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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연극무대에서 만나 평소 호형호제 하는 사이로 친분을 나누고 있는 김지운 감독과 장진 감독. 지난해 6월 <간첩 리철진> 개봉을 앞두고 <씨네21>의 요청으로 김지운 감독이 장진 감독을 인터뷰한 바 있다. 이번에는 장진 감독이 <반칙왕>을 만든 김지운 감독을 인터뷰 했다. 장진 감독은 “할말이 많다”며 ‘전의’를 불태웠지만, 두 사람은 오랜 ‘영화동지’답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의미있는 질문과 대답을 이어갔다.
복면을 쓴 구애, 그게 모티브야
장진 | 축하드려요, 안전사고 없이 영화가 끝나서. 저도 극장에서 관객과 같이 영화를 봤어요. 증거까지 보여드렸죠? 예매 티켓.
김지운 | 주운 거 아냐? 다른 영화 보고 나오다가.
장진 | <반칙왕>은 일단 기획부터가 좀 위험한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대로 밀어붙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궁금했어요. 형 생각에는 <반칙왕>이 갖는 의미, 미덕이 뭐예요?
김지
김지운식 코미디 [2] - 김지운·장진 인터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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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세상을 간지럼 태우자
여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광대가 있다. 직장에선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고, 아버지에겐 “언제 철들래”라고 구박받으며, 마음에 둔 여자한텐 기껏 큰 맘 먹고 사랑을 고백했다가 “술 드셨어요?”라는 대답을 듣고, 여자에게 상처 받은채 광화문 앞을 가면에 넥타이 차림으로 질주하는 남자. 그는 우리를 대신해 고통받고 상처받으며, 피흘리고 핍박받으며, 난처해지고 좌충우돌하며, 바보짓을 하고 설움을 당한다. 이를테면 그는 태어날 때 불운이라는 탯줄을 끊지 못한 채 위험천만한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며 손뼉 치며 목젖 울리게 웃어제껴도 죄책감이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자신의 불행과 낭패를 대행해주는 2000년의 채플린이며, 우리 자신의 신경증과 콤플렉스를 떠안은 서울의 우디 앨런이기 때문이다.
<반칙왕>의 주인공 대호는 “배, 배, 배신이야. 배반, 배신”을 연발하던 <넘버.3&g
김지운식 코미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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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단련된 스포츠맨과 같은 (육체적·정신적으로) 당당한 여성의 모습은, 예전까지 주로 억압되었으면서도 고상한 메릴 스트립의 ‘심각한’ 표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꽤나 당혹스러운 것이었을 게다. 그렇지만 동시에 45살이나 먹은 이 중년 여배우가 갑자기 해리슨 포드식의 모험에 도전한 이유를 유추해본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80년대 말을 기점으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스트립에겐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동기가 어떤 것이든, <리버 와일드>에서의 ‘액션 히어로’ 스트립은 많은 이들로부터 찬탄을 이끌어냈다. 예컨대 <타임>의 리처드 시켈은 그녀를 두고 “페미니즘 노래, 이야기, 전설의 이상적인 여성”이라고까지 말했다. 스트립에게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 험한 급류와 싸우는 또 하나의 ‘슈퍼맘’(supermom)의 탄생을 목도했던 것. 비록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린다 해밀턴
악몽으로 변한 가족여행, 커티스 핸스의 <리버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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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 그해. 올해처럼 눈이 많던 겨울 설날에 입을 꾹 다문 채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한 아이가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오전 내내 이집 저집을 부지런히 돌아다닌 보람으로 주머니에는 제법 100원짜리 동전이 들어차서 내딛는 걸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얼어붙은 밭길을 넘어 산딸기의 씨앗들이 겨울잠을 자는 강둑을 툭툭 뛰어넘는다. 지평선 위를 실루엣으로 가로지르는 한 아이의 모습은 옆동네 여자친구를 찾아 소풍을 가는 풍경 같아 보인다. 두손에 꼭 쥐었던 100원짜리 2개를 작은 극장 매표소 창구로 내보일 때 동전에 밴 땀 위로 겨울 햇빛이 잠깐 눈부시다. 그때 시력이 나빠졌을까? 알지 못하는 본능 앞에 기분좋게 굴복한 채 나 홀로 감행했던 이 첫 경험은 <황금박쥐>와 <춘자는 못말려>를 포함한 200원짜리 네편 동시상영 관람이다. 어쨌든 그때 난 작은 시골의 산골 동네를 누비던 포스터 세로길이만한 키의 조그만 아이였다. 닥터 지바고의 잃어버린 딸 토
어린 날의 향기, 습도, 촉감…, <닥터 지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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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 동안 몸을 사릴 줄 모르는 <엔터 더 이글>은 분명 홍콩 액션물의 적자다. 동유럽까지 찾아가 평원에서 고산까지 가리지 않고 쿵후 액션을 심어놓은 <엔터 더 이글>은 홍콩영화계를 대표해서 실종된 액션 명가의 자존심을 되찾아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프로페셔널 대도와 킬러, 소매치기 커플, 보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캐릭터들이지만, 적과 동료가 바뀌면서 박물관에서 경찰서로 그리고 다시 비행선으로 럭비공마냥 옮겨지는 다이아몬드를 쫓는 이들의 사투 장면이 뿜어내는 스피드의 매력은 홍콩 액션을 한물간 장르라고 싸잡아 폄하하기엔 망설여질 만큼 눈길을 잡아챈다.
