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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을 끝낸 차태현과의 인터뷰중이었다. 시종일관 명랑활달하게 모든 대답을 이어가던 그의 얼굴에서 잠시 낯선 긴장의 표정이 스쳤다. “사실 다른 배우를 보면서 긴장하는 법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의 하균이 형(신하균)을 보는데, 순간 떨리는 거예요. 아, 큰일났구나. 저렇게 돼야 되는데, 갑자기 걱정이 밀려오더라고요.” 신하균은 그랬다. 한국영화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최민식, 설경구, 송강호, 유오성의 바통을 이어받을 다음주자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는 위협적일 만큼 강렬한 어떤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하균에 대한 무형의 기대는 <…JSA> 이후 1년 반 만에 확실한 증거를 탄생시켰다.
신이 쥐어준 송곳을 원수의 목에 내리꽂고, 복수의 칼날로 도려낸 신장을 소금에 찍어 어그적어그적 씹어삼키는 이 남자의 건조한 표정 속엔 해맑게 미소짓던 우리의 미소년은 이미 증발해버렸다. 병으로 죽어가는 누나를
서글픈 백수, <복수는 나의 것>의 신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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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의 몸은 천천히, 그러나 몰라보게 변한다. 몸이 어느 한 형태에 안착하기까지, 보기 싫게 부풀었다 단단해지는 그 과정은 보통 시간 속에 묻히고 곧 잊혀진다. 브리타니 머피는, 그런 점에선 불우하다. 그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연기경력에서, <클루리스>의 촌스럽기 그지없는 시골 전학생 타이는 빠뜨릴 수 없는 기억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알리시아 실버스톤이 ‘예쁘게 만들어주기 대작전’을 벌이던 뚱뚱한 곱슬머리 여학생 타이. 지금의 머피가 완성된 유리공예품이라면 타이를 연기하던 그녀는 유리공예사가 입김을 확 불어넣고는 아직 매만지기 전 단계의 울퉁불퉁한 유리덩어리였다. “다 조명과 의상과 가발 때문이라구요. 그 영화를 찍었던 건 막 가슴이 부풀어오른 열다섯살 때였어요. 어쩔 줄 모르던 때였단 말이에요.” 뒤늦게 항변을 하건 말건, 어쨌거나 그 발육과정상 제일 못생긴 모습으로, 머피는 뉴저지에서 9살때부터 부풀려온 할리우드 드림을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말해주지 않겠어요.”
<돈 세이 워드>의 브리타니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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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계는 ‘비상시국’이다. 3월에 들어서자마자 영화인회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등을 비롯한 영화단체들은 수시로 연석회의를 열어야 했다. 문화관광부가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산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영진위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영진위는 토론회 등을 열어 이제는 한국영화산업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이제는 다양한 영상문화가 숨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영화계 여론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안으로 예술영화전문투자조합 결성, 예술영화전용관 운영 안을 내놓았고, 이에 대한 예산을 책정했다.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문화부의 답변은 간단했다. “원금 보전이 어려운 소진성 예산이니 내줄 수 없다”는 것. 그런 이유로 승인된 예산안에서는 이와 관련한 항목들이 모두 빠졌다. 게다가 영진위의 위탁 사업으로 진행해오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예산도 대폭 삭감했다.이를 두고 영화인들 사이에서 “과거 영화진흥공사 시절로 회귀하
정부의 일방적 예산 책정에 반대하는 영화인회의 이춘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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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더 그레이엄은 항상 자신이 연기한 인물을 변호하려 애쓴다. <오스틴 파워>는 아이들이 열번이라도 되풀이해서 보려할 재미있는 영화고 <부기 나이트>는 배우들의 재능과 애정이 빛나는 영화라고 자부하지만, 이야기가 그녀 자신에게로 돌려지면, 대답은 한결같다. 섹스가 전부는 아니라고. 숙명이다. 텅 빈 파란 눈동자와 하얗게 빛이 흐르는 육체를 가진 그녀는 마음 깊게 울리는 대사를 내뱉을 수 없는 백치로 갇혀 있었다. “사람들은 여배우가 신음하는 모습을 좋아하지만, 그녀가 스크린 밖에서도 누군가와 그러길 원치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현실의 존재다.” 부모와 2년 동안 의절하면서까지 연기를 고집한 그녀에게 배우라는 직업은 스스로 표현하듯 “양날의 칼”이었을지 모른다.
