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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아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너에게.
네가 이 비밀을 알까? 모든 영화는 각기 다른 종류의 글을 쓰고 싶게 해. 어떤 영화는 귓전에 격문을 불러줘서 받아쓰게 되고, 또 다른 영화는 기도문을 짓고 싶게 만들어. <늑대아이>를 처음으로 본 저녁에 나는 아직 작곡되지 않은 노래의 가사 같은 걸 끄적이고 싶었어. 그리고 두번째로 <늑대아이>를 보러 간 날 밤에는,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네가 옆자리에 있고 극장엔 오직 우리뿐이어서 네게 “아! 이 부분은 마치…”라고 토를 달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했어. 바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유야.
<늑대아이>는 10대 소녀 유키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 영화의 초반은 유키의 엄마인 하나가 대학에서 수업을 청강하던 아빠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얼마 뒤 그가 늑대인간임을 알게 되고, 그래도 상관없이 계속 사랑하고, 남매를 낳아 홀로 기르게 된 역사를 들려주지. 그래, 폴린
[신 전영객잔]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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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병헌이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잘생긴 스타지만 연기도 잘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김지운의 영화를 통해 완성된 페르소나는 특히 거북살스러웠다. 촉촉한 눈망울로 관객을 대하며 자기 자신을 연민하는 듯한, <달콤한 인생>과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복수를 집행하는 인물도 그렇고 순도 높은 악을 응결해 머금고 있는 듯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의 악인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뱀을 보는 것 같았다. 뱀이지만 아름다운 뱀이다, 이러면 안되는가라고 시위하는 듯한 나르시시즘이 이물감을 주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이병헌의 다른 색깔이 떠올랐다. 겉은 단단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연약하고 치명적인 실수로 자신을 망치면서도 그걸 감당하지 못하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수혁, 시골학교에 갓 부임한 잘생긴 선생으로 나온 <내 마음의 풍금>에
[신 전영객잔] 현대판 광대인 배우가 벌이는 난장의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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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람>을 보고, 올이 여기저기 풀려 있지만 추위를 막는 데에는 지장없는 목도리를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 연쇄살인범(김성균)의 행동 동기와 연관된 디테일은 군데군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거나 뭉그러져 있다. 그래서 영화와 합을 맞춰가며 사건의 전말에 동행하고 싶은 관객의 발목을 잡는다. 거친 장면 전환은 편집실에서 이 영화가 홍역을 앓았으리라는 추측을 부추기며, 장면 이행에 가세한 CG 효과가 조야해 흥을 깨는 대목도 있다. 치밀한 스릴러가 되기엔 거멀못이 한참 헐겁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스릴러 장르에서 플롯의 구멍은 치명적이다. 일단 “사실적 스릴러에서 설득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려준다”는 평론가 이동진의 20자평에 전적으로 공감한 다음, 나는 김휘 감독의 <이웃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상당한 쾌감을 안기는- 치명적 결함을 못 본 체할 용의를 갖게 하는- 이유를, 강풀 원작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보려고 한다.
복도식 아파
[신 전영객잔] 문제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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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휘의 영화 <이웃사람>을 먼저 보고 강풀의 원작 만화를 나중에 봤다.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했다. 중간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 리듬이 불안한 대목이 있지만 이 정도면 원작의 각색 영화로는 준수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 들어 있던 호러영화의 요소를 감했다거나, 누락되거나 변형된 몇개의 디테일들이 영화를 원작만 못하게 만들었다는 강풀 원작 팬들의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수긍할 만한 것도 있다. 연쇄살인범 류수혁이 경비원 황씨를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서 살해한 뒤에 바닥에 흥건히 퍼진 핏자국을 와인병을 깨트린 흔적으로 위장하면서 위기를 넘기는 설정 같은 것이 그렇다.
마동석이 연기한 안혁모 캐릭터의 중요성
개별 인물들의 사연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따로 논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건 웹툰을 읽는 독자의 호흡을 제한된 상영시간 안에 봐야 하는 관객의 호흡으로 바꿔야 하는 매체의 다른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게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 중반 대
[신 전영객잔] 악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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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니 스콧의 투신자살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잠깐 놀라고 애도의 마음을 가졌을 뿐 곧 잊었다. 하지만 방향은 엉뚱한 순간에 휘었다.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전철을 타야 하고 그 전철을 타면 철교를 한번 건너야 한다. 내려다보니 흙탕물이었다. 토니 스콧이 뛰어내렸다는 LA 산페드로의 빈센트 토머스 다리 사진을 보고 생의 자의적 최후를 맞이하기에는 다소 황량하고 허름한 곳이 아닌가 생각했던 게 그 흙탕물 때문에 떠올랐다. 그는 왜 뛰어내렸을까, 나이 예순여덟살의 노인이 알려진 것처럼 불치의 뇌종양 때문에 낙담하여 그러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사랑 때문이었을까, 하고 밥 먹는 도중에 동료에게 말했다가 쓸데없이 군다고 면박만 당했다.
2.
