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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거북이. 우리가 아는 그 이야기가 맞다. 자라가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가지만 토끼가 꾀를 내어 도망친다는 얘기. 일반적으로 이 이야기는 <수궁가>라고 하는 판소리의 한 바탕으로 전해지는데, 전부 다 노래하려면 서너 시간은 걸린다. 이렇게 긴 음악이니, 책 한권도 제대로 못 끝내는 현대인에게 <수궁가>의 참맛인 이야기의 디테일을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와중에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는 정규앨범 《수궁가》를 발표해 디테일에 주목하게 만든다. 판소리 <수궁가> 중 10개 대목을 골라 요새 노래로 만들었는데, 쉬이 접할 수 없는 판소리에서 놓쳤던 재미들이 100년사를 거친 각종 대중음악 장르의 옷을 입고서 다시 귀로 쏙쏙 들어온다. 앨범의 타이틀곡인 <범 내려온다>는 지난해 9월 네이버 온스테이지를 통해 소개된 후 조회수 150만회를 넘을 정도로 무섭게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수
[Music] 판소리의 재해석 - 이날치 <수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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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예전부터 생각했던 일을 하나 해치웠다. 유언을 한 것이다. 꽤 예전부터 할 일 목록에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 내게 유언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다. 변호사로서 내가 가진 몇 가지 믿음(?) 중 하나는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망인과 상속인들간의 관계가 아주 원만했더라도, 사후의 일이 망인의 뜻대로 풀리기란 쉽지 않다. 산 사람들의 생각, 의지, 이해관계, 외부의 간섭이 발생한다. 망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한테 가서 물어볼 방법은 없다. 산 사람의 힘이 항상 더 세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직접 쓴 유언장을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이라고 하는데, 유효한 유언장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예를 들자면, 유언장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한다. 사인만 하면 안된다. 주소도 정확히 써야 한다. ‘2020년 6월 관악산 아래에서’라고
유언장을 작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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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문제가 뭔 줄 알아? 할 말을 안 하는 거야. 먼지처럼 그냥 털어내버릴 수 있는 일을 세월에 묵혀서 찐득찐득하게 굳게.” 언니와 사이가 틀어졌다가 4년 만에 화해했다는 김은희(한예리)를 친구인 박찬혁(김지석)이 나무란다. 꽤 뻔한 소리 같지만, 한국 가족드라마에선‘할 말을 안 하는’ 이들은 그다지 다뤄진 적이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해서는 안될 말로 상처를 만들고, 묵혔던 말이 터지며 화해가 이루어지는 주말가족극을 떠올려보자. 그들처럼 한바탕 울고 맺힌 마음을 토설하면 관계가 괜찮아지나? 구성원이 평등하지 않다면 그 안에서 또 누군가는 입을 다문다.
tvN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는 가족 혹은 오랜 연인 사이에 ‘말을 말자’라는 말조차 하지 않게 된 그때가 언제였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찐득하게 굳은 먼지를 돌이켜보는 드라마다. 상대를 너무 잘 알아서, 아는 만큼 기대하기가 어려워서, 기대를 품었다 무너지기 싫어서 엇나가는 대화의 빈자리에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가족에게 대화는 어렵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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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맨> Dead Man 감독 짐 자무시 / 상영시간 121분 / 제작연도 1995년
한장의 사진이 일주일째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있다. 아스팔트에 엎드린 한 흑인의 목을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짓누르고 있는 사진이다. 흑인은 백인의 무릎에 깔린 채 9분 가까이 바둥거리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저 폭력성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한참을 자문했다. 어쩌다 돌연변이처럼 자라난 한 개인의 특별한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제복을 입은 백인이 별 생각 없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한 사회의 내재된 폭력성 때문인지…. 불현듯 짐 자무시의 <데드 맨>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영화가 이 질문에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턴에 의한, 웨스턴 신화의 해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영화를 발표할 당시 자무시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거의 유일한 미국의 독립영화 감독이었다. <천국보다 낯선>
[김호영의 네오 클래식] 짐 자무시의 <데드 맨>이 보여주는 ‘미국 개척 신화’에 대한 냉소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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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침입자' 25년 전 실종된 동생이 돌아왔다
[정훈이 만화] '침입자' 25년 전 실종된 동생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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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잡지 만들기 힘들죠?”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코로나19 이후 극장에서 개봉하는 신작 영화가 많지 않은데 80, 90페이지 정도의 영화 기사를 주간 단위로 생산하는 것이 녹록지 않겠다는 취지의 물음이다. 답변하자면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 힘든 부분은, 시시각각으로 영화 개봉 일정이 변경된다는 점이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진행하고 기사 작성까지 끝낸 영화의 개봉이 마감일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연기돼 잡지에 수록될 콘텐츠를 시급하게 변경해야 하는 상황은 주간지의 호흡으로 만들어오던 <씨네21>에 때때로 속보성 매체의 순발력을 요구한다. 반면 영화산업을 둘러싼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영화의 의미 또한 확장되고 있는 시기에 영화 주간지를 만든다는 건 시류에 민감한 기자들에게 꽤 흥미진진한 도전과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눈 밝은 독자라면 최근 <씨네21>에 분석 기사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혼란의 시기에 영화산업의 방향성을
[장영엽 편집장] 재난보다 무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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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도> 제작 서라벌영화공사 / 감독 김기영 / 상영시간 90분 / 제작연도 1955년
한국영화사에서 1950년대는, 전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960년대의 황금기를 향해 성장해간 도약과 부흥의 시기로 서술된다. 사극과 멜로드라마를 대표 장르로 내세운 한국영화가 대중오락의 왕좌를 차지하던 그때, 관객은 영화관으로 집결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일상의 고단함을 씻어냈다. 한편 한국영화의 1950년대는 영화 스타일적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시기로 인식된다. 어떤 내용을 영화에 담을 것인가의 문제, 즉 내러티브나 주제론적 고민만큼이나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 하는 연출상의 방법론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영화는 해방 이전 직접 영향을 받았던 일본영화의 스타일이 잔존했던 동시에 오랫동안 이상적인 영화 모델로 상정해온 할리우드영화, 그리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유럽영화의 사조까지 여러 양식과 문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중이었다.
