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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는 <경멸>(1963)을 준비하며, 두 가지의 새로운 경험을 기대했다. 먼저 프랑스 최고 스타였던 브리지트 바르도와 협업하는 것이며, 미국의 제작자를 통해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두개의 소망은 모두 실현됐다. 그런데 작업과정은 고통과 이에 따른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브리지트 바르도도, 미국의 제작자 조셉 레바인(대표작은 <졸업>(1967))도 고다르의 새로운 미학을 이해하지 않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미국인 제작자 역할을 맡은 잭 팰런스는 아예 말도 건네지 않았다. 고다르는 스타와 제작자로부터 거의 외면당한 채 촬영을 진행했다. <경멸>의 주요 무대는 로마와 나폴리 앞의 카프리 섬이다. 촬영 당시의 현장 분위기 때문인지, 아름답기로 소문난 카프리 섬도 고다르의 영화에선 ‘이방인의 태양처럼’ 고독하고, 부조리해 보였다.
카프리에서 겪은 고다르의 외로움
<경멸>은 이탈리아의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나폴리의 세 화산섬- 카프리, 프로치다, 이스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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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스캔들로 기자회견을 하는 남편 곁을 지키는 모멸스러운 상황에서 남편 옷의 실밥에 눈이 가는 아내. 미국 <CBS> 원작과 tvN 리메이크 <굿와이프>의 강렬한 시작은 동일하다. 그리고 리메이크는 헌신적인 아내가 기자회견장을 벗어나 남편의 뺨을 때리는 반전 대신, 실밥으로 향하던 김혜경(전도연)의 시선에 전후 맥락을 만드는 것을 택했다.
구둣발로 들어와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남편 태준(유지태)을 낯선 사람 보듯 아래위로 훑어보던 플래시백에 이어, 혜경은 한번 더 자기를 믿고 따라달라는 태준의 말을 “내가 왜”라고 끊어낸다. 마치 당신의 해명은 필요 없다는 듯, 물음표를 제거한 침착한 어투에 찌푸린 미간과 탐색하듯 움직이는 눈동자. 혜경의 시선은 자신이 판단해 동기를 찾겠다는 의지와 연결된다. 혜경이 변호사로 취업한 로펌의 조사관 김단(나나)이 남편을 용서할 거냐고 묻자 혜경은 답한다. “용서 안 해요. 그냥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생각하고 관찰하려고요.”
[유선주의 TVIEW] <굿 와이프> 천천히 생각하고 관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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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부산행> 언제까지 우왕좌왕 하고만 있을 거야!
[정훈이 만화] <부산행> 언제까지 우왕좌왕 하고만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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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업계에서 좀비영화가 시들해진 건 이 소재가 의외로 다루기 까다롭기 때문이다. 좀비영화는 저예산으로 정치사회성을 풍자하고 드러내기에 매우 적합하다. 그러나 대개 흥행이 전혀 되지 않는다. 또한 많은 예산을 들여 재난 블록버스터를 만들기에 매우 적합하다. 그러나 재난 블록버스터의 소재로 이미 너무 익숙해서 새로울 게 없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주판을 두드리며 투자대비 효용을 따지는 제작자들을 금방 포기하게 만든다.