그레이엄이 칼날 위를 걷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그녀가 집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던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FBI 요원인 아버지와 전직 교사인 어머니는 딸이 교회에 어울리는 순진한 카톨릭 교도로
<프롬 헬>의 창녀, 헤더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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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는 누구였나. “내 말에 토…토…토다는 새끼… 배신이야 배신… 배반…” 흥분해 더듬거리는 말투로 ‘불사파’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삼류건달이었나, “학생은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나”같은 진지한 질문에 “저 학생 아닌데요”하던 엉뚱한 삼촌이었나.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광화문 네거리를 질주하던 슬픈 소시민이었나. 아니면 쵸코파이를 한입 가득 물고 “우리 북조선에서는 언제 이렇게 맛난 과자를 만드나”며 감격해 하던 사랑스런 전우였던가. 송강호는 어떤 배우였나. 아니 어떤 사람이었나.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실 하나. 송강호는 예민하고 치밀한 사람이다. 본인 말대로 하면 “상당히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다. 영화나 자신과 관련된 작은 기사하나까지 꼼꼼히 읽는것도 유명하고, 인터뷰 중엔 작은 멘트하나까지, 해도 되는 말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빛이 역력하다. 물론 대중적으로 소비되었던 송강호의 이미지는 “그래도 니가 쏴라!”며 호탕하게 웃는 ‘희극성 90%’ 스타
그 파괴적 변신의 쾌락,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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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전선 이상있다?’ 최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의 초반 성적을 두고 충무로의 혹자는 제작사인 좋은영화, 그것도 김미희(38) 대표의 ‘선구안’이 예전 같지 않다고 수군댈지도 모르겠다. <주유소 습격사건>(1999)을 시작으로 지난해 <선물>과 <신라의 달밤>까지, 연달아 내놓은 영화 세편의 평균 서울관객 수가 100만명. 매번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호타준족’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의 초반 기세가 대단한 돌풍을 예고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김 대표는 조급해하는 기색도 아니었고, 당황스런 눈치도 아니었다. 늦잠을 자고 나왔다는 그는 이번 영화가 앞으로 자신의 관심이 가닿는 지점을 분명히 보여준 것에 대해서 오히려 만족스럽다고 했다. 또 ‘흥행제조기’라는 패찰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이제껏 미뤄둔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어간다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장규성
<피도 눈물도 없이> 개봉한 좋은영화 대표 김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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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순넷이 돼도, 여전히 날 필요로 할 건가요?” 세월이 흘러도 연인의, 혹은 팬들의 감정이 변치 않길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비틀스의 의 가사를 빌려 얘기하자면, 주디 덴치는 이미 확실한 예스의 대답을 들은 배우다. 예순넷에서도 4년이 지난 예순여덟. 그녀는 여전히 영화가, 무대가, 관객이 원하는 배우니 말이다. 아니, 환갑의 나이를 넘기면서 오히려 영화계의 구애는 더욱 열렬해진 듯하다. 매년 꼬박 2∼3편씩 찍을 만큼 손짓하는 영화가 많아진 것도, 오스카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각종 시상식에서나 매스컴에서 앞다퉈 그녀의 연기에 갈채를 보내게 된 것도, 60대 중반에 접어든 9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최근에도 주디 덴치는 <아이리스>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골든글로브와 오스카에 나란히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라 있다.
<아이리스>는 영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아이리스 머독의 삶을 다룬 영화. 머독이 강단에서 갑자기 노래로 인사를 대신할 때의 당당
예순여덟, 스크린의 구애는 계속된다, 주디 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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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 아니 추상미가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커다란 눈동자만큼이나 시원한 목소리의 인삿말과 악수를 청하는 작은 손을 한꺼번에 내밀면서. 연극무대에서부터 몸에 밴 직선처럼 명쾌한 음색과 몸짓. 며칠 전 스크린 속에서 만났던 <생활의 발견>의 흐너적거리던 선영은 벌써 어디로 숨어버렸나. 몇 번 눈을 마주친 끝에 권태로운 유부녀의 일상을 깨뜨려준 ‘신선한 장난감’ 경수의 심장을 떨리게 했던 눈웃음. 그건 여전하다.
