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숙한 사람이 문득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언젠가 <흑수선>의 촬영현장에서 마주친 이정재의 모습이 그랬다. “어, 달라졌다….” 같이 있던 기자들도 한두 마디씩 비슷한 인사를 건넸다. 살이 붙고 검게 그을린 이정재의 얼굴은 이전과 달랐다. 남성적인 풍모가 짙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배창호 감독은 그런 그의 모습이 “이태리 종마 같다”고 했던가. 그런 외적인 변신은, 그의 영화 커리어 최초로 ‘액션연기’를 시도하게 됐다는 의미에 비하면, 차라리 사소한 변화였다.
여기서 잠깐. 이정재가 액션영화를 처음 찍었다는 데 대해 많은 이들이 의아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정재는 꽤나 오랫동안 액션영화를 피해왔다. 순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모래시계>의 백재희의 캐릭터가 처음부터 워낙 강하게 어필했기 때문. 그는 백재희의 이미지에 갇히는 것이 두려웠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했다. “의도적으로 피했죠. 그래서 더러 무리수를 두기도 했어요.”
잘 익은 액션 보여드릴게요, <흑수선>의 이정재
-
죽느냐 죽이느냐 그것이 문제다. 방송사에 의해 무작위 추출된 시민들이 살인 리그전을 벌이는 영화 <시리즈7>의 세계는 주사선으로 그려낸 현대판 콜로세움이다. 미국 독립영화계의 스타 프로듀서 크리스틴 바천(<세이프> <소년은 울지 않는다> 등 제작)과 손잡고 <시리즈7>을 만든 신인감독 대니얼 미나한은 따지고 보면 ‘텔레비전 키드’. <BBC>와 <채널4>를 거쳐 <폭스 TV>에서 시사 프로그램 PD로 일한 그는 메리 해론 감독의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에서 영화 만들기의 실제를 습득한 뒤 4년에 걸친 <시리즈7>의 구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기나긴 숙성기간이 무색하게도 코네티컷 주의 고향마을 댄베리에서 단 21일 만에 디지털카메라로 촬영을 마쳤다. TV 포맷과 장편영화 시나리오의 결합이라는 난제와 정면승부를 벌인 <시리즈7>은 지난봄 미국에서 개봉해 재기, 기동력, 문제의식,
“TV는 영웅도, 악당도 갖고 싶어한다”
-
<물랑루즈>에서 ‘찬란한 다이아몬드’ 샤틴은 화려한 박수 속에 노래하고 춤추며 등장하고, 기립박수와 환호 속에 노래하고 춤추면서 스러진다. 연인 크리스티앙의 가슴에 찬란한 슬픔을 남긴 채. 그 이미지, ‘찬란한 다이아몬드’를 찾던 바즈 루어만 감독은 뉴욕에서 니콜 키드먼의 1인5역 연극 <푸른 방>을 보고 꽃바구니와 함께 메모를 보냈다. “당신에게 맡기고 싶은 멋진 배역이 있어요. 그녀는 노래하고, 춤추고, 그리고는 죽는답니다.” 메모와 달리 오디션을 거쳐야 했지만 그녀는 샤틴 역을 품에 안았고, 루어만의 ‘유혹’에 보답했다. 니콜 키드먼은 연기는 물론 춤추고 노래부르기를 동시에 해냈고, 바즈 루어만은 그녀의 매혹적인 춤과 노래를 카메라에 빠짐없이 담아냈다. <물랑루즈>는 무릎 연골에 부상을 입고서도 리허설을 쉬지 않을 만큼 샤틴에 몰입했던 열정이 맺은 달콤한 열매다.
