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이즈카(가라타 에리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박한 삶을 꾸리고 있다. 한때는 번듯한 광고회사에 다녔다고 하는데 왠지 예전 이야기를 쉬이 꺼내진 않는다. 친구도 없고 취미도 없는 이이즈카의 가만가만한 일상에 몇몇 사람이 들어온다. 중학교 동창 오오토모(이모우 하루카)를 우연히 마주치고, 편의점 동료인 모리구치(이시바시 가즈마)와도 점차 말을 트며 친해진다. 인물들의 이야기는 격변 없이 지루하고 특별하지도 않은 세상살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두는 가족관계나 사회생활에서 각자의 어려움을 지니고, 별나지도 않은 어려움에 졌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세상 바깥의 인간으로 느끼기도 한다. 종종 친구와 가지는 술자리와 가벼운 술주정, 고장 난 커튼을 고치는 일, 남은 채소를 주변에 나누는 마음 정도면 매일의 공허를 채우기에 충분하다. 따스한 감정의 온도와 느릿한 박자감의 연출은 이러한 지고의 미덕을 차분하게 담아낸다.
[리뷰]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 매일의 공허를 매일 채워 가는 삶에 대하여
-
마른하늘에서 사람이 추락한다. 마당에서 청소하던 폴(니컬러스 케이지)은 괜찮다며 딸 소피(릴리 버드)를 달래고 태연하게 청소를 이어간다. 갑자기 소피가 하늘로 붕 뜨기 시작한다. 이 황당한 이야기는 소피가 꾼 꿈이다. 폴은 아내 제넷(줄리앤 니컬슨)과 들른 극장에서 우연히 전 애인을 만난다. 그녀도 꿈에서 폴을 봤다고 말한다. 꿈속에서 폴은 난데없이 등장하고 위기상황에 처한 이들을 도와주기는커녕 그저 지켜본다. 그런 폴을 꿈에서 본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드림 시나리오>는 어느 날 한 남자가 많은 사람들의 꿈에 등장하며 벌어지는 섬뜩한 코미디영화다. 영화는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의 전작 <해시태그 시그네>와 비슷하지만 다른 설정으로 비교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시그네는 약물을 남용하며 스스로 가공한 이미지, 즉 기믹에 스스로가 잡아먹힌 꼴이라면 폴은 자신과 무관하게 형성된 이미지와 실제 자신 사이에서 당황해하고 때론 즐기고 이용하며 타협의 순간으로
[리뷰] ‘드림 시나리오’, 기반 없이 온 요행으로 팔자를 바꾸는 동시대 생존전략
-
영화감독 조반니(난니 모레티)가 5년 만의 신작을 준비 중이다. 그가 만드는 영화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소재로 한 시대극이다. 조반니는 모처럼의 연출작을 위해 로케이션 헌팅에 심혈을 기울이고 소품의 디테일에도 혼신의 힘을 쏟는다. 하지만 조반니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그의 열정을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아내이자 제작자인 파올라(마르게리타 부이)는 조반니의 프로덕션과 동시에 다른 작품 제작에도 열의를 쏟는다. 음악감독을 맡은 딸 엠마(발렌티나 로마니)는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남성과 열애 중이다. 출연배우 베라(바르보라 보불료바)는 감독과 배역에 대한 해석이 상충하고 또 다른 제작자인 피에르(마티외 아말릭)는 실적이 의심스럽다.
<찬란한 내일로>는 자연히 영화의 감독 난니 모레티를 조반니 캐릭터에 겹쳐 관람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난니 모레티의 본명이 조반니 모레티고 그간 쓰고 연출한 작품에서 이탈리아의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비판한 모레티의 일관된 메시지가 ‘영화
[리뷰] ‘찬란한 내일로’, 영화 안팎을 지독하게 넘나드는 ‘이탈리안’ 난니 모레티의 영화학개론
-
보통 때였다면 무심결에 넘겼을 만한 사망사건 하나가 서울 한가운데에서 일어난다. 블랙아이스로 인해 중심을 잃은 버스가 보행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안타까운 사건. 이 일의 미스터리는 사망자에 대한 기록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연이 아닌 조작된 사건이라고 믿는 한 사람이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살인을 설계하는 일을 하는 영일(강동원)이다. 그 버스 사고로 아끼는 파트너를 잃은 영일은 그날 이후 모든 것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자신이 세상을 조작하는 만큼, 자신을 노리는 상대 역시 치밀할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의심은 설계팀에 분열을 일으키고, 다음 작업까지 영향을 준다. 타깃은 전 국민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새 검찰총장 후보인 주성직(김홍파), 의뢰인은 그의 딸인 주영선(정은채)이다. 영일은 수백대의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 현장에서 우연을 조작하려고 하는데 바로 그곳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노리고 있는 거대한 존재를 감지한다.