문제는 점차 상승하는 액션의 강도와 바뀌는 인물들의 동선을 뒷받침할 만한 동기가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반부에 끼어 있는 멜로와 코믹적 요소가 후반부의 다이아몬드 대신 돌연 복수를 외치는 인물들의 감정까지 감당하진 못한다. 폭발 직전 비행선에서 피범벅된 얼굴을 한 채 태연히 담배를 무
동유럽까지 찾아가 쿵후 액션을 심어놓다, <엔터 더 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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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힉스의 야심은 장대했다. <샤인>으로 선댄스를 시끄럽게 했던 감독은 차기작 <삼나무에 내리는 눈>에다 여러 장르를 비벼넣는다. 살인사건을 던져놓고 그 비밀을 풀어가는 걸 보면 미스터리이고, 법정에 선 무고한 혐의자 가츠오가 가까스로 누명을 벗는 과정을 놓고보면 법정드라마다. 이쉬마엘과 하츠오의 가슴 저릿한 로맨스가 그려지는가 하면,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했을 때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의 수난사가 또 그 사이를 비집는다. 이렇게 방대하고 산만한 이야기들을 스콧 힉스는 이미지로 엮어낸다. 이쉬마엘이 겪은 2차대전의 참상이나 일본인의 수난사가 몇개의 장면으로 요약 발췌된다. 말하자면 감독은 짧은 이미지로 긴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했다. 빛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 촬영은 오랫동안 올리버 스톤과 작업했던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의 솜씨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지가 영화의 거의 전부가 돼버렸다는 데 있다. 방만한 이야기는 하나로 묶이지 못한 채 제 갈
알맹이 없는 방만한 이야기, <삼나무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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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간 돼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꼬마돼지 베이브2>는 원제 그대로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꼬마돼지 베이브의 좌충우돌 모험담이다. 돼지고기로 식탁에 오르는 숙명(?)을 벗어나 양치기 돼지로 색다른 존재가치를 발견해가는 전편을 전제로 하되, 재탕에 그치기 쉬운 속편의 우를 피해가려 고심한 산물이랄까. 농장에서 도시로 무대를 옮긴 속편은 순박한 시골뜨기의 수난기에 가깝다. 양치기는 물론 돼지도 드문 살풍경한 도시에 간 베이브, 도시 사람들은 물론 도시 동물들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수난기의 시작은 공항. 마약 단속견이 짖는 바람에 붙잡힌 베이브 일행은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졸지에 도시의 미아가 된 베이브와 하겟 부인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심가, 동물 사절인 대부분의 숙소를 지나 겨우 허름한 호텔에 안착한다. 동물에 후한 여주인 덕에 쉴 곳은 찾았지만 앞일은 막막하다. 어릿광대 주인을 둔 오랑우탄과 침팬지, 떠돌이 개와 고양이 등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든 동
꼬마돼지 베이브의 좌충우돌 모험담, <꼬마돼지 베이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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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나의 마을>은 정말 상투적인 표현을 빌자면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다.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와 동심을 받쳐주는 신비로운 현상들이 어우러져 1940년대 말 일본 시골의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물론 이 시대는 동아시아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힘겹게 살던 시기였다. 영화 초반부는 짐마 할아버지가 ‘맥아더 장군’을 원망하는 대사나 쌍둥이의 급우인 하쯔미의 가난한 삶을 통해 그러한 역사의 단편을 들춰내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아이들의 삶이다. 영화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짐마 할아버지의 죽음,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로 대변되는 가족의 삶, 쌍둥이가 겪어야 했던 질병과 온갖 말썽들 그리고 성에 대한 호기심까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길게 찍기의 미학을 통해 찬찬히 그리고 과장되지 않게 동심의 세계를 전해준다. 