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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는 주기적으로 특강을 열었다. 작가, 배우, 가수, 방송인 등 각계의 유명인사들이 초청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꽤 운 좋은 경험이었다. 한번은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저자인 일본의 유명 작가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초대됐다. 정신이 산만했던 내가 그날따라 통역사까지 붙은 강연을 집중해서 들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어쩌면 흔한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내용이었겠지만 나처럼 어린 친구들의 사고를 확장해줄 만한 조언들도 분명 있었다. 예를 들어 ‘노래를 감상할 때 악기 하나하나를 따로 반복해서 들어보라’는 팁은 훗날 음악을 하게 될 나에게 나름 실용적인 원 포인트 레슨이었다. 또 하나 뇌리에 박혔던 이야기는 ‘매일 영화를 세편씩 보라’는 말이었다. 창작자로서 시야를 넓혀준다는 맥락의 조언이었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당시 나와 친구들은 강연 이후 한동안 그 말에 꽂혀 있었는데 정말로 하루에 영화 세편씩 보기 프로젝트를 강행했다. 그것은 마
[딥플로우의 딥포커스] ‘트레이닝 데이’가 힙합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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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를 연달아 보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고, 실제로 두 영화를 비교한 글도 이곳저곳에 이미 많이 올라와 있겠지만, 나는 <헤어질 결심>과 <현기증>이 닮은 점이 많은 영화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현기증>은 널리 걸작으로 평가받는 1958년작 미국영화로 형사 역할을 하는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몰래 감시하다가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내용을 다룬다. 여기까지만 해도 바로 보이듯이 <현기증>과 <헤어질 결심>은 이야기의 기본 구도가 같다. 관객이 비교적 그 심경을 쉽게 알 수 있는 남자주인공이 수수께끼가 많은 여자주인공의 진실을 서서히 파헤쳐나간다는 줄거리 흐름도 같다. 이야기 중반에 남녀주인공이 못 만나게 되는 전환점이 있다는 점도 같고, 하다 못해 범죄영화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면서도 동시에 뛰어난 개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유명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도 일치한다.
그
[곽재식의 오늘은 SF] 마침내 빽 투 더 퓨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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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이번주 종영했다. 드라마가 슬슬 입소문을 타고 매화 시청률이 배로 뛰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고래 이야기를 하고 회전문과 김밥 이야기를 하고 우영우식 인사법을 귀엽게 모방할 때에도 나는 실눈을 뜨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드라마를 정주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며 작품의 진심을 의심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주인공’이라는 설정에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자폐인 캐릭터를 귀엽고 사랑스럽게 포장하는 것은 뻔하고 얄팍한 수법인 데다 오히려 극소수의 천재 자폐인을 특별한 존재로 대상화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더불어 비장애인 배우의 장애인 연기를 불안하게 지켜볼 때가 많은데 어설픈 재현과 과장된 표현은 그 자체로 희화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장애인 캐릭터는 연민의 대상이거나 현실과 유리된 판타지한 존재로 편협하게 묘사되는 경우도 많아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이주현 편집장]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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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기자의 SNS에서 “나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문장을 처음 보았다. 웃기기도 했지만, 충격적이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기도문 영문을 찾아봤다. “but deliver us from evil”, 여기에서 말하는 ‘악’이 ‘evil’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원래의 문장은 ‘우리’, 복수로 되어 있지만 ‘but’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 들어간 ‘다만’을 ‘나만’으로 전환하면서 기도의 대상이 단수가 되었다. 언어유희로는 최고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다’라는 글자 하나를 ‘나’로 바꾸면서 이렇게 기가 막힌 구조적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니! 아마 다른 언어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일일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 “나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 문장이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 중 하나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래 제목은 “the tyranny of merit”이다. 메리토크라시라는 단어는 많은 철학 용어가 그렇듯이, 정말
[우석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런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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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내리던 날에 <헤어질 결심>을 봤다. 아주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는데,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즐거웠고 영화도재미있었다. 영화 내용과 별개로 인상 깊었던 것은 애플워치를 이용해서 음성 메모로 사건을 기록하는 박해일 배우의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영화 속 형사들은 수첩에 메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막상 이 시대의 장비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영리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였다.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싱어송라이터에게 메모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장비다. 급한 상황에서 떠오른 가사나 아이디어를 식당의 냅킨에 기록했다는 음악가의 이야기는 꽤 흔한 일화다. 지금 생각나는 것들을 휘발되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항상 메모장을 휴대한다는 동료들이 꽤 된다. 메모에 적합한 휴대성과 편의성과 심미성을 가진 노트를 섬세하게 골라 사용하는 모습에서 대단함을 느끼기도 한다. 나 역시 스마트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애플워치로 능숙하게 악상을 메모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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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단편소설 <바벨의 도서관>의 작가의 말에는 이런 멘트가 써져 있다. “SF는 반드시 과학을 다루는 장르는 아니며, 이 이야기는 그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실험이다.” 그렇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과학기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일부러 말이 되지 않게끔 비틀어놓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적어도 SF처럼은 보인다. 놀랍게도 SF는 과학과 무관한 장르일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007 영화 속 첨단 무기들이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매번 언급하다보니 이제는 그냥 SF 장르에서 빼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어쨌든 <스타워즈>에서 제대로 된 과학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굳이 따지자면 병사들에게 얼굴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헬멧을 씌우면 명중률이 급감한다는 통계적 사실 정도가 그나마 <스타워즈>에서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부분이 아닐까. 제다이들이 광선검을 ‘부딪치며’ 싸우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그들이
