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롱거리는 나무 간판에 그려진 까만 고양이가 비에 젖어 금세라도 애처로운 신음소리를 낼 것 같은 카페. 그 제일 깊숙한 자리에 정재은 감독이 앉아 있었다. 튼튼한 배낭과 운동화, 영화 속 태희의 옷장에서 꺼낸 듯한 노랑 격자무늬 셔츠, 테이블 위의 작은 생수통까지. 그는 금방이라도 기차역으로 나갈 사람 같았다. 정말이라도 좋을 텐데. 각고 끝에 이제 막 생애 첫 영화를 세상에 내보낸 마당에 그만한 사치쯤이야. 그러나 정재은 감독은 ‘재미있는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제목을 한번이라도 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루한 인터뷰의 나날을 기꺼이 보내는 중이다. “여자라서…”로 시작되는 질문들, 완성된 영화라면 당연해야 할 “꼼꼼한…”이라는 칭찬의 수사들에 어리둥절해하면서. 동그란 은테안경 뒤의 견고한 눈빛은 재미없는 ‘기본사양’들말고 위에 새겨진 의도와 밑에 감춰진 비밀을 물어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단편영화제가 끝나면 심심찮게 나오는 표현으로 ‘영상원 색깔’이라는 말이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 시사회가 끝나고도 ‘영상원적이다’라는 감상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영상원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수마다 경향이 달라지고 결국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다. 다만, 이런 특징은 있다. 영화를 처음 만들면 좋아하는 영화들을 인용하기도 하고 어설프지만 재미있는 시도를 해보게 마련인데, 영상원 학생들은 워낙 단편을 많이 만드니까 그런 시기를 일찍 통과해서 내용의 적확한 전달을 신경쓰고 단편이라고 애교나 재치를 부리기보다 한편의 영화로서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무겁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주로 무거운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까닭도 있고.
두 단편과 <고양이를 부탁해>는 감독의 어린 날을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들이다.
남동생이 둘 있었고, <도형일기>의 주인공처럼 자기 세계에 들어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런데 내겐 사람을 출신이나 성별, 고향 등의 조건으로 묶어 이해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나는 활발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내성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순간이 있을 거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 사실이다. 영화 속의 인물을 만드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특별해진 건 언제부터인가.
고1부터 영화를 본다는 행위을 의식적으로 했다. 나의 청소년기는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배창호 감독님의 영화가 나오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주로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보고 한국감독을 좋아하면서 영화에 대한 느낌을 키웠다. 문화원이나 영화제 찾아다니기는 그 다음이었다. 영상원은 우연히 들어갔고 졸업할 때까지도 감독보다 편집이나 폴리 아티스트를 해볼까 생각했다. 구체적인 직업의 관점에서 어떤 일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결국 영화감독이 되는 것 같다.
<도형일기>와 <둘의 밤>을 만들어놓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연출부에 들어갔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어떤지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나는 진짜 일 못하는 스크립터였다. 찍고 나서 스탭들이 “자, 확인하자!” 하고 우르르 모이면 “저, 녹화 못했는데요” 하고 말하곤 했으니까. (웃음)
<고양이를 부탁해>는 데뷔작 같지 않은 데뷔작이다. 거기에는 단편 <도형일기> <둘의 밤>을 거쳐 일관된 주제를 하나의 영화로 서서히 완성시켰다는 느낌도 일조한다.
데뷔작은 어쩌면 그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옛날부터 데뷔작을 소중히 생각했다. 아낌없이 드러내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본인이 하고 싶어도 사회에서 필요없어 하거나 남들이 이미 한 거라면 만들어질 수 없을 거다. 늘 한 행운 하는 (웃음) 나는 그것이 맞아떨어져 원하는 데뷔작을 할 수 있었다. <도형일기> <둘의 밤>부터 <고양이를 부탁해>까지는 한편의 영화를 조금씩 습작해서 완성한 과정이라고 봐도 좋다. <도형일기>에서는 세트를 <둘의 밤>에서는 인물을 빚는 법을 익혔다. 하지만 어린 소녀, 고등학생, 스무살 여자들의 이야기를 연달아 찍었다고 해서 나를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가진 감독으로 보는 건 틀린 일이다. 나의 단편 중에는 SF, 뮤직비디오, 액션도 있다. 감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형식을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감독이 됐다고 말하지만, ‘감독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프로페셔널하고 구체적이다.
나는 모르는 것에 대해 솔직하다. 예컨대 낯선 곳에 가면 이 공간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긴장하고 고민한다. 잘 모르니 사람도 공간도 이해하려고 골똘히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한다. 영화는 내가 세상과 관계 맺고 인간에게 다가가는 계기다.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사람들과 시간 보내기도 아까워하는 편이다. 언젠가는 내가 고양이한테 다정하니까 연출부들이 “아,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 (웃음)
한두명의 주인공도 다루기 힘든 첫 장편인데, 다섯명이나 되는 인물에 도전했다.
원래 한두 인물이 끌고가는 드라마보다 다중 시점에 관심이 많았다. 인물들의 위치와 상황을 각기 조금씩 달리해서, 한덩어리를 이루는 느낌을 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해봤다.
미술에 특히 엄격한 프로덕션이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나의 모든 영화에서는 헌팅을 포함해서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70%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무엇보다 보여지는 것이니까. 미술이 인물을 만들고, 다시 영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일부러 고집을 세웠다. 미술은 양보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물러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미술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그림은 예전부터 열심히 그렸다. 중요한 건 영화에 걸맞은 감각이다. 내 경우는 노골적으로 예쁜 것보다 거친 대상에서 어떤 느낌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한다.
프로덕션 디자인에서 다섯 주인공의 공간에 적용된 각각의 컨셉이 있었을 텐데.
혜주는 아파트와 자동차, 모던한 도시의 이미지로 갔다. 지영의 집은 초현실적인 느낌, 강한 콘트라스트를 줬다. 조부모와의 관계도 공간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 지영 책상의 스탠드는 외국 물건인데, 할아버지의 사투리와 함께, 몰락한 지영이네 집안의 내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흔적으로 집어넣었다. 지영이네 집 지붕이 내려앉은 사건도 매우 영화적인 설정이고 상징이었는데, 시사회 끝나고 어른들이 저런 일이 실제로 많았다며 어떻게 젊은 감독이 그걸 알았냐고 말씀하셔서, 내겐 극히 영화적인 것이 누군가에겐 극히 현실적일 수도 있구나 깨닫기도 했다. 태희의 공간에서는 중산층 가족의 풍경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40군데나 돌아다니며 헌팅을 했다. 뇌성마비 시인 주상의 방은 그 애의 부자유를 부각시키는 방바닥 이미지를 강조했다. 가구의 높이도 낮추고 벽에 봉도 박고 진짜 세밀한 미술 작업이었다. 작은 예산으로 발로 뛰고 집안 살림까지 갖다준 스탭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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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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