<설계자>는 &
[리뷰] ‘설계자’, 프로가 저렇게 우연에 기대서야
-
-
18세기 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깊은 산맥 지대인 카르파티아 지방의 도뷔시 형제는 봉건 영주들의 압제 속에 살아가는 농노 사회의 일원이다. 동생 이반(올렉시이 그나트코우스키이)은 도적이 되어 손아귀에 든 귀족들을 약탈하며 살아가는 한편, 형 올렉사(풀 울란스키)는 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 반란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한다. 영화 <도뷔시>는 ‘오프리쉬코’(Opryshky)라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반봉건 농민운동 게릴라를 블록버스터 규모로 그린 대작이다. 우크라이나영화 사상 가장 비싼 영화로 기록된 <도뷔시>는 민족의 전통음악, 의상, 풍습을 정확하고 풍부하게 담아내며 박물관적 고증을 이루어낸다. 올레스 사닌 감독은 영화의 시간을 300년 전으로 돌려 민족과 계급을 관통하는 자긍심의 뿌리를 찾는다. 역사와 전설, 그리고 신화가 접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민족 영웅 서사답게 장르의 혼종을 꾀하는 판타지 사극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리뷰] ‘도뷔시’, 우리 민족은 양이다. 그럼에도 살아남았다
-
갓 수능을 치른 고교생 장완선(굴초소)은 달 착륙 계획 콘서트에 갈 생각이다. 하늘에 띄울 거대한 인공 달 아래에서 그간 좋아해온 여학생 린베이싱(장가녕)에게 고백하고 싶어서다. 함께 자원봉사를 하며 가까워진 두 사람은 대입과 재수의 갈림길에서도 우정을 이어나간다. 기다려온 콘서트 당일, 화려한 이벤트 장소는 대형 참사의 현장으로 잿빛이 되고 이를 목격한 장완선은 사망자 명단에 있을지 모를 린베이싱을 찾아 헤맨다. <별처럼 빛나는 너에게 더무비-일섬일섬량성성>은 중국 OTT 플랫폼 아이치이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동명의 24부작 드라마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되돌리기 위한 타임 슬립이라는 설정이 드라마에 이어 영화에도 적용됐다. 첫눈에 시작되는 짝사랑, 설명할 수 없는 우연들로 추동되는 스킨십 등 청춘 로맨스의 요소요소가 보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기 충분하게 구성됐다.
[리뷰] ‘별처럼 빛나는 너에게 더무비-일섬일섬량성성’, 죽지 마, 같이 우주에 가자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독일. 유대인 출신 가수 지망생 스텔라(파울라 베어)는 재즈 가수로 성공해 미국에 진출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갈수록 심해지는 나치의 탄압에 스텔라의 가족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지 않도록 은신을 택한다. 답답함에 거리로 나선 스텔라는 우연히 위조 신분증을 만드는 롤프(야니스 니뵈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를 돕기 시작한다. <스텔라>는 나치에 협력해 비밀경찰로 일하며 수백명의 유대인 동포를 사지로 내몬 실존 인물 스텔라 골드슐락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시대의 피해자이자 참극의 부역자가 된 여인을 이해하려다 윤리의 역설에 빠지고 만다. 방황하는 영화를 구한 것은 파울라 베어의 입체적인 연기다. 화려한 반주로 영화를 맞이한 그녀의 노래는 곧장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 속 니나 호스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파울라 베어는 지옥도를 피한 배신자를 노래하며 독일의 역사를 온몸으로 연기하는 경지에 오른다.