<물랑루즈>에서 공작이 샤틴의 하얀 목에 걸어주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찬란한 다이아몬드여, 영원히, 니콜 키드먼
-
“두려워하지 마세요. 함께라면, 해볼 만할 겁니다.” 무대에, 카메라 앞에 서지 않고, 순수 ‘민간인’으로 살아온 지 4년째 되는 어느날이었다. 이얼에게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시나리오와 함께 임순례 감독의 편지가 배달됐다. 이얼은 “연기를 하지 않아도 재미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간 수많은 직업을 전전해왔지만, 알 수 없는 권태와 단절감으로 답답해하던 참이었다. 임순례 감독의 편지는 연기자의 길로 되돌아올 ‘고마운 핑계’를 준 셈이다. 이얼은 이제 임 감독을 ‘은인’이라고 부른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이얼은 밴드의 맏형 성우였다. 성우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밴드를 지킨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고 묻는 옛 친구에게, 그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끝내 음악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성우는 뭔가를 저지르는 대신 당하는 편이고, 겉으로 표출하는 대신 안으로 삭이
두려움을 벗고, 새로운 꿈을 입고,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이얼
-
-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물과 스토리뿐 아니라 그 영화만을 위해 존재하는 ‘렌즈’ 같은 것이 느껴져서 좋은 영화였다. 이마에 드리운 앞머리, 옆에서 본 눈매, 동그란 콧망울 등, 미디어가 눈길을 주지 않는 소녀들의 말간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눈도 남달랐다.워낙 사진 찍는 일을 즐긴다. 새로운 영화란 결국 새로운 인물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여배우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고정돼 있다. 스크린 위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쌍커풀에 갸름, 오똑한 얼굴, 이런 식으로. 하지만 미에 대한 기준도 보는 이가 남자냐 여자냐에 다르다. ‘예쁘다’는 개념이 다양했으면 좋겠다. 찢어진 눈도 동그란 코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예쁜 여성의 이미지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좀 다른 캐릭터의 미를 잡아내고 싶었다.인천 이야기를 뺄 수 없다. <둘의 밤>에서 나들이 장소였던 인천으로 돌아갔는데.<둘의 밤>을 찍을 때 바닷가장면을 넣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그런데 극중에서 기껏 인
“아낌없이 드러내길 꿈꾸었다”
-
대롱거리는 나무 간판에 그려진 까만 고양이가 비에 젖어 금세라도 애처로운 신음소리를 낼 것 같은 카페. 그 제일 깊숙한 자리에 정재은 감독이 앉아 있었다. 튼튼한 배낭과 운동화, 영화 속 태희의 옷장에서 꺼낸 듯한 노랑 격자무늬 셔츠, 테이블 위의 작은 생수통까지. 그는 금방이라도 기차역으로 나갈 사람 같았다. 정말이라도 좋을 텐데. 각고 끝에 이제 막 생애 첫 영화를 세상에 내보낸 마당에 그만한 사치쯤이야. 그러나 정재은 감독은 ‘재미있는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제목을 한번이라도 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루한 인터뷰의 나날을 기꺼이 보내는 중이다. “여자라서…”로 시작되는 질문들, 완성된 영화라면 당연해야 할 “꼼꼼한…”이라는 칭찬의 수사들에 어리둥절해하면서. 동그란 은테안경 뒤의 견고한 눈빛은 재미없는 ‘기본사양’들말고 위에 새겨진 의도와 밑에 감춰진 비밀을 물어달라고 청하고 있었다.단편영화제가 끝나면 심심찮게 나오는 표현으로 ‘영상원 색깔’이라는 말이 있다.
“아낌없이 드러내길 꿈꾸었다”
-
주걱턱에 낮은 코, 백인치고는 상당히 평면적인 얼굴. 할리우드 여배우의 표준형 외모에서 상당히 비껴나간 리즈 위더스푼이 <금발이 너무해>에서 전형적인 금발미녀를 깜찍하게 그려냈다. 엘 우즈는 애초부터 미인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캐릭터. 하지만 위더스푼이 연기한 엘 우즈는 타고난 미인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예쁘다고 믿는, 그렇게 믿게 하는 미인에 가깝다. 그래선지 호들갑스러운 엘 우즈를 보면서 사람들은 처음엔 ‘별로 안 예쁜데’ 하는 생각을 속으로 하게 된다. 하지만 곧 넘어가게 된다. 속게 된다. 그녀의 핑크 패션과 ‘코스모폴리탄’적 라이프스타일에. 그리고 어느새 무겁고 닫혀 있는 (영화가 그렇게 그려내는) 답답한 주위인물들보다 가볍고 솔직한 그녀를 사랑하게까지 된다. 영화 속에서 여학생 클럽의 ‘짱’인 엘처럼, 위더스푼의 연기에도 어딘가 ‘선동적’인 구석이 있는 것일까. 위더스푼이 발치료까지 받으며 해냈다는 엘의 하이힐 워킹에는 그 자체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힘과
지(知)와 금발, 그 야누스의 매력, <금발이 너무해>의 리즈 위더스푼
-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김희선을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모두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정말 달라졌어, 김희선?” 사람들은 김희선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현장에서 촬영에 임하는 태도나 스탭들과 호흡을 맞춰나가는 모습이 ‘전에 없이’ 진지하고 열정적이라고. 대체 이전의 김희선이 어떤 모습이었길래 사람들이 그녀의 견고해진 ‘프로페셔널리즘’이 무슨 ‘대변화’인 듯 떠들어대는 걸까.