<꽃잎> <접속> <퇴마록> <세이 예스>에 이어 다섯번째 영화 출연작인 <생활의 발견>은 추상미에게 ‘복잡미묘한 연기의 발견’이기도 했다. 무명배우 경수의 1주일간의 짧은 연애담인 <생활의 발견>에서 추상미는 춘천의 여인 명숙을 뒤로 하고 떠난 경수가 기차 안에서 만난 경주의 여인 선영. 묘한 눈웃음과 진위를 알 수 없는 말로 경수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다음, 막상 뒤따라온 경수를 보고는
<생활의 발견>의 선영, 추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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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 등 일련의 경마장 시리즈와 <새> <진술> 등을 통해 새로운 소설을 해온 작가 하일지씨가 또 한번의 실험을 감행했다. 지난 2월에 <마노 카비나의 추억>(민음사 펴냄)이라는 시네로망을 내놓은 것이다. ‘시네로망’이란 영화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히기 위해 쓴 시나리오. <마노 카비나…>는 50살의 시인 서인하가 자신에 관한 문학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는 현장에서 만난 23살의 여자 강수미를 보면서 느끼는 심리적 변화와 그로 인한 내면 파괴를 그리고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등의 소설이 영화화되고, <경마장 가는 길>을 직접 각색하는 등 하일지씨와 영화계의 인연은 꽤 가까운 편. 처남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갑자기 체포된 철학교수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 <진술>도 배우 박광정이 감독 데뷔작으로 영화화하고 있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
시네로망 <마노 카비나의 추억> 출간한 소설가 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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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나리오를 가슴에 안고 아파서, 가슴속 깊은 곳이 너무 아려와서 한동안은 그렇게 멍한 채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내가 해야겠다. 해보고 싶다. 소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정 - ‘컨셉북 <버스, 정류장> 중’
“어, 내가 왜 이러지? 어우∼ 야, 나 왜 이래요….” <버스, 정류장>의 첫 시사회. 이미연 감독과 김태우가 순서대로 인사를 한 뒤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첫 인사를 떼던 김민정이 갑자기 주저앉듯 무너진다. 주르르륵,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려내리는 통에 옆에 있던 김태우가 “신인여우상 받는 장면을 예행연습 하나봅니다”라고 재치있게 넘어가긴 했지만, 정작 당황한 건 본인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냥 무대 올라가기 전부터 기분이 너무너무 이상해서 누가 야!, 라고만 불러도 당장 울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글쎄 뭐였을까. 긴장, 기대, 두려움, 이런 것들이 다 섞였던 게
<버스, 정류장>의 소희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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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기가 뿌려대는 빗줄기 속에 놓여진 평창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늦가을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고 있는 성북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의 상처를 감당하기 버거워 훌쩍 사라져버리는 어린 소녀를 기다렸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재섭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태우 - ‘컨셉북 <버스, 정류장> 중’
남자가 운다. 꺽꺽 소리내어 서럽게 운다. 열일곱 어린 소녀 앞에서 엄마품에 안긴 소년처럼 서럽게도 울어댄다. “어떻게 울어야지, 이런 느낌을 살려서 울어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어요.” 어쩌면 꿍 하니 웅크리고 살아왔던 초라한 서른둘 인생을 위한 한 바탕, 어쩌면 찰 것도 빌 것도 없던 마음에 큰 구멍 하나를 내버린 소녀를 향한 한 바탕.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들이 분출구를 찾은 순간, 재섭도 김태우도 아무런 계산없이 그렇게 울고 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김태우를 알아왔다고 자부해도, 그의 연기를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차례 봐왔다고 방심해도, <버스, 정류장>의 김태우
<버스, 정류장>의 재섭 김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