사실 좀비영화처럼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 소재는 드물다. 이건 애초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통해 현대적인 좀비의 레퍼런스를 만들어낸 조지 로메로 감독이 좀비라는 괴물의 정체나 원리에 대해 명확히 설정하기를 거부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지금 좀비라는 단어로부터 떠올리는 형태의 좀비가 탄생한 건 바로 이 영화부터다. 그는 인터뷰를 할때마다 “나는 좀비가 어디서 왔는지, 왜 나타났는지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덕분에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부산행>이 좀비영화라는 장르로 증명하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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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주세요”라고,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말썽인 영화제에 최근 복귀한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 말했다. 지난 7월7일 제1회 충무로뮤지컬영화제 개막식에서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자문위원장이기도 한 김동호 위원장의 그 말에 객석에서는 큰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다이빙벨>로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의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에 그 박수 소리가 다들 통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무로뮤지컬영화제의 예술감독은 바로 20년 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의 초대 프로그래머이자 실질적인 산파나 다름없었던 김홍준 교수다. 석연치 않은 정치적 이유로 해촉됐던 그가 올해 20회를 맞이한 부천영화제 개막식 때 공로상을 수상했다. 정말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올해 초 최용배 신임 집행위원장이 취임하고, 당시 영화제를 떠났던 김영덕 프로그래머가 12년 만에 복직하고, 또 지난 6월 정지영 감독이 민간 조직위원장으로 선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20주년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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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른 안드레센을 다시 ‘만난 건’, 그러니까 그의 생사를 확인한 건 올 초 열린 스웨덴 예테보리국제영화제에서였다. ‘호텔 페티시’임을 자처하는 크리스티안 페트리 감독은 다큐멘터리 <더 호텔>(2016)을 통해 무려 10년간 전세계의 오래된 호텔을 다니며 호텔이 가진 의미를 되짚어보는 투어를 한다. 몇 백년 된 일본의 온천장이나 <전망 좋은 방>(1985)의 배경이 된 이탈리아 피렌체의 호텔 같은 곳이 등장하니 참으로 고상한 투어가 아닐 수 없다.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서 쇠약해진 작곡가 구스타브 아센바흐(더크 보가드)의 심장을 뛰게 만든 타지오를 연기한 비에른 안드레센은 페트리 감독이 10년간 만난 다큐멘터리의 인물 중 한명이었다. 캄캄한 극장 안에서 나는 타지오를 향해 ‘사랑한다’, ‘누구한테도 그렇게 미소를 짓지 말라’고 절규하던 구스타브 교수마냥 탄식을 보냈다.
차기작 소식보다 비행기 사고, 약물중독으로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는 루
[이화정의 다른 나라에서] 탐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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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로닉 댄스 신에는 독특한 연례행사가 하나 있다. 바로 ‘톱100 디제이’ 랭킹 투표다. 1993년부터 영국의 <디제이 매거진>(DJ Magazine)이 주최해온 투표로, 독자들에 의해 매해 최고의 인기 디제이 100명이 선정된다. 이곳에 순위가 오르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 유명한 톱100 투표가 지난 7월6일 시작됐다. EDM이 세계적인 장르로 떠오른 시점이라 벌써부터 열기가 뜨겁다. 디제이들의 투표 독려 광고도 치열해지고 있다. 이즈음 <디제이 매거진>의 광고 지면은 디제이들의 자기 홍보로 넘친다. 캠페인 비용으로 엄청난 액수를 쏟아붓기도 한다.
지켜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아티스트에 랭킹을 매기는 것도 이상한데(올림픽도 아니고!), 서로 뽑아달라고 광고전까지 벌이다니, 얼마나 황당한가. 최근엔 이 투표를 없애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신의 독설가들은 이 투표가 쓰레기라며 강도 높은 직언을 날리기도 한다
[마감인간의 music] 랭킹의 의미는? - 디미트리 베가스 앤드 라이크 마이크, 마틴 개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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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 한 마리가 뽀르르 손안에 날아들었다. 살짝 입김을 불어주었는데 손 위에 똥을 찍 싸더니 그만 죽고 말았다. 좋아할 틈도, 똥을 쌌다 나무랄 틈도 없이 죽은 것이었다. 곁에 있던 여자친구가 새를 죽이면 어떡하냐며 발을 동동 구르며 나무랐다. 나는 새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새를 죽였다는 사실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녀석을 손에 안은 채 귀로 가져갔다. 행여 심장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나의 숨을 멈추고, 너의 박동을 들으려 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따뜻했다(곧 식겠지). 아직은 부드러웠다(곧 굳겠지).