2003년 8월경 <4인용 식탁> 개봉 즈음에 <씨네21>은 ‘영화 속 영화 밖 자살’에 대한 글들을 실었는데 그때 남재일 선배가 자살의 유형에 관하여 쓴 인상 깊었던
[신 전영객잔] 송신과 수신의 액션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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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필모그래피
1986 <카라바지오>
1988 <대영제국의 몰락>
1989 <전쟁 레퀴엠>
1990 <정원>
1991 <에드워드 2세>
1992 <올란도>
1996 <여성의 도착(倒錯)>
1998 <러브 이즈 더 데블: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을 위한 스케치>
2000 <비치>
2001 <딥 엔드> <바닐라 스카이>
2002 <어댑테이션> <테크노러스트>
2003 <영 아담>
2005 <콘스탄틴> <브로큰 플라워>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2006 <스테파니 댈레이>
2007 <마이클 클레이튼>
2008 <줄리아>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번 애프터 리딩>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 <
[신 전영객잔] 그/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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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에게
친구, 네가 그토록 열광하는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나도 드디어 보았어. 주말 아침 9시에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간편한 옷을 입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달려가 몇장 남지 않은 티켓 중 하나를 겨우 구해 보았어. 물론 나도 영화를 보기 전날에는 무슨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흥에 겨워 전작 <다크 나이트>를 보며 복습했지만, 스포일러가 두려워 며칠 동안이나 인터넷조차 끊었다는 너 정도의 설렘은 아니어서인지 하여간에 엄청난 흥분보다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극장에 들어갔어.
사실 좀 싱겁게 들릴 게 빤하지만, 영화에 관한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다크 나이트라이즈>가 <다크 나이트>를 뛰어넘지 못했을뿐 아니라 훨씬 못 미치는 영화라는 평가에 공감하는 편이야. 이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배트맨 비긴즈>를 본 이후에 <다크 나이트>를 보았을 때 어떻게 전자의 그 엉성했던 영화가 이토록 흥미진진한 영
[신 전영객잔] 아이맥스가 시네마를 구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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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도 세상의 아이들은 이불을 덮어주는 부모에게 이야기를 조를 것이다. 어제 들려주고 읽어준 동화와 똑같은 얘기라도 아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아니, 도리어 숙지하고 있는 클라이 맥스에 이르면 신이 나서 “그래서 악어가 해적을 삼켰어!”라고 나서서 마무리 짓고 뿌듯하게 잠을 청하기도 한다. 과하지 않은 변주도 환영 받는다. 부모가 다정히 베드타임 스토리를 읽어주는 광경을 뒷날 미국영화에서나 본 세대인 나는, 누워서 동화를 읽다 눈치껏 전등을 끄는 아 이였는데 어둠 속에선 책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뒤채며 중얼중얼 이야기를 지어 내다 잠이 들곤 했다. 나는 내 자작 엉터리 픽션이 좋았는데, 독창적이어서가 아니라 책에 나오 는 진짜 동화를 그럴싸하게 표절하면서도 등장 인물의 외모와 말투를 내 취향에 맞게 갈아치울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웠다. 아득히 잊었던 수십 년 전 잠버릇을 떠올린 건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이 절반쯤 흘러갔을 때였다. 앤드루 가필드가 분한 피터 파
[신 전영객잔] 네버엔딩 스토리의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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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헤이와이어>를 보며 어린 시절 본 액션영화들이 마구 섞이며 업그레이드되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주인공이 매력적이고 액션이 인상적이어서 상투적인 스토리 전개도 다 용서가 된 채로 몇몇 이미지들이 마음에 남아 가슴이 슬쩍 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 영화들 말이다. 절대적으로 이는 여주인공 말로리 케인을 연기한 지나 카라노의 신체 연기와 스티븐 소더버그의 능란한 연출 덕분이다. 미국 영화평론가 피터 트래비스의 표현대로 이 영화는 ‘앨프리드 히치콕이 만든 팸 그리어 영화’라는, 일급의 서스펜스 기교로 B영화를 만들고자 한 소더버그의 창작목표를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그것이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을 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다소 길게 말하고 싶은 이유이다.
날것 그대로의 액션
<헤이와이어>의 첫 장면, 말로리 케인은 한적한 시골 레스토랑에서 차를 따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밤을 새워 피곤하다고 투덜대는 건장한 청년이 그녀
[신 전영객잔] 순수 액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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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학살에 관한 클로드 란츠만의 기념비적 다큐멘터리 <쇼아>가 개봉했을 때 이 영화에 가차없는 비난을 던진 건 장 뤽 고다르였다. “이 영화는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다르는 그렇게 비난했다. 고다르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학살이 이뤄졌던 가스실의 바로 그 순간의 현장이 독일군의 영화 카메라에 찍혔으며 그것이 세상 어딘가의 기록보관소에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기록물이라고 자처하는 <쇼아>가 그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찾으려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다르는 힐난했다. 고다르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쇼아> 옹호론자 마르그리트 뒤라스와의 논쟁도 불사했다. 훗날 한 평자는 그것이 경험적인 검토와 무관하게 그의 유죄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의 매체인 영화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해내지 못했으므로, 혹은 기록했다 하더라도 사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에
[신 전영객잔] <두 개의 문>은 어떻게 빨간 잉크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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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은 절대 안 하겠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결국 <폭풍의 언덕>을 하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어요.” 지난 1월 열린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폭풍의 언덕> 상영 전 공개토크에 나선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은 청중을 여러 번 웃겼다. 그녀는 관습적인 대답을 체질적으로 못 견디는 사람으로 보였다. 아놀드는 대뜸 이 영화가 싫다고 말했고 그럼 다른 전작들은 마음에 드느냐는 사 회자의 질문에, 기본적으로 본인의 작품을 다 싫어하는데 <폭풍의 언덕>을 제일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완성도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영화로 인해 2, 3년 동안 고통, 폭력, 사도마조히즘의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스트레스의 표현이었다. 극장의 불이 꺼지기 직전 안드레아 아놀드는 남말하듯 짓궂게 경고했다. “화면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시건 현실 풍경은 그것보다 훨씬 추레했어요. 여러분은 객석에서 두 시간 보면 그만이지만 난 몇주 동안이나 하루에 10시간씩 저기 있었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 전영객잔] 코스튬 드라마가 옷을 벗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