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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의 속편이 나올 거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제법 그럴듯한 상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표현의 행간을 좀더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이하 <로그네이션>)은 분명 기대만큼의 재미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제공하는 영리한 블록버스터다. 적절한 타이밍에 볼거리를 제공하고 필요한 디테일은 일부러 프레이밍까지 해서 확실하게 보여준다. 인물의 심리를 적당히 짐작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혹여 부족할까 일일이 대사로 설명까지 해주는) 과도한 친절은 이 시리즈가 다수의 관객이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을 지향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나쁘다는 게 아니다. <로그네이션>의 연출은 계량화된 공식의 완성형으로서 탄탄함을 자랑하는, 상업영화의 총아다. 기본적으로는 다섯 번째 속편임에도 늘어지기는커녕 1편으로 회귀하는 듯한 에너지에 대해 경탄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가 더 보고 싶은지 묻는다면 이제 그만 에단 헌트를 놓아주고 싶은 마
[송경원의 영화비평] 뭐든 이루어지면 식상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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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녀, 칼의 기억>은 서로 다른 운명을 향해가는 세 검객의 칼처럼 각기 다른 플롯이 얽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사명으로 품고 세상에 뛰어든 홍이(김고은)의 성장담, 검 한 자루를 쥐고 천출에서 무인정권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선 덕기/유백(이병헌)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암투, 대의와 연정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두고 흔들리는 설랑/월소(전도연)와 덕기/유백간의 멜로드라마가 고려 말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타고서 흘러간다. 보다 다층적이고 현대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한 각본상에서의 야심은 엿보이지만 일일이 뜯어보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무협영화의 전형적인 서사와 장치를 여러 겹으로 포개놓고 있다. 풍천삼협의 과거사와 유백의 권력욕은 형제의 의를 맺은 협객들이 배신으로 인해 원수가 되는 장철의 <자마>(1973)를 연상케 하며, 설랑과 덕기 사이의 엇갈리는 애증 관계는 장이모의 <영웅: 천하의 시작>(2002)에서 비설(장만옥)과 파검(양조위)
[조재휘의 영화비평] 의협(義俠)의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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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세기 넘게 서부극에서 보아왔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고 해도 아주 잠시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이런 장르를 통해 접했던 전설적인 인물들, 그러니까 와이어트 어프, 애니 오클리, 버펄로 빌, 빌리 더 키드와 같은 인물들 역시 서부극 팬들의 상상 속에 거주하는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서부극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하는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려는 시도는 허망하다. 그 순간부터 장르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존 포드의 영화들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안전하겠지만 심지어 그의 영화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수정주의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 그리고 그 밖의 온갖 변종들은 오래전에 장르가 먹어버렸다. <백 투 더 퓨처3>의 마티 맥플라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때 그가 모델로 삼았던 것이 존 웨인이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차피 다 거짓말인데 더 오래된 거짓말이라고 나을 게
[듀나의 영화비평] 괴물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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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자정을 넘긴 시간, 변두리 멀티플렉스의 아주 작은 관에서 <러브 앤 머시>를 보았다. 두 시간 동안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하지만 나의 망각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한명의 뮤지션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잔잔한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가졌다.