평판이란 것이 그대로 믿기에도 무시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것은, 말 옮기는 이의 사적인 감정으로 덧칠되게 마련이라서다. 그것이 호감이든 악감정이든. 일년 전 개봉 직전 만난 김희선이 소문(루머)과는 다른 사람이었듯이, 얼마 전 의 촬영을 마친 김희선 역시 촬영장에서 언론으로 퍼져나간 찬사를 모두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들, 순하고 편안한 시선이 그리울 것이다, 이제 그녀도.
비 내리는 저녁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김희선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거친 바다를 건너온 영혼의 물결처럼, <와니와 준하>의 김희선
-
네편 연달아 신인감독과 작업했다. 그것도 아주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들만 골라서.이제 섬세하지 못한 감독과 일하면 내가 정말 부정적인 의미에서 개입할 것 같다. 내가 판 함정에 빠진 것인지 섬세하지 못한 감독과는 일을 못할 것 같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감독할 영주(변영주 감독)에게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진하게 찍어야 해!”거슬러올라가서, 회사는 대체 왜 차렸나.기존 영화사에서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지금 내가 하듯 프로젝트 계발단계부터 함께 작업하는 방식을 취하면 2년에 한편밖에 못 만든다. 동시에 뭔가를 진행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실기(失期)하기도 하고 미뤄지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디어를 빼앗기는 영화도 생겼다. 내가 감독도 아닌데 이렇게 일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회사를 차려야만 원하는 작품을 돌릴 수 있고 구상하는 시스템도 시도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무진장 후회하지만. (웃음)어떤 종류의 시스템을 시도해보고 싶었나.한마디로 정리하긴
“흥행보다 만듦새가 이 영화의 존재 의미”
-
오기민 마술피리 대표는 배두나의 부러움을 살 만큼 멋지고 세련된 운동화를 많이 갖고 있는 제작자다. 그리고 여자들과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프리랜서 시절 그는 스타 프로듀서였다. <이방인> <여고괴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그의 프로듀싱으로 태어났다. 그중에서도 <여고괴담> 시리즈는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 붐을 주도한 프로듀서의 기획력이 빚어낸 가장 빛나는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가 지난해 영화사를 창립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 것도 그 때문이다. 1년여의 준비 끝에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를 내놓고 오기민 대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고양이 좀 부탁해’로 제목을 바꿨다고 근심어린 농담을 하고 다니며. <고양이를 부탁해>를 창립 작품으로 선택한 까닭은.<미소>와 <고양이를 부탁해>를 나란히 놓고 고민하다가 상업성이 옅은 두편
“흥행보다 만듦새가 이 영화의 존재 의미”
-
진정한 무사는, 무사들 속에서 더욱 빛난다. 너른 대륙을 향해 말달리는 자의 광막함과 홀연 깃발을 내린 자의 적요. 원 기병의 적장 람불화는 고려의 어떤 무사보다 내유외강했으며 그로부터 진정 무사의 풍모를 드러냈다. <무사>를 본 이들 중 많은 수가 최고무사의 영광을 진립도 여솔도 아닌 람불화에게 돌릴 만도 한, 람불화만의 품위. 그 주인공 위룽광을 초가을 어느 일요일, 그의 숙소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위룽광은 놀랍게도, 펄이 들어간 쫄티에 역시 광택성의 진이라는 매우 ‘현대적’인 차림을 하고 나타나 단숨에 람불화의 잔상을 지워버렸다. 수염 없는 짧은 머리의 그는, 영락없이 <무사> 이전 홍콩액션물에서의 그의 모습이었고, 그런 위룽광과 람불화를 논하기란 다소 생경했지만 흥미로운 일이었다.람불화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그런가. 원래 시대물이란 것 자체가 배우로 하여금 보통 때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하지 않는가.
람불화를 어떤 인물로 보는
대륙의 바람을 가른 매의 눈매, <무사>의 위룽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