[이경희의 오늘은 SF] 엉터리지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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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8일과 9일, 서울과 경기 지역 일대에 80년 만의 기록적 폭우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 겪어본 공포스러운 폭우였다. 출근 시간이 평소 대비 2~3배 늘어난 것 말고는 침수나 붕괴로 인한 직접적 피해가 없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자주 가던 하천의 나무들이 어깨까지 물에 잠긴 것을 보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상기후로 비가 멈추지 않아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긴 근미래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 <날씨의 아이>는 분명 감독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든 작품이지만, 지금과 같은 재난이 반복된다면 상상의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서울 관악구 반지하 주택 일가족 참사 사건을 보면서는 <기생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외신에서도 <기생충>을 예로 들어 한국의 집중호우를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기생충>이 어쩌다 현실을 반영한 다큐멘터리가
[이주현 편집장] 인간답게, 동물답게 살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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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이 지면에서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자의 인내심에 대한 이야기를 썼으니, 세줄 요약의 시대에 대한 한탄조차도 이미 옛것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 글을 쓸 때도 후렴 모음 대신 앨범을 듣는 일에 대하여, 책의 다이제스트 대신 천천히 독서를 하는 일에 대하여, 20분짜리 요약 영상을 보는 대신 2시간을 들여 영화를 보는 일에 대하여 이야기했지만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 그 뒤로도 세상은 바빠지기만 했고, 시간을 들이는 향유는 점점 사치로 취급받는 듯하다. 그사이 틱톡은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해졌고 인스타그램은 릴스라는 기능을, 유튜브는 쇼츠라는 기능을 추가했다. 셋 모두 주로 1분 내외의 영상을 취급한다.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에는 ‘5초짜리 영화의 세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더이상 아무도 2시간짜리 영화를 보지 않고 단 5초면 한편의 영화가 끝나는 세계. 1분이 넘는 영상은 아무도 보지 않는 세계. 이건 영화적인 표현일 테고, 실제로 5초짜리 영상은 영화라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5초짜리 인내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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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힙합 장르와 관련한 영상물의 소식은 언제나 반갑다. 하지만 그것이 실존 뮤지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 내용인 것을 확인할 때는 기분이 짜게 식는다. 솔직히 말하면 N.W.A의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이 그랬고, 전설적인 두 래퍼 비기와 투팍의 영화들이 그랬다. 구체적으로는 50센트의 영화 <겟 리치 오어 다이 트라인>의 한 장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동네를 지나가는 어린 시절 50센트를 바라보며 한 노인이 뱉은 ‘저 녀석은 분명 크게 될 놈이야’ 같은 대사는 나에게 진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아무리 멋진 뮤지션이라도 과도한 신격화는 나에게 두 시간 동안의 항마력 테스트일 뿐이다. 대부분의 힙합 장르 영화가 이러한 전기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나의 이 ‘딥포커스’코너에도 다루고 싶은 작품이 한정되는 고충이 생긴다. 물론 <8마일>은 예외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적어도 에미넴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한 작품이 그런 나의 편견을
[딥플로우의 딥포커스]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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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 1966년작 <헬리오 특공작전>에 따르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눈에 잘 뜨이는 빨간 재킷 같은 화려한 옷을 입고 경치 좋은 프랑스 휴양지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다니다가 심심하면 술을 마시면 된다. 그러고 있으면 갑자기 아리따운 남녀가 접근해오고, 중요한 인물을 만나고, 악당들이 들러붙고, 그러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악당을 물리쳐준다. 만약 악당이 총을 빼앗으려고 하면 그냥 총을 주고, 악당이 그 총을 진짜로 쏘려고 하면 그냥 쏘라고 하면 된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러다 보면 저절로 세상이 위기에서 벗어난다. <헬리오 특공작전>은 정말 그런 내용이다.
도대체 이런 영화가 왜 나왔을까? 1960년대 초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인기를 끌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아류작들이 나왔다. 원래 보통 첩보영화에는 상대방이 간첩일지 아닐지 의심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정체를 숨기고 있는 주인공이 들킬지 말지 하는 아슬아슬한
[곽재식의 오늘은 SF] 헐렁한 헬리오 특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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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편집실에서 만들어진다는 클리셰가 거짓이라면, ‘음악을 넣으면 장면이 더 괜찮아질 거야’라는 클리셰는 사실이다. 거의 모든 영화는 좋은 음악이 들어가면 더 나아진다.” 시드니 루멧 감독이 쓴 책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나오는 문장이다. 시드니 루멧 감독이 자신의 영화 연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영화 제작 전반에 관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유용한 안내서이자 이보다 더 솔직할 수 없는 직업적 회고담이자 20세기 후반 할리우드의 역사를 생생히 담고 있는 최고의 텍스트다. 시드니 루멧은 영화의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에서 “음악과 영화, 이 둘은 영원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훌륭한 장면에는 훌륭한 스코어가 있다”며 영화와 음악의 상호 관계를 헤아렸는데, 그가 말하는 좋은 영화음악은 결국 영화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투명하게 존재하는 음악이다.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신나는 축제의 장이 되어주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8월11일 개막한다. 제천국
[이주현 편집장] 그런 순간엔 이런 음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