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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망명자 출신의 코신스키는 1971년 <정원사 챈스의 외출>(Being There)이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은 1979년 피터 셀러스와 셜리 매클레인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지자 우리나라에 책이 번역되었고, 그것을 내가 읽은 모양이다. 책은 두어 차례 더 번역된 후 절판되었고, 영화는 수입되지 않은 것 같다. 영화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 <챈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아주 어려서 고아가 된 이후 중년이 되기까지 정원사로 살아온 챈스는 평생 저택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지능이 낮은 그의 유일한 낙은 TV를 보는 것이고, 그는 현실 세계와 TV 속 세계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고령의 주인이 죽자 그는 주인의 고급 신사복을 입고 처음으로 세상으로 나오는데, 길을 가다가 엘리자베스의 차에 치인다. 엘리자베스는 대통령과 자주 독대할 정도로 저명한 재계인사 랜드의 부인인데, 챈스가
[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정원사 챈스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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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를 걷다가 잠시 멈췄다. ‘바디숍’이 있고, ‘고디바’가 있고, 그 사이에 박근혜가 있었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박근혜는 바디숍을 택할 수 있었고, 고디바를 택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둘 다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디숍만 택했다.
물론 이곳의 ‘고디바’는 벨기에산 명품 초콜릿 제조사의 서울 매장이며, 바디숍은 흔한 화장품 가게일 뿐이다. 그런데 달리 읽혔다. 고디바 때문이었다.
고디바는 사람 이름이기도 하다. 11세기 잉글랜드 중부 코벤트리의 영주 부인 고디바는 몰락해 가는 농민들의 삶이 안타까워 남편에게 가혹한 세금 징수를 멈춰달라고 간청한다. 남편은 비웃는다. 당신이 진심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도시오! 고디바는 고심 끝에 영주의 제안을 따른다. 농민들은 감격한다. 그녀가 알몸으로 마을을 도는 동안 누구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한 사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재단사 톰이 몰래 훔쳐보다가 걸려 두눈을 잃고
[노순택의 사진의 털] 고디바와 바디숍 사이의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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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불운은 한꺼번에 닥친다고, 안 좋은 일이 겹쳐 일어날 때 ‘이게 현실이 아니었으면’. 그러다 누군가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속았지, 이 녀석아!’ 하고 웃으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멀쩡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다. 되지도 않는 상상이지. 거꾸로 내가 아끼는 가족이 혹은 친구가, 인생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가짜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라면, 일상의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모든 게 잘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거라면 과연 어떨까.
태어나면서부터 트루먼(짐 캐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전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된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모든 것은 감독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에 의해 철저하게 만들어진 극이다. 그가 생활하는 곳은 커다란 세트이고 만나는 사람들, 심지어 친구와 가족 모두 ‘트루먼 쇼’를 위한 배우다. 어느 날 트루먼은 하늘에서 조명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한
[내 인생의 영화] 장도연의 <트루먼 쇼> “상황을 바로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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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덜 알려진 작품을 각색한 <레이디 수잔>은 도덕적으로 흠결 있는 여성이 벌 받지 않은 채 목표를 이루는 이야기다. 남편과 사별한 궁핍한 귀족 부인 수잔(케이트 베킨세일)은 낭만적 연애와 결혼 따위 일축하고, 오로지 본인과 딸의 여생 보장을 유일한 기준으로 남자들을 대한다. 툭하면 내쫓겠다는 남편의 으름장을 받는 미국 출신 알리시아(클로에 셰비니)는, 수잔과 잘 통하는 벗. 남자들을 저울질하는 작전이 탄로나자 두 여인은 개탄하며 혀를 찬다. “우리야 그래도 되지만 남의 사적인 편지를 훔쳐보다니 무슨 비신사적인 짓이래요?” 어차피 여성의 동등한 생존 경쟁 기회가 차단된 사회에서 그녀들이 믿는 공정한 게임의 법칙은 따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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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에타>에는 독특한 조연 캐릭터가 있다(써놓고 보니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에선 평범한 조역을 찾는 편이 빠르긴 하다). 주인공 줄리에타(에마 수아레스)와 재혼하기 전부터 남편 소안의 살림을 돌봐온 가정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범죄와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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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말고 실력으로 되갚아줘. 네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사회의 부조리를 개인 차원으로 축소하는 기성 세대의 훈계로 낯설지 않은 레퍼토리다. 실력이란 말의 모호함은 또 어떤가? 검증하고 반영하는 절차가 공정하지 않을 때, 운도 실력이고 ‘돈도 실력’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반박할 길은 막막해진다. 어린 시절, 강동주는 거대 병원 응급실에 먼저 도착한 아버지가 순서에 밀려 사망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병원 기물에 야구방망이를 휘둘렀고, 그를 진정시키던 의사 부용주(한석규)의 말을 길잡이 삼아 거대 병원 의사로 돌아왔다.