그 위에 덧붙여지는 것은 일본 특유의 설정들이다. 바람을 일으키는 신령 같은 세 할머니의 등장이나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 <그림 속 나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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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살고 젊은 나이에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보니와 클라이드,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 같은 부류의 막 가는 청춘을 위한 이 슬로건은 뤽 베송 감독이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15세기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뤽 베송이 연인 밀라 요보비치의 육체에 불어넣은 잔 다르크의 영혼은 흡사 고조기에 접어든 조울증 환자다. 구원받고 구원하려는 신열에 들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녀는 잠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르며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도 아픈 줄 모른다.
1899년 이래 열여덟편에 이르는 ‘잔 다르크 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이 웅변하듯 오를레앙의 처녀는 스크린이 누구보다 경애하는 성인(聖人)이다. 칼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잔이 지복에 닿은 순교자였고, 빅터 플레밍(<잔 다르크>(1948))의 여성 전사가 페미니스트의 원조였으며, 오토 프레밍거(<성녀 잔>(1957))의 히로인이 감당
스타일의 소화불량,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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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의 재미, 5%의 교훈.”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신조답게, <사무라이 픽션>은 순수한 오락 영화다. 캐릭터들은 만화 같고, 영화의 리듬은 MTV와 일치하며, 영화음악은 록에서 댄스 비트까지 오간다. 히로유키 감독은 평소 일본영화의 ‘천황’ 구로사와 아키라를 흠모한다고 전해진다. 감독은 <사무라이 픽션>에서 일본의 전통 시대극 분위기를 흑백 영상으로 살리되, 철저하게 찰나적 재미를 추구한다. 주인공 헤이지로는 친구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칼을 다룰 줄도 모른다. 엉뚱하게 돌팔매 연습만 죽어라 한다. 그리고 징징대는 목소리로 “꼭 없애버릴 테다”라고 뇌까린다. 황당함의 견지에서 한편의 만화다.
<사무라이 픽션>은 스타일이 살아 있는 영화다. 이야기 구조엔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도 웃고 즐길 수 있으니까. 여기서 일본 시대극의 규칙은 무시되거나 아예 비틀린다. 잠복중이던 닌자는 천장에서 몸을 날린 뒤 바닥에 철퍼덕
한편의 ‘사무라이 코미디’, <사무라이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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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실종됐다. 이건 큰일인가. 사건 축에도 못 끼는가. 의외의 소득인가. 즐거움인가. <플란다스의 개>에선 그 모든 것이다. 강아지를 생의 마지막 위안으로 여기던 노파에겐 죽음이고, 그보단 덜 쓰라리다 해도 강아지를 동생처럼 돌보던 아이에겐 사랑의 상실이다. 반면 신경 예민한 시간강사에겐 소음 제거라는 목표의 달성이고, 개의 육질에 매혹된 경비원과 부랑자에겐 영양 보충의 귀한 계기다. 엉뚱하게도 경비실 여직원에겐 자아실현의 기회도 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강아지 실종이라는 작은 사건을 아파트라는 소시민의 생활공간에 던져놓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예기치 못할 소동에 빠져드는지를 관찰하는 짓궂은 농담이다.
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인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이름난 단편 <지리멸렬>에서처럼, 생활공간에서 일어난 일상적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비루한 욕구를 유머러스하게 극화하고 있다. 제목 때문에 <플란다스의 개>에서 따뜻한 동화의 위안
소시민들의 비루한 욕구, <플란다스의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