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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의 주요 배역 오디션이 열리던 LA 파라마운드 사무실. 한 애송이 배우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만났던 모든 캐스팅 디렉터들이 입모아 지적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넌 너무 도시적인데다 외국인처럼 생겼어.” 그런데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인이라니, 이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그 동안 밤잠을 못 이루고 준비한 실력을 발휘하려는 순간, 파라마운트사를 에워싸고 LA 노동자들이 피케팅 시위를 벌이며 소란을 피워대는 게 아닌가! “마치 야구장에 놀러온 느낌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속에서 묘한 유머를 발견했다.” 결국 이 청년은 한껏 심각해야 하는 오디션장에서 허허실실 맥이 쑥 빠져버렸고, 물론 <엘리자베스>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데도 실패했다. 그러나 2년 뒤, 그 청년은 LA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우리는 빵뿐 아니라 장미도 원한다’고 외치는 조직원이 되어 피켓을 들고 거리
유연한 자신감, <,빵과 장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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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어요.” <예스터데이> 시사회가 끝나고 몇 시간 뒤 만난 김선아에게 시사에 대한 소감을 물었을 때 돌아온 말은 좋았다는 뜻인지, 안 좋았다는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답. 재차 명확한 답을 요구(?)하자 “들어갈 땐 떨렸고, 나올 땐 편했어요”. 영화가 만족스러웠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시험장을 나온 수험생 같은 시원섭섭함을 깊은 한숨처럼 토로한다. 그는 영화 시사회장에서 김승우, 김윤진 등 선배 배우들과 나란히 서서 무대인사를 하다 어쩔 줄 몰라하며 뒤돌아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 무대인사 때 김민정이 울었단 말 듣고 뭘 울기까지, 했는데 그 심정 공감이 가요.” 청심환 먹고 섰던 뮤지컬 무대보다 더 떨렸다는 시험대를 그렇게 통과했다. 백지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빈 채로.
“180도 확 바뀌었지, 뭐!” 김윤진이 <예스터데이>에서의 김선아에 대해 했다는 평은 일리가 있다. 김승우를 보좌하는 특수수사대 요원 매이가
뼈에 금이 가도, 한다면 한다, <예스터데이>의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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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살의 노총각, 안진우 감독은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큰 고생을 안 해본 듯한 순한 인상에, 말할 때 곧잘 웃는 모습이 위아래로 두루 대인관계가 좋을 것 같았다.그의 데뷔작 <오버 더 레인보우>는 내용만 놓고 보면 무척 욕심 많은 판타지이다. 교통사고로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 진수(이정재)가 옆모습이 담긴 사진만 남은 과거의 사랑을 찾아가다가, 그게 지금 새로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과 동일인임을 알게 된다. 시간과 기억의 단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의 유일한 사랑, 그런 게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 실제 대상을 동시에 주인공에게 안겨준다. 남녀가 성격이나 계급, 세계관 등의 차이를 극복하고 만나는 고전적 멜로라기보다, <번지점프를 하다> 처럼 ‘솔 메이트’ 내지 ‘일대일의 영원한 사랑’의 존재를 확인해가는 여정이 주를 이루는 다분히 이념적인 멜로다. 인상적인 건 <오버 더 레인보우>가 그 내용만큼 욕심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의 사랑을
<오버 더 레인보우>로 충무로 데뷔한 안진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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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은 단단한 사람이다. 그가 유독 ‘단단하다’라는 형용사를 자주 쓰기 때문도 아니고, 소문난 대로 근육이 단단해서도 아니다. 그저 처음부터 그런 인상을 줄 뿐이다. 너무 더워서 짧게 깎은 머리부터 조금 살이 빠졌다는 단정한 어깨선까지, 야물게 속이 들어찬 배추처럼, 헤쳐보고 싶을 만큼 빳빳하고 싱싱하다. 그런데 스물다섯 젊은이가 무심코 하는 말까지 단단하기 그지없다. 3년 동안 연기수업을 받은 뒤 변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랑을 알게 됐어요”라며 이해 안 될 대답을 한다. “모든 영화에는 사랑이 깔려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을 하고 있는 배우와 하고 있지 않은 배우는 다를 수밖에 없죠.” 아버지가 됐든 여자가 됐든 그는 연기를 알수록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성실한 배우는 <해적, 디스코왕 되다>를 찍으면서 연기와 사랑과 함께 추위와 피로도 뼈저리게 알아버렸다. 그가 연기한 해적은 굳센 주먹과 날렵한 발길질로 뒷골목을 주름잡는 십대 소년. 폼나는