응급실 진료는 도착한 순서가 아니라 위급한 순서라는 것을 몰랐던 무지가 분노의 출발점이었고, 전문의 시험을 전국 1등으로 통과해도 부모가 병원장인 동료에게 가려 열패감을 맛보는 강동주(유연석). 여태 쌓아온 가치관이 위협받고 분원 좌천으로 인한 분노로 들끓는 그가 해명을 구해야 할 의사 부용주는 분원인 돌담병원에서 ‘김사부’라는 가명
[유선주의 TVIEW] <낭만닥터 김사부> 흙수저 청춘을 이끄는 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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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가려진 시간> 40년 만에 걸린 사기단
[정훈이 만화] <가려진 시간> 40년 만에 걸린 사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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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나이의 대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싶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법이다(그 꽃다운 나이에 술 좀 마시겠다고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논외로 치자). 우리가 택한 방법은 새벽에 술을 사서 학교로 올라간 다음, 학교 건물 2층과 맞닿아 있는 경사로에서 대략 50cm를 도약, 홈통을 잡고 발코니로 몸을 던지는 거였다.
그 시간에 술병을 껴안고 문 닫힌 학교로 잠입하는 사람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 신입생에게는 참으로 신비로운 조화였다. “이렇게 취한 사람들이 한번도 안 떨어지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아니, 안 신기해. 왜냐면… 떨어지거든.” 응? “지난해 여름에는 민철이가 홈통을 껴안고 1층까지 미끄러져서 오른팔 껍데기가 몽땅 벗겨졌고, 그전에는 수철이가 난간을 놓치는 바람에 엉덩이부터 추락….” 그만해, 안 들을래, 술 깬단 말이야.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1m라 했던가. 술도 취했겠다, 6~7m에 불과한 건물 2층 높이 정도는 우스울 수밖에 없다. 게다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탈옥수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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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하면 불법적인 일도, 불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1974년 8월,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이었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으로 사임했던 닉슨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아무런 진실을 밝히지 않았고, 자신의 잘못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 사임 이후를 그린 론 하워드 감독의 <프로스트 VS 닉슨>(2008)은 뉴욕 방송국으로 복귀하고 싶은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신)와 역시 정계 복귀를 꿈꾸는 전직 대통령 닉슨(프랭크 랑겔라)의 인터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예정된 네번의 인터뷰 중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 프로스트는 닉슨에게 끌려다니기만 한다. 그러던 중 마지막 인터뷰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통해 닉슨으로 하여금 잘못을 시인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던 닉슨은, 대통령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라는 말을 내뱉고서야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그는 진상 은폐에 가담했고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독백이
[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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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는 병에 시달렸다. 결국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직도 35살 때 그만뒀다. 불과 25살 때 임용돼,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자리였는데, 병이 강단 경력을 중지시킨 셈이다. 이후 니체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맑은 공기를 찾아 여름이면 스위스 알프스의 실스마리아로, 그리고 겨울이면 따뜻한 지중해 연안의 니스, 제노바 등으로 옮겨가며 집필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때, 곧 건강을 걱정하며 떠돌 때, 니체는 필생의 역작들을 써냈다. 니체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는 제노바의 바닷가와 실스마리아의 숲에서 잉태됐다. 니체가 매일 제노바와 그 주변의 해변을 미친 듯 하루 종일 걸은 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불과 10일 만에 써낸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알프스와 지중해 도시를 떠도는 방랑 생활과 저술 활동은 서로 비례하며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런데 이런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발생했으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북부 산업의 중심지 토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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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생인 나는 이전 세대 ‘운동권’ 추억에 거부감이 있었다. 펄럭이는 빨갛고 파란 깃발과 비장미 넘치게 선동하는 ‘운동권 음악’들에 관한 거부감이랄까. 지난 토요일 참여한 집회도 아주 오랜만에 나선 집단행동이었다.
11월12일 토요일 오후 8시 반 경복궁역 앞은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저마다 구호를 외치고, 목청껏 함성을 내지르고, 촛불과 스마트폰 불빛을 흔들었다. 이미 내가 아는 경복궁역과는 완벽하게 다른 생경한 장소로 변해 있었다.
한 시간 남짓 있다가 가수 이승환이 공연한다는 광화문광장을 향해 친구들과 천천히 걸었다. 정부청사 앞에 설치한 대형 화면에 나온 이 용감한 가수의 목소리를 따라 세종대왕 동상 앞을 걸으며, 이번 집회에서 그의 공연 마지막 노래인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들었다. 이 노래를 평소에 들었다면 그저 평범하고 애절한 사랑 노래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공연이 열리는 무대를 향해 걸어
[마감인간의 music] 다시 만난 환타스틱 - 이승환, 《Hwanta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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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을 켠다. 채널은 TV조선. 내 살다살다 TV조선을 보는 날이 다 오다니. 아침 시트콤을 보는 심정으로 우병우의 검찰 출두를,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하는 장면을 본다. 호빠 출신과 무당의 조합. 그 날고 긴다는 문화계 황태자의 굴욕적인 호송 장면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한순간 놓치면 줄거리를 따라갈 수도 없는 급박한 전개다. 누군가가 그랬다. 가장 대중적인 시나리오는 익숙한 구조에 신선한 설정으로 탄생한다고. 대통령 임기 말에 습관적으로 터지는 측근 비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현실적인 설정을 얻어 역대급 스캔들이 되었다. 임성한 드라마를 챙겨 보던 친구를 한심해하던 나에게도, 이것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성의 드라마다.
한때 열혈 영화청년의 정신을 되살려 난 분노를 뒤로하고 조용히 이 아침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해체/분석해본다. 눈앞의 반전을 위해 급급하게 만들어진 시나리오가 아니다. 치밀하게 초반부터 장치를 깔아둔 공이 많이 들어간 각본이다. 증거
[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우리가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