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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다가 골목길에 서 있는 트럭 밑에서 조그만 고양이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한 마리로 보였다. 내가 조금 가까이 다가가자 고양이는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직전에 편의점에서 우유를 산 기억이 났다. 주변에서 플라스틱 병뚜껑을 찾아 우유를 조금 부은 뒤 나와 고양이의 중간지점에 놓자 고양이가 트럭 밑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그런데 한 마리가 아니었다. 크기와 털 색깔이 조금씩 다른 고양이 다섯 마리가 첫 번째 고양이를 따라나오는 거였다. 크기로 볼 때 맏이부터 막내까지 차례대로 나오는 것 같았다.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에게 우유를 주고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친구는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면 안 된다고 빠르게 대답했다. 나는 서둘러 병뚜껑을 치웠다. 그러자 어린 고양이들이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착각일 수도 있다.
그날은 편의점에서 게맛살을 사서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얘기를 들은 한 친구가 고양이 사료를 반 포대 정도 가져
[한유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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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오랜 시청자라면, 사건개요를 짚어가는 초반 인터뷰에서 담당 형사의 바지가 나오는지 얼굴이 나오는지에 따라 그날 방송을 보다가 속이 터질 것인가 아닌가를 미리 점치기도 한다. 수사가 허술했거나 증거가 유실되어 속수무책이 된 사건을 다룰 때면, 대개 담당 형사의 하반신만 카메라에 담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그램이 경찰의 무능과 무책임만 조명하는 것은 아니다. 최신 과학수사 기법을 소개하는 날이면 이전엔 증명할 수 없었던 사건의 진실을 밝히며 후련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의지는 간절하나 인력이나 방법이 부족했던 과거와 수사기법이 발전했지만 자료와 증거가 남지 않은 현재. tvN 드라마 <시그널>은 시간을 초월한 ‘무전’으로 이 사이를 잇는다.
2015년의 경찰청 프로파일러 박해영(이제훈)과 1989년의 형사 이재한(조진웅)은 무전기를 통한 공조수사로 (실제 사건과 유사한) 여러 미제사건과 권력층의 부패를 파헤친다. 무당이나 영매 비슷한
[유선주의 TVIEW] 현실이 드라마 같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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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자리에 앉은 소년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물론 선생은 없었고, 나와 그 소년은 교실 안에서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유화반이라는 과외수업을 했는데, 한동안 비어 있었던 내 옆자리에 새로 온 소년은 얼굴이 우유처럼 뽀얗고 귀티가 흐르는 얼굴로 입만 열면 “내 팔자에 뭘 더 바란다고”, “이제 내가 죽어야지” 같은 아줌마들 입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뱉어내거나 유행가를 청승맞게 부르면서 그림을 그렸다.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로 시작되는 윤형주의 <어제 내린 비>였다. 목욕탕의 탕 안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다가 목욕탕 문을 열어젖히며 “그건 너, 바로 너”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오던 키 작고 빼빼 마른 깡패소년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 그때까지 내가 본, 일반인이 유행가를 부르는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었는데 얼굴이 하얀 미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어제 내린 비>도 인상적이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소년에서 남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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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아끼고 좋아해왔던 작품을 다시 꺼내보는 일은 늘 즐겁다.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정신없었던 처음과는 달리 집중할 수 있다. 관련된 주제나 근거들을 따로 찾아볼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대목이 많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그걸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지 고민해본다. 그 과정이 가장 즐겁다. 내가 그것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다르기 때문인지 판단해볼 기준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근거로 엉뚱한 일을 벌이기 마련이다.
아베 고보의 <모래의 여자>는 1962년에 출판된 소설이다. 처음 읽은 건 십년 전 즈음 강화도에 여행을 갔을 때다. 저자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일본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오른쪽에 미시마 유키오, 왼쪽에 아베 고보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읽어봤어도 아베 고보는 처음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틀어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열심히 모래를 퍼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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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캐릭터를 이루는 여러 요소를 고민하게 됐다.” 지난 1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있었던 ‘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2015년 한국영화’ 기획전에서, <베테랑>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 류승완 감독은 한편의 글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연출자로서는 꽤 아픈 글일 수도 있는데 관객들에게 일독을 권하기도 했다. 바로 한국영상자료원 KMDb ‘영화글’에 실린 홍지로 평론가의 ‘한국영화걸작선’ <베테랑> 비평이었다. 풀어서 요약하자면 이렇다. 황정민이 연기하는 서도철 형사는 ‘싸나이’와 ‘가오’를 입에 달고 사는 가부장이고, 영화 속 여러 설정들로 볼 때 성차별주의자에 인종차별주의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필요 이상으로 공권력을 휘두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폭력 경찰에 가까운데, 그런 인물이 악덕 재벌 2세와의 싸움에 나섰다고 하여 마냥 응원하고 그 승리를 선뜻 환영해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우려였다.
