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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플로우의 딥포커스]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를 보다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

새로운 힙합 장르와 관련한 영상물의 소식은 언제나 반갑다. 하지만 그것이 실존 뮤지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 내용인 것을 확인할 때는 기분이 짜게 식는다. 솔직히 말하면 N.W.A의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이 그랬고, 전설적인 두 래퍼 비기와 투팍의 영화들이 그랬다. 구체적으로는 50센트의 영화 <겟 리치 오어 다이 트라인>의 한 장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동네를 지나가는 어린 시절 50센트를 바라보며 한 노인이 뱉은 ‘저 녀석은 분명 크게 될 놈이야’ 같은 대사는 나에게 진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아무리 멋진 뮤지션이라도 과도한 신격화는 나에게 두 시간 동안의 항마력 테스트일 뿐이다. 대부분의 힙합 장르 영화가 이러한 전기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나의 이 ‘딥포커스’코너에도 다루고 싶은 작품이 한정되는 고충이 생긴다. 물론 <8마일>은 예외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적어도 에미넴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한 작품이 그런 나의 편견을 녹여줬다. 영화는 아니지만 TV시리즈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는 그런 면에서 꽤나 균형잡힌 작품이었다. 몇년 전 유튜브 티저만 접하고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지나쳤던 이 작품이 얼마 전 디즈니+에 서비스되기 시작했다. 시즌제 드라마의 분량이 다소 부담스럽기 때문에 재생 버튼을 누르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품의 주인공이 나의 우상인 우탱클랜이었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1993년 등장한 우탱클랜은 공식적으로 10명의 멤버가 소속된 전설적인 힙합 그룹이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힙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며 이제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힙합 컬트가 돼버렸다.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는 우탱 핵심 멤버들의 유년기부터 그룹의 탄생 비화, 데뷔 앨범의 작업 과정과 성공 전략을 순차적으로 담아낸다. 지금까지 공개된 시리즈는 총 2개 파트로, 멤버들의 데뷔 전 거친 거리의 삶을 누아르풍으로 그려낸 시즌1과 음악 비즈니스 업계로 뛰어들며 우탱클랜으로서의 모습을 갖춰가는 시즌2로 나뉜다. 내년에 예정된 차기 시즌은 성공 가도를 달리는 멤버들과 그에 따른 갈등을 다루지 않을까 예상된다. 우탱클랜의 창시자이자 헤드 프로듀서, 래퍼 르자(RZA)는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핵심 화자이자 주인공으로서 존재감 있게 그려진다. 우탱의 모든 멤버들이 저마다 매력과 서사가 있지만 아무래도 이 그룹의 정체성이 르자로부터 컨설팅되고 확립됐으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탄생한 우탱 신화의 시작은 스태튼 아일랜드라는 섬의 고립되고 소외된 특유의 지역색을 등에 업고 더욱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우탱클랜은 힙합 문화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뉴욕의 빈민가, 그중에서도 동떨어진 환경과 외딴섬 취급을 받는 자신들의 고향인 스태튼 아일랜드를 소림(Shaolin)이라 명명하고 자신들을 무당파(Wu-tang)로 칭하며 마치 무협 소설 같은 신박한 세계관을 창조해냈다. 갱스터 기믹 클리셰가 범람하던 당시의 힙합 게임의 무대를 무림의 한복판으로 바꿔버리며, 출신지의 네거티브한 언더독 이미지를 참신한 아이디어로 반전시키는 영리한 승부수를 둔 것이다. 대부분의 래퍼들이 자신의 스트리트 크레딧과 살벌한 라이프 스타일을 과시하려 악명 높은 깡패들의 이름을 차용했지만 우탱의 멤버들은 자신들을 무림의 고수라고 자처했다. 멤버들의 예명도 그 컨셉에 맞아떨어지게 만들어냈다. 고스트 페이스 킬라(귀면살수)라든지, 마스터 킬라(<소림 36방>의 미국판 제목), 올드 더티 바스타드 등 홍콩 무협영화의 주인공이나 제목을 그대로 옮겨왔다.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에서는 이들이 어릴 때부터 홍콩영화를 돌려보며 극중 대사를 외우고 사나이의 우정과 교훈(?)까지 얻는 장면들을 묘사하며 그 나름의 진정성에 대해 어필한다.

1993년 발표된 그들의 데뷔 앨범 《Enter the Wu-Tang(36 Chambers)》은 우탱클랜을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이 또한 제목에서 이소룡의 <용쟁호투>의 미국 개봉명과 <소림 36방>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앨범의 인트로부터 무협영화에서 샘플링한 대사들이 포문을 열고 창과 칼이 부딪히는, 무림고수들의 기합 소리가 앨범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동양적 사운드가 가미된 르자 특유의 샘플링 비트 위에 9명의 래퍼들이 저마다 갈고닦은 기술을 선보이는 듯한 이 독특한 컨셉과 연출은 한편의 비급 무협영화를 힙합 음악으로 듣는 듯하다. 이러한 우탱클랜 스타일의 성공 요인은 서구권 특유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환상과, 힙합 황금기 시대의 천재들이 만나 복합적으로 이뤄진 시너지일 것이다. 그것이 우연일지언정 30년 전 우탱이 제시한 이러한 음악적 경향은 지금까지도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의 작법에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사실상 이 모든 걸 설계하고 주조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르자의 창의성과 감각은 음악 프로듀서 그 이상의 영역에서도 발휘되며 우탱을 하나의 컬트적 현상으로까지 이끌어냈다. 우탱클랜의 컨셉을 창조하고 거대한 상업적 성공으로 이끈 르자의 과감한 선구안은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에서도 결코 과장 없이 균형 있게 묘사된다. 동네에서 랩 좀 한다는 멤버들을 규합하고 각자의 매력과 성향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이끌어내는 프로듀싱 능력, 독창적이고 기발한 세계관 구축으로 음악 비즈니스 업계를 공략하는 르자의 사업 공식은 어쩌면 현재의 K팝 아이돌 시장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돌 에스파에게 광야가 있다면 우탱클랜에게는 소림이 있다. 르자의 특출난 면모는 훗날 영화계 진출로까지 이어지는데, 이미 여러 작품의 음악감독은 물론 각본, 감독까지 맡은 작품들을 제작해내고 있다. 고전 비급영화들에 대한 동경과 영향을 공유하는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와의 협업도 그에겐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탱 클랜: 아메리칸 사가>를 정주행한 후 《Enter the Wu-Tang(36 Chambers)》을 다시 들어봤다.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수백번은 돌려 들었는데도 또 다른 새로움이 느껴진다는 게 얼마나 기쁜 경험인지. 극중 르자가 전혀 다른 시대의 음반들에서 샘플을 발췌하고 재조립하며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재창조해내는 비트 샘플링의 정석을 시각적으로 멋지게 담아낸 시즌2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는 이 시리즈의 백미이다. 시즌1의 기시감 있는 갱스터 클리셰 에피소드들을 참아낸다면 중후반부부터는 우탱클랜 신화의 진면목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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