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나리오를 가슴에 안고 아파서, 가슴속 깊은 곳이 너무 아려와서 한동안은 그렇게 멍한 채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내가 해야겠다. 해보고 싶다. 소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어우∼ 야, 나 왜 이래요….” <버스, 정류장>의 첫 시사회. 이미연 감독과 김태우가 순서대로 인사를 한 뒤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첫 인사를 떼던 김민정이 갑자기 주저앉듯 무너진다. 주르르륵,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려내리는 통에 옆에 있던 김태우가 “신인여우상 받는 장면을 예행연습 하나봅니다”라고 재치있게 넘어가긴 했지만, 정작 당황한 건 본인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냥 무대 올라가기 전부터 기분이 너무너무 이상해서 누가 야!, 라고만 불러도 당장 울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글쎄 뭐였을까. 긴장, 기대, 두려움, 이런 것들이 다 섞였던 게 아니었을까요?”
동그란 이마와 커다란 눈, 옆으로 보나, 앞으로 보나, 너무나 입체적인 얼굴을 가진 김민정은 마치 계란인형 같다. 계란에 얼굴 반쯤 차게 눈을 그리고 실처럼 가늘고 호리호리한 팔타리를 붙여놓은 계란인형. 하지만 그를 마냥 소품 같은 인형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김태우에게 “다시 한번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나 화낸다!”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는, 경력 12년의 베테랑 연기자다. “옛날의 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죠. 하지만 누가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하겠다면 말리고 싶어요. 튀지 않기 위해서 재미없고 밋밋하게 보냈던 학창 시절도 너무 후회스럽고요. 솔직히 이제는 ‘아역’이라는 타이틀에 더이상 얽매이지 않고 그냥 배우 김민정이 되고 싶어요.”
그에게 영화는 늘 꿈같은 존재였다. 더 연기가 쌓이면, 더 자라면 해야 할. 그래서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고도 “저 영화는 나중에 할게요”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는데 이 소희라는 얘가 너무너무 이상한 거예요. 아이 같으면서 어른 같고, 순수하면서 당돌하기도 하고, 사실 나는 모험하는 거 싫어하는 편인데 호기심이 생겼어요. 오히려 소희가 확실한 매력으로 다가왔다면 감히 한다는 말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렇게 결정을 내린 뒤부터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끊임없는 ‘왜’와의 싸움이었다. “감독님 소희는 왜 원조교제를 해요?”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럴까?…” 답을 줄 리가 없었다.
결국 혼자서 풀 수밖에 없는 숙제였다. “결론요? 답이 없구나였어요. 이건 누가 해도 다른 소희가 나올 거다. 길들여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내 방식의 소희일 수밖에 없다고, 내 생각을 믿어야 한다고…. 글쎄 제가 잘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역과 성인, 드라마와 영화 사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시점에서 저한테 정말로 필요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보니 이 배우는 정말 소희와 닮았다.
스물하나의 첫 번째 영화, 김민정이 이 버스에 오른 건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