[리뷰] ‘스텔라’, 니나 호스의 대척점에서 지옥도를 노래한 파울라 베어
-
동주(기진우)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8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변변찮은 직업도 없는 그는 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래도 인간관계 하나는 나쁘지 않았던 걸까. 주변에는 언제나 그를 진심으로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식 채용 제의마저 거절한 동주는 인생을 되돌아보기 위해 도피에 가까운 여행을 떠난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친구들이 세월을 거스르는 그를 반긴다. 거듭되는 만남 속에서 우연과 인연이 여러 번 교차하지만 어쩐지 동주는 세계 속을 부유하는 듯 보인다. <늦더위>는 <종착역>에서 10대 소녀들의 여정을 그린 서한솔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배우들이 현장에서 완성했다는 대사가 작위적이지 않아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극적인 사건을 의도적으로 덜어낸 이야기는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을 닮아 있다.
[리뷰] ‘늦더위’, 한점의 거슬림도 없이, 잔잔하게
-
10년 전 딸을 앞세운 병호(박원상)는 자그마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그날의 기억을 지울 수도 떠올릴 수도 없는 그는 기억상실과 이명이라는 두 증상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오랜 친구와 자신을 도와주는 이웃들은 물론 평생을 함께한 아내의 이름조차 사고의 잔해 속에 파묻혀 있다. 하지만 괴로움에 빠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유가족 단체의 부회장을 맡았던 병호는 수사가 진전을 보이지 않자 애꿎은 경찰에게 화풀이하며 주먹을 휘두른다. 병호의 우발적인 행동이 혹여나 언론의 먹잇감이 될까 두려웠던 유가족들은 그를 부회장직에서 내쫓고자 한다. <목화솜 피는 날>은 어느덧 10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이 감내해야 하는 외상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다. 빛 번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체 내부를 환상적으로 그린 장면은 같은 소재를 다룬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를 연상시킨다.
[리뷰] ‘목화솜 피는 날’, 기억과 상실 모두가 고통이다
-
지독한 워커홀릭인 게임 회사 대표 지미(허광한)는 모종의 이유로 해임된 뒤에야 주변을 둘러본다. 얼마 뒤 지미는 고등학생 시절 노래방에서 잠시 함께 아르바이트했던 아미(기요하라 가야)의 그림엽서를 발견한 뒤 충동적으로 그녀의 고향을 찾는 여정에 나선다. <신문기자>를 연출한 후지이 미치히토의 신작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은 새로움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작품은 아니다. 익히 아는 첫사랑 영화, 청춘영화, 여행영화와 궤를 같이하는데, 기본에 충실하면서 이런 장르에서 기대하는 감동을 충분히 전달한다. 그렇게 영화는 첫사랑의 신비와 아픔을 경쾌하게 묘사하고 젊은 주인공이 시련 끝에 한뼘 더 성장하는 과정을 제대로 밟아나간다. “여행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즐겁다”는 주제에 걸맞은 에피소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의미를 강화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가득 선사한다.
[리뷰]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 기본에 충실한 청춘영화, 첫사랑영화, 여행영화
-
전력망 붕괴, 폭염과 팬데믹, 화폐 가치의 하락….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인류를 위협하는 대혼란은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된다는 스크린 밖 진리를 강조하며 영화 속으로 뛰어든다. 모든 자원이 품귀한 파멸의 시대, 영화의 작중 배경은 문명 붕괴 후 45년으로부터 출발한다. 대지의 풍요가 가득한 녹색의 땅에 살던 소녀 퓨리오사(애니아 테일러조이/알릴라 브라운)는 바이커 군단에 납치된다. 퓨리오사의 어머니 메리 조 바사(찰리 프레이저)는 맹렬한 집념으로 바이커 군단을 추격하지만 끝내 딸의 눈앞에서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에게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그날 이후 퓨리오사는 디멘투스에게 ‘리틀 디멘투스’라 불리며 그와 바이커 군단이 벌이는 흉포한 약탈과 폭력에 내내 노출된다. 바이커 군단은 가스타운을 정복하기 위해 임모탄 조(러치 험)가 압제하는 시타델에 쳐들어가고, 민족간 혈맹을 이유로 퓨리오사를 임모탄 조의 신부로 넘긴다. 퓨리오사는 임모탄 조의 신부들이 처한 유린을 목도
[리뷰]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도파민의 시대에 생의 의욕을 집요하게 고양하는 아드레날린 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