단단한 스물다섯, 굳세어라 투지야,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이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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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미국판 <경찰청 사람들>에 해당하는 리얼리티 쇼 <쇼타임> 촬영현장입니다. 평소 연기 오디션에 목숨 건 보람이 있어 카메라 앞에서 날고 기는 촐랑이 파트너 옆에서, 코를 꿴 들소처럼 씩씩대며 끌려나온 베테랑 형사 미치는 풀먹인 빨래보다 뻣뻣하군요. 연기 지도를 위해 초빙된 왕년의 경찰 드라마 스타가 한숨을 토해냅니다. “저 인간은 사상 최악의 배우야!” 그 한마디가 펀치라인이 되는 까닭은 단 하나. ‘그 인간’이 다름 아닌 로버트 드 니로(59)이기 때문이지요. 천의 얼굴로 유명한 명우 피터 셀러스의 이름을 꿔다 쓴 것은 에디 머피가 맡은 교통순경 트레이 셀러스지만, 정작 10대 시절부터 스물다섯까지 변장을 한 프로필 사진을 들고 오디션을 섭렵한 주인공은 액터즈 스튜디오의 가장 자랑스런 졸업생 로버트 드 니로입니다.
밥(로버트의 애칭)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수군거리는 팬도 있을 법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로버트 드 니로를 보고 웃는 일이 부쩍 늘어난
나, 요즘 코미디의 왕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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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안동규가 돈버는 것을.” 한 영화제작자는 영화세상 대표 안동규씨가 번번이 흥행에 실패하자 이렇게 말했다. 영화세상에서 제작한 첫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3)에 빗댄 표현이다. 90년대 초 신철, 유인택과 함께 프로듀서 1세대 3인방으로 불렸던 안동규씨는 지난 10년간 제작하는 영화마다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는 불운에 시달렸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천재선언>(1995), <박봉곤 가출사건>(1996),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1996), <베이비세일>(1997), <북경반점>(1999) 등 내리 7편이 우울한 성적표를 내놓았다. <북경반점> 이후 2년간은 최대 고비였다. 차압이 들어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위축돼서 시나리오건 감독이건 배우건 베스트가 아니면 제작하겠다는 결심이 안 서는 상태”였다. 그런 만큼 <좋은 사람 있으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로 도약을 꿈꾸는 영화세상 대표 안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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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과 조승우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영화 <후아유>에서 그랬던 것처럼 먼저 기다리고 있던 이나영에게, 조승우가 역시 영화 속에서 그랬듯 넉살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약속시간에 꼭 맞춰온 이 모범생들. 그런데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타더니 서먹하게 눈길을 피하며 별뜻 없는 농담과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터뜨리다가도 어느 순간 낯설어지곤 하던 <후아유>의 형태와 인주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던 것도 같다.
<후아유>는 게임기획자 형태와 수족관다이버 인주의 위태로운 성장 혹은 사랑을 그리는 영화. 형태는 인주의 게임파트너가 돼 3년 동안 눌러둔 속마음을 다 알아버리지만, 현실로 돌아와선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인물이다. 인주의 상처를 다 알면서도 아는 척하지 못하는 형태와 이름도 모르는 게임파트너를 가장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인주가, 결국엔 함께 손을 잡고 길을 건너는, 그 친밀하면서도 수줍었던 마지막
<후아유>의 수줍은 연인들 - 이나영, 조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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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은 꽃보다 나무 같다. 아름답고 가녀린 한 떨기 꽃이라기보다는 씩씩하고 건강한 나무. 남몰래 꺾어 방 한켠에 꽂아두고 얼마간 눈을 즐겁게 만들기보다는, 열린 창문 넘어 점점 푸른빛을 발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은, 가끔은 그 그늘 아래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에겐 꽃처럼 알싸한 미향도, 화려한 색감도, 베일에 가린 신비감도 없다. 너무 투명해서, 심심하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한번 이나영에게 빠져들어간 사람이라면 그 매력의 결도, 깊이도 가늠할 수가 없다.
