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당신은 시스템을 언급하면서 시스템을 읽어내는, 혹은 시스템의 부재를 감지하는 자신의 시선에만 만족하는 것은 아닌가.

<토리와 로키타>를 두고도 시스템에 관한 다소 상반된 지적이 제기되었다. 난민의 현실이 다르덴 영화 세계의 중심부에 진입하면서 풍부했던 리얼리즘의 의미는 ‘현실(시스템)의 거울’ 정도로 축소된다. 소은성 평론가는 <씨네21> 리뷰에서 ‘현실의 표본’이라는 표현을 통해 영화가 인물보다 구조 재현이 우위에 있음을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박동수 평론가는 블로그에 공개한 ‘지워진 존재’라는 글에서 영화가 몇몇 적을 설정했을 뿐 더 큰 시스템에 대한 재현이 부재함을 비판한다. 전자는 영화가 분명한 인물을 제시하고 있음을 외면하고, 후자는 다르덴 형제가 시스템에 초점을 둔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척한다. 다르덴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얼굴이 지워진 건 다르덴의 세계가 변화한 탓이기보다는 주인공이 이민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가 현실 문제를 다루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한, 이민자 주인공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현실’뿐이다. 다르덴의 영화는 지금 여기에 진동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게 했을 뿐, 시스템(만)을 지적한 적이 없었음에도, 이민자를 주인공으로 삼자 시스템에 관한 지적이 나온다는 점은 고민해볼 지점이다. 이민자 주인공의 영화에서 바라는 것이 오직 시스템(현실)인 것은 아닌가? 검은 피부색을 부재로 밀치면서 시스템을 방패 삼아 대면을 거부한 것은 아닌가.

현실 반영 영화에 대한 공고한 인식은 캐릭터를 불온하게 묘사해도 온전히 깨지지 않는다. <소년 아메드>에서 이민자 소년 아메드(이디드 벤 아디)의 불온함은 관객을 당황하게 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아메드가 창문을 통해 내부로 침입했다면, 그는 이네스를 죽일 수도 있었다. 영화가 보여준 충격적 추락은 가혹한 단죄만이 아니라, 더 끔찍한 상황을 묘사하거나 회피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중단은 우연처럼 재현되었으나 실은 필연이다. 누군가를 계도하거나 구원하는 일은 개별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함을 인식시키는 거대한 ‘시스템’이 갑작스럽게 돌출하는 순간이자, 감독의 ‘영화적’ 개입이 감지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몇몇 관객은 방금까지의 복잡했던 심사는 잊은 채 감독의 선택과 판단만을 비판할 것이다.

환상이 놓인 자리

<인어공주>를 둘러싼 일부 관객의 반감은 한편으로는 정당했다. 주인공의 피부색은 기존의 스토리를 전환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예상보다 주된 변수로 작용한다. 새로운 <인어공주>는 단순히 다른 세계를 꿈꾸는 소녀의 성장 스토리이거나 경계를 뛰어넘은 위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에리얼이 우르술라와 위험한 거래 이후 뭍으로 올라왔을 때, 그는 흡사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난민처럼 보인다. 그가 목소리를 잃은 설정은 다른 세계의 언어와 소통할 수 없는 난민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은유처럼 보인다. 이전 세계에서 숨을 쉬고 활보하게 했던 꼬리는 부끄러운 것으로 숨겨야 하고 대신 휘청거리는 다리와 함께 새로운 세계에서 숨을 쉬고 걷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만 한다. ‘성장’은 판타지가 아니라 적나라한 현실이다.

<인어공주>가 난민을 재현하는 영화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난민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더 큰 비유의 대상이다. 현실에서 난파된 것은 판타지 자체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세계는 난민을 거울 삼아 자신의 현실을 본다. 환상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환상 혹은 실제인지, 더 정확하게는 무엇이 환상 혹은 실제의 자리로 떠밀리는지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어공주>에서 현실과 환상은 물 바깥과 물속으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과 판타지는 각각의 위치에 따라 조정되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에리얼과 에릭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판타지의 위치에 둔다. 환상과 현실은 모드 전환적 동시성을 지닌, 맞붙은 거울상과 같다. 환상과 현실의 관계는 흡사 다크 모드 설정하기와 유사하다. 현실에서 다크 모드는 옵션이지만, 지속적으로 밝은 빛에 노출된 인류가 시각적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기본 모드가 될 수 있다.

홍상수의 <물안에서>가 흐릿하게 처리된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 건은 시각 상실의 상태로 떠밀리는 인류의 미래 비전이다. 이러한 방식은 ‘영화의 위기’(혹은 극장의 위기)를 논할 때 거의 논의되지 않던 지점인, ‘시각의 위기’를 건드린다. 빠르게 노후화되는 인류의 시각적 퇴화가 극장영화의 위기보다 빠른 속도로 닥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인류가 일시에 시각을 잃거나 상실함에 따라 영화가 흐릿한 경험으로 치환된다면, 영화는 일종의 라디오극에 가까운 음향적 형태로 변형되어 각자의 기억을 재생하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음향적 상태는 환상이 기거할 수 있는 종착지이자, 환상과 현실이 재조정되는 장소다. <인어공주>에서 에리얼이 목소리를 빼앗겼다가 다시 찾는 과정은 음향적인 것과 환상의 동시성을 보여준다(목소리의 복귀와 함께 환상이 재작동한다). 음향과 목소리 싱크의 어긋남과 재조정은 유성영화의 탄생기를 상기시키며, 목소리가 최초로 도래하던 시기의 감동을 복원하려 한다. <토리와 로키타>에서 두 인물이 함께 부른 노래는 환상이 기거하는 작은 장소다. 잔인한 현실을 한순간도 떼어낼 수 없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평화롭다. 이들의 노래가 불가능해졌을 때, 노래는 엔딩 크레딧의 검은 화면을 파고들며 관객의 기억 속에 세이렌의 노래로 잠재된다. <인어공주>가 멈춘 곳은 물속도, 물 바깥도 아닌 반쯤 몸을 담근 물 안이다. 에리얼과 에릭의 시점에서 번갈아 제시된 각자의 현실과 환상 중 그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않은 위치다. 에리얼과 에릭의 미래가 재현되지 않은 이유는 환상의 지속을 위해서겠지만, 한편으로는 환상의 종료로 인한 공백처럼 느껴진다. 더는 재현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미래의 환상은 재현되는 대신 재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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