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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애플워치로 능숙하게 악상을 메모할 수 있다면
윤덕원(가수) 2022-08-18

폭우가 내리던 날에 <헤어질 결심>을 봤다. 아주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는데,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즐거웠고 영화도재미있었다. 영화 내용과 별개로 인상 깊었던 것은 애플워치를 이용해서 음성 메모로 사건을 기록하는 박해일 배우의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영화 속 형사들은 수첩에 메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막상 이 시대의 장비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영리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였다.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싱어송라이터에게 메모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장비다. 급한 상황에서 떠오른 가사나 아이디어를 식당의 냅킨에 기록했다는 음악가의 이야기는 꽤 흔한 일화다. 지금 생각나는 것들을 휘발되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항상 메모장을 휴대한다는 동료들이 꽤 된다. 메모에 적합한 휴대성과 편의성과 심미성을 가진 노트를 섬세하게 골라 사용하는 모습에서 대단함을 느끼기도 한다. 나 역시 스마트폰을 주된 기록 도구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손바닥만 한 노트를 항상 가방에 휴대했었다. 그렇게 메모한 것들이 브로콜리너마저 1집과 그 이후의 일부 곡의 가사가 되었다.

큰 변화는 2010년 등장한 아이폰을 구입한 뒤부터였다. 메모를 기록, 저장, 공유할 수 있었고 음성 녹음까지 가능한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글씨체가 고르지 않아 손글씨 쓰는 것을 싫어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워드프로세서나 타자기로 수업 시간에 노트 필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타이핑을 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기록하고 싶어 키보드가 달린 휴대용 컴퓨터를 구입해 사용한 적도 있다. 물론 사용 시간도 짧고 화면이나 키보드에 열악한 점이 있어 결국은 노트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스마트폰을 사용한 뒤론 종이 노트를 사용한 적은 많지 않다.

스마트폰이 메모장으로서 편의성, 보존성, 그리고 휴대성에서 큰 장점을 갖췄으니 그 이후로 나의 메모는 더 좋아졌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물리적인 제약이 없어지고 나서야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급하게 떠오른 것을 기록해야 하는 상황에서, 메모하는 습관이 안돼 있어서, 그리고 ‘어디까지 메모해야 할지’ 잘 몰라서 모호하게 떠오른 생각을 글로 전환하는 과정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메모를 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각난 것을 자연스럽게 줄줄 써내기도 하던데? 글쎄, 아마 그분들은 운동장의 돌멩이를 가지고도 메모를 잘할 것이다.

한번 정리가 되지 않으면 기록으로 넘어갈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메모는 본질적으로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평소 생각하고 말하다보면 그 속에 섞여 있는 진주 같은 것들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진흙을 털어내고 주머니에 넣어야지 하는 순간에 진주도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면 일단 넣어서 잔뜩 쌓아놓고 나중에 그것을 정리하면 어떨까? 하지만 목표를 잃고 그냥 녹음해둔 파일들 속에서 뭔가 그때 느꼈던 번득임을 다시 찾아내는 일은 없었다. 그 모든 순간들은 내 소유의 기계 안에 있지만 마치 ‘바닷속에 깊이 던져버린 것 같은’ 상태로 존재할 뿐이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아이디어가 휘발되고 마는 것이 도구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 글씨가 못나서, 쓰는 속도가 느리니까 메모를 잘 못하는 거라고. 작고 손에 감기는 노트와 매끄러운 펜이 없어서. 전자수첩 같은 최신 장비가 없어서라고. 하지만 그런 것들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스마트폰이나 녹음기도 더 편하게 발전했지만 메모하는 습관이 더 생기지도 않았다. 저장되어 있는 것들을 챙겨 보기는 좋아졌지만. 기록의 시작에서부터 이 생각은 어떤 말로 적어야 할지 고민하는 디지털 세계는 흘려 쓴 손글씨보다 조금 더 진입 장벽이 높았다.

다시 영화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상상해본다. 그 순간에 더 집중한 상태에서 음성 메모를 시작한다. 그리고 잠들기 전 다시 돌려 들어보면서 그 속에서 뭔가 단서를 건져내는 모습을. 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핵심을 바로 메모할 수 있다면, 구닥다리 형사수첩으로도 같은 수준의 일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속 해준이 서래의 말을 이해하는 데 영화의 후반을 전부 소모해야 했듯이, 어떤 메모는 하는 과정에서 혹은 읽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해준은 형사로서 능숙하게 메모를 할 수 있었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서는 그러지 못했다. 노래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어떠한지? 일단 애플워치를 구입할 계획은 보류해두었다.

<손편지> - 브로콜리너마저

보내려던 메세지를 닫아두고서 연필을 들었어

길지 않은 말인데도 써내려가는 손이 막 떨렸어

떨리는 호흡에 자꾸 틀리는 글자

새로 쓸 종이도 이 시간엔 없는데

열 몇자 되는 말이 무슨 큰 의미야 있겠니

하지만 눈물로 번져 알아볼 수도 없는

마지막 인사에는 수없이 많은 말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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