내가 죽인 걸까. 단지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 입김은 죽으라는 것도 열심히 살라는 지시나 명령도 아닌 그저 인사였을 뿐인데.
나를 원망했다. 일단 죽었으니, 내 손에서 죽었으니 나를 원망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새를 원망하고 있었다. 하필 내 손에 날아와 까무룩 죽어버리다니.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은 아
[노순택의 사진의 털] 새야, 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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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아재다. 아무리 옷가게에서 허리 사이즈가 29인치라고 우겨도 육체의 주름은 속일 수 없다. 아무리 최신 영화 정보를 꿰고 인디 음악을 덕질해도 트로트 한 가락에 곧장 시대적 감수성이 눈물샘처럼 봉인 해제되는 나는 아재다. 자본주의 청춘신화에 결박된 채 새벽 조깅과 양파 다이어트로 뱃살과 전쟁을 벌인들 물기 머금은 청춘의 시간이 복원될 리 있겠나. 사라진 시간을 질투하는 순간, 누구나 아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아재파탈’이란 최신 유행어, 그거 되게 남우세스럽다. 염치없는 말이다. 중년 남성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 상품미학의 일환이라면 그저 자본의 관성이려니 하겠지만, 아재감성, 아재개그, 아재파탈로 이어지는 매스미디어의 요란한 자화자찬 북새통을 보고 있자면 모골이 다 송연할 지경이다.
애초에 ‘아재’는 ‘아저씨’를 희화화하기 위해 소환된 표현이었다. 그 저변에는 개저씨, K-저씨 같은 속어들이 매섭게 중년 남성에 대한 반감을 표상하고 있었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의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 염치없기도 하지, 아재파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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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입을 모아 망했다 말하지만, M. 나이트 샤말란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감독이다. 사실 나는 영화라는 매체를 다소 가늘게 눈을 뜨고 의심하며 보는 편인데, 때로 영화가 자신이 영화임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라고, 이곳에 굉장한 것이, 진실이 있다고 말하는 듯한 영화들, 어떤 진실을 포착해내는 기적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믿는 듯한 영화를 볼 때, 나는 불편함을 느끼고야마는 것이다. 정말? 진짜? 그게 진짜야? 진실이 거기에 있어? 자꾸 그렇게 묻고 싶어져서.
내가 샤말란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샤말란의 영화는 언제나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영화는 이야기 속에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전개되지만 마지막에 와서는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 사실 이건 그냥 이야기야, 환상이야, 허구일 뿐이야, 그리고 너는 너의 삶=현실을 살아가야 해, 라며 갑자기 발을 빼고 영화를 끝내버린다. 세
[내 인생의 영화] 황인찬의 <레이디 인 더 워터> ‘이야기’를 돌려보내는 작은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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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은 장래에 예술이란 개념은 중2병의 하위 장르가 될지 모르겠다. 1% 귀족들 외에 모두 개돼지일 뿐인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어쩌고 하며 고민하는 걸 들켰다간 현실 인식이 매우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는다. 완전무결한 예술이란, 일기는 일기장에 쓰고 그 일기장을 불에 태운 다음 내가 뭔가를 썼다는 사실을 깨끗이 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자신은 지킬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 창밖의 미친 세계와 매정한 타인으로부터. 그러나 야망을 가진 인간은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계로 나가고야 만다. 겨우 글을 쓸 줄 안다는 한줌의 재능만을 가지고서, 인간은 과연 세계의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재능에 문학적 감성과 회화적 감각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성격에 완벽함에 대한 강박까지 있다면? 영화를 택해 감독을 꿈꾸어볼 것. 그것은 능히 한 기업을, 한 사업을 망하게 할 수 있다. 내 일기장이 아니라 남의 돈을 불태울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 예수가 되는 일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혼자서 치른 마이클 치미노 추모 회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