이럴 때 떠오르는 니체의 유명한 이
[에디토리얼] <검사외전>의 흥행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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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년여 전부터 힙합그룹 가리온과 <모두의 마이크>를 주관•진행하고 있다. <모두의 마이크>란 재능 있는 신인 래퍼를 발굴하기 위한 프로젝트로서 랩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대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무대에서 재능을 발휘한 래퍼에게는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한다. 이 글에서 소개할 만수는 <모두의 마이크> 시즌2의 (압도적인) 우승자다. 약속한 대로 우리는 그에게 더 콰이엇과 작업할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그 결과물이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만수는 ‘트렌드의 선봉에 서는’ 타입의 래퍼는 아니다. 그러려고 했다면 일단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만수는 가진 게 많은 래퍼다. 정공에 가까운 꽉 찬 랩 플로, 좋은 전달력, 듣는 이를 ‘빵’ 터지게 하는 재치, 무엇보다 <모두의 마이크>에서 드러났듯 강렬한 무대 장악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래퍼로서의 장점을 딱 하나만 꼽는다면 역시 ‘진솔함’이다. 자기고백적인 태도와 서
[마감인간의 music] 누군가를 알아가는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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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쿵푸팬더3> 쿵후판다
[정훈이 만화] <쿵푸팬더3> 쿵후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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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점이 있지만 <로봇, 소리>는 특수효과가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봉사하도록 통제한 드문 한국 SF다. 진화한 인공지능 무인 위성 ‘소리’는, 이 영화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가장 사려 깊고 독창적인 캐릭터이며 극중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한다. 나아가 쿨레쇼프 효과(?)를 활용한 연기로 <아이언 자이언트>의 감동을 재현하는 돋보이는 배우이기도 하다. CG 대신 실물 로봇을 캐스팅한 효과는 훌륭하다. 소리의 흠집난 패널에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장면만으로도 수고가 아깝지 않다. “보호는 고마운 것입니까?” 감정을 덜어낸 간략한 명제로 구성된 소리의 화법은, 대화하는 법을 몰랐던 해관(이성민)을 한 발짝씩 각성으로 이끌어간다. 홀로 남은 소리가, 전동 휠체어를 굴려 도시의 밤거리를 돌돌 가로질러가는 대목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 질주하는 자동차, 지치고 취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 문득 멈춰 길고양이에게 고개를 돌리는 소리는 마치 지상을 여행하는 천사 같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폴링 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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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이라 정의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용어를 여러 번 들었지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Minimalism’이라는 트위터 계정의 이미지들이 내 시선을 끌었다. 애써 노력한 흔적마저 지워버린 순간에 도달한 그 안정감은 요사이 내가 절실히 원하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나는 왜 갑자기 그런 가르침이 예사롭지 않게 느끼는 것일까. 뒤늦게 철이 들어서일까. 아니, 인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면 시대의 징후일까. 시대의 징후를 추적하려면 서점에 가야 한다. 나는 교보문고에 가서 도서검색용 컴퓨터를 두드린 끝에 <미니멀리스트>라는 책을 찾아냈다. 잘나가던 직장에 사표를 던진 후, 편안한 소파와 책 몇권만 남긴 채 물질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살고 있다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예술이 아니라 삶 자체를 미니멀하게 하자는 이야기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간디, 이런
[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Wi-Fi 미니멀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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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 소설가인 아서 C. 클라크나 팝 가수 엘튼 존, 그리고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는 모두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다시 말하면 엘튼 존 ‘경’이다. 후작이나 남작, 백작 등은 마치 <삼총사> 속 달타냥에게나 주어지는 중세시대의 명칭 같지만, 현대 영국에서는 예술인들에게도 폭넓게 이런 작위를 수여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영예는 중세시대의 그것 못지않다. 이 작위를 추리소설가로서 1971년에 받은 인물이 있다. 추리소설의 여제 애거사 크리스티다. 그녀의 수많은 명작 중에 으뜸이라고 꼽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를 그녀의 탄생 125주년을 맞아 <BBC One>에서 3부작 특집 드라마로 방송했다. 번역본이 늘 그렇듯이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의 제목을 단 번역본을 처음 접한 나로서는 ‘남지 않았다’의 오싹함이 더 깊숙이 와닿지만, 어쨌든 추리소설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손에 꼽을 정도의 명작
[김호상의 TVIEW] 125년을 건너온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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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욕망 때문이든, 아니면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공포 때문이든 인간은 오래전부터 죽음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인간이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심지어 어느 지점부터 인간은 죽음을 동경했다. 고대 그리스의 염세주의에서부터 근대의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사의 찬미’는 삶의 사악함, 허무함은 물론이고 초월, 속죄, 구원, 의지의 순결 등 모든 것을 담아왔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죽음을 그린 수많은 예술들 가운데서 나는 말러의 교향곡 ‘대지의 노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작품의 제목은 ‘현세의 노래’라고 불려야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이 곡의 독일어 제목인 ‘Das Lied vonder Erde’에서 ‘에르데’(Erde)는 땅, 지구라는 뜻도 있지만 현세, 이승이라는 뜻도 있다). 왜냐하면 전체 6악장의 이 교향곡에서 마지막 악장이자, 연주 시간 약 30분에 이르면서 전체 작품의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누가 죽음을 숭고하다 하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