2월22일에 태어난 물고기자리 소녀는 지난해 5월부터 <후아유>라는 수조 속으로 텀벙 빠져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맨몸으로 뛰어든 수조 속에서 홀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1년간의 힘들고 고된 작업은 이나영에게 어떤 수업에서도 얻을 수 없는 나름의 수영법을 체득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뭐든지 열심히’하는 그의 삶의 태도에서 나온 결과일는지도 모른다. 노래방 장면을 찍기 위해서 스탭들의 도움
그 가늠할 수 없는 매력, <후아유>의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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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독한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곧잘 초승달 모양으로 웃는 눈매는 매운 눈물 한번 흘려보지 않았을 것처럼 맑기만 하고, 느긋하게 풀어놓는 지난 이야기에선 그늘 한 자락 찾아볼 수가 없다. “오디션 운이 좋은가봐요”라며 겸손한 척 귀엽게 자랑하는 조승우. 반짝거리는 외모로 뜬 반짝 스타도 아니면서 성큼성큼 굵직한 역할과 무대를 거쳐온 얄미운 케이스에 속하는 배우다. 그러나 아직 앳되기만 한 조승우가 느닷없이 추레한 이십대 후반으로 나타났을 때, 누가 그를 얄밉다고 할 수 있었을까. 무서워서 달아났다가 오기로 돌아온 조승우는 여유와 패기가 기묘하게 교차하는, 참 정감 가는 젊은이였던 것이다.
계원예고에 다니던 시절부터 잘 나갔던 것 같긴 하지만, 조승우는 “인생에 찾아오는 세번의 기회 중 첫 번째 기회”를 스무살 때 벌써 낚아챘다.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확신하고선 삼촌 한복 빌려입고 나간 <춘향뎐> 오디션에 붙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났더니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열정이 선물한 느긋함, <후아유>의 조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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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넌 마리 카훌라니 소사몬(Shannon Marie Kahoolani Sossamon)이라는 복잡한 본명처럼, 섀닌 소사몬의 얼굴이 풍기는 분위기는 어느 계통이라고 꼬집어 말하기 힘들다. 프랑스, 하와이, 네덜란드, 아일랜드, 필리핀, 게르만의 피를 조금씩 섞어 빚은 듯한 그녀의 얼굴은 ‘미인’의 범주에 넣기엔 모자라지만, 기묘한 균형미가 풍긴다. 그리고 시대극 <기사 윌리엄>에서 이국적 아름다움을 풍기는 고귀한 여인 조슬린은 섀넌 소사몬의 마스크에 빚진 부분이 많다.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블랙잭 딜러였던 어머니와 카세일즈맨이었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섀닌 소사몬은 3살 때 네바다주 르노로 이주, 유년기와 사춘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소녀 시절의 꿈은 댄서. 댄스스쿨에 등록하기 위해 17살에 LA로 옮겨온 섀닌 소사몬은 춤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는 한편, 지역 클럽에서 DJ 활동을 하며 음악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연기? 야망 리스트의 우선순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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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윌리엄>의 섀닌 소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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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배우로 살아온 수십년 세월이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수도 있는 이런 말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곤 한다. 무장한 것처럼 단단한 그 말투에선 기억 속에 남지 못하는 배우의 서글픔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아주 일찍 스타가 되기를 체념했기 때문일까. 맥도먼드는 영화의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각인시키려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영화 속에 스며들어 잊혀지는 편을 택해왔다. 그러나 그 체념은 동시에 누구의 카리스마보다도 강인한 고집에 가깝기도 했다. “관객을 끌어올 수는 없지만,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에겐 내 연기가 매혹”이라고 말하는 맥도먼드는 평범한 외모를 이기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망각의 표면 위에 솟아올랐다. <미시시피 버닝>과 <다크맨>을 흘려 보냈던 사람들은 더이상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조그만 시골 학교에서 <맥베스>
<파고>의 프랜시스 맥도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