신상옥, 유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1955년작 '양산도'가 모색하는 김기영의 영화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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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라이온 킹>이다. 그날 영화를 보기 전에 엄마는 매표소 직원에게 어떤 부탁을 했다. 늦게 와서 앞부분을 놓쳤으니, 다음 상영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그 부분만 보고 나오면 안되냐는 것이었다. 마음씨 좋은 그 직원은 흔쾌히 허락해줬고(그때는 이런 일이 은근 많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약속대로 앞부분만 본 뒤 나왔다. 고백하자면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스트리밍, 다운로드 서비스 덕분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내가 상영시간에 맞춰야 했다. 조금이라도 텔레비전을 늦게 트는 바람에 만화영화 앞부분을 놓치면 그다음 날까지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그건 내가 놓친 부분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앞부분을 놓치는 바람에 그 회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분노’ 탓이 더 컸다. 그런데 엄마, 앞부분을 나중에 보라니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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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피아니스트 닐스 프람은 친구 베누아 트루몽드와 만드는 단편영화 <Empty>의 음악 작업에 한창이었다. 큰 산은 넘은 상태였고 곡도 어렵지 않게 나왔다. 그런데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나 싶던 그 시점에 사고가 났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높은 침대에서 내려오다 부상을 당한 것. 그것도 왼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지는, 피아니스트에게는 치명적인 사고였다. 하고 있던 모든 작업은 중단됐고 의사는 당분간 피아노를 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과 강제된 휴식 가운데에서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홉 손가락으로만 연주한 피아노 음반을 만들어보자.’
2012년 발표된 그의 솔로 피아노 앨범 《Screws》는 트랙 리스트에서부터 당시 상황을 짐작게 한다. ‘도’부터 ‘시’를 제목으로 한 7곡이 나란히 담겨 있는 걸 보면 그는 아마도 피아니스트로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그때, 가장 기본이 되는 무언가를 떠올렸으리라. 초
[Music] 아홉 손가락의 피아노 - 닐스 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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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감독 레오스 카락스 / 상영시간 125분 / 제작연도 1991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마지막 장면에서 강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던 선장이 70대 노인에게 언제까지 여행을 계속할 거냐고 묻는다. 선박회사의 회장이기도 한 노인은 평생 흠모해오던 네살 연하의 여인과 단둘이 여행 중이다. 그는 주저 없이 53년 7개월 동안 준비해온 대답을 내놓는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낭만적이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소설의 이 마지막 장면을 나름의 방식으로 차용한다. 영화의 끝 무렵 센강에 빠진 알렉스(드니 라방)와 미셸(줄리엣 비노쉬)은 지나가는 배에 구출되는데, 배에는 마치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노부부 둘만이 타고 있다. 강을 따라 모래를 운반하는 일을 하는 부부는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라고 말한다. 어디까지 가냐고 묻자 “끝까지”라고 짧게 답한다.
[김호영의 네오 클래식]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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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인> 제작 자매영화사 / 감독 박남옥 / 상영시간 75분 / 제작연도 1955년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은 거의 대부분 남성감독의 이름으로 구성되는 한국영화사에서 첫 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영화 속 배우들을 동경했고, 문학,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만능 소녀였다. 학창 시절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갔다가 교칙 위반으로 반성문을 쓰기도 했지만, 경북고녀 대표로 출전한 1938, 39년 전조선육상선수권대회의 투포환 경기에서 연달아 우승하며 학교의 이름을 날린 적도 있다. 이후 이화여전 가정과에 진학한 그는 문화예술계로의 투신을 모색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미술 공부에 전념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인 소개로 일제의 국책영화사인 사단법인 조선영화사의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 문화영화 제작을 잠시 경험하지만, 곧 대구일일신문사 문화부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는다. 박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이 연출한 전후 멜로드라마 '미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