대서양을 처음 비행한 사람이 린드버그인 것은 초등학생도 알지만 두 번째로 비행한 사람에 대해선 인간의 역사는 냉담하다. 시장과 역사는 언제나 첫 번째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권력을 부과한다. 우리 모두가 아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에게 희롱당하고 분을 못 이겨 죽는 오나라의 영웅 주유의 탄식이 아니더라도(물론 2인자도 못되는 거개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불평도 사치스러운 것이겠지만) 2인자의 지위만큼 안타까운 경우도 없을 것이다. 비치 보이스는, 아무리 이 밴드의 광팬이라고 하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대중음악사상 가장 많은 군웅들이 할거한 1960년대 서구 록음악계의 어쩔 수 없는 2인자다. 바로 비틀스
[강헌의 영화비평] 2인자의 위대한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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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센구미 혈풍록>에 실린 ‘산조 강변의 난투’ 에피소드에는 이노우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의 나이 든 무사가 나온다. 퍽 인자하고 지혜로운 인상을 풍기는 이 무사는 검술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 그를 따르는 무사 고쿠기의 시점으로 신센구미의 우두머리였던 곤도를 비롯해 이 조직의 리더들이 왜 검술 실력도 별 볼일 없는 그를 모시는지를 동정을 담아 묘사하고 있는 이 에피소드는 그가 조장으로 이끄는 6번대가 어느 여관에 숨어 있는 로닌들을 처치하려다 낭패를 보는 것으로 끝난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 <고하토>(2000)에도 이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노우에를 묘사하는 관점에서 온도 차이가 꽤 난다. 혈기왕성한 젊은 무사들 사이에서 이 나이 든 무사는 첫 등장부터 지혜로운 고수의 느낌을 풍기지만 실은 지략도, 용기도, 실력도 없는 그저 그런 늙은이일 뿐이었다. 그의 무능으로 인해 그가 이끄는 신센구미의 6번대는 하마터면
[김영진의 영화비평] 자의식 없는 메타포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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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종이 달>을 본 뒤, 원작인 가쿠타 미쓰요의 <종이달>을 읽었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두고 원작과 비교해 따져 묻는 건 사실 좀 허무한 일이다. 연출자의 목표가 ‘소설의 빈틈없는 재현’일 리 없을뿐더러, 설사 데칼코마니 하듯 소설을 영화로 찍어내려 했다고 해도 쓰인 ‘글’을 ‘(움직이는) 이미지’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생겨난 ‘얼룩’들은 차라리 필연에 가깝다.
<종이 달>을 만든 요시다 다이하치는 이 ‘얼룩’을 즐길 줄 아는 감독이다. 이 영화 전까지 그는 총 네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모두 원작 소설(혹은 만화(<퍼머넌트 노바라>))을 출발점으로 하는 작품으로, 그 각색 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실제로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에서 그가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는’ (작은) 사건이 불러일으킨 동요를 높낮이가 서로 다른 네 등장인물의 ‘시점-감정’과 정교하게 분할된 ‘시간’이라는 두개의 축 위에 정신없이
[우혜경의 영화비평] ‘있어야 할 곳’은 어떤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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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션 임파서블>에서 가면이 빠지면 <미션 임파서블>이 아닌 거 같아.”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이 끝난 영화관 관객석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세대가 바뀌었다는 소리다. <미션 임파서블> 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라야 하는 것이 두개 있다. 랄로 쉬프린의 음악과 라텍스 가면이다. 롤린 핸드가 공들여 만든 석고틀에 라텍스를 부어 변장 대상과 똑같은 가면을 만들어 뒤집어쓰는 장면이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TV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가 아니었는가. 물론 실제로 그런 가면을 쓴다면 <할로윈>(1978)의 마이크 마이어스처럼 보일 가능성이 100%였겠지만 <미션 임파서블>의 세계는 사정이 달랐다. 그런데 그런 결정적인 장면이 이제 ‘안 나오면 아쉬운’ 카메오 취급을 받는다.
영화만 본 관객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은 <미션 임파서블> TV시리즈의 리메이크지만 원작
[듀나의 영화비평] 오리지널의 정체성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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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2004)과 <타짜>(2006), <도둑들>(2012)은 프로페셔널 범죄자들이 모여 계획을 짜고 목표를 탈취하는 강탈영화(Caper Film)의 틀 안에서 인물간의 치정과 배신을 펼쳐놓은 작품들이다. 돌이켜보면 이점은 사뭇 의아함을 자아낸다. 능숙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기를 인정받아왔지만 정작 최동훈의 필모그래피 면면을 들여다보면 영화의 내러티브 자체는 고전적인 필름누아르, 하드보일드 문학의 자장을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 자체를 독창적으로 만들어내는 작가라기보다는 전통적인 틀 안에 머물면서 그 안의 인간 군상으로부터 재미를 이끌어내는 연출가에 가깝다.
관계-사이(間)의 영화 - 최동훈, 혹은 하워드 혹스
독립군 요원의 암약을 그린 <암살>(2015)에서도 이러한 최동훈 영화의 특징은 반복된다. 소집된 독립군 일원은 친일파 사업가 강인국(이경영)을 표적으로 삼아 연대하나, 내부 배신자에 의해 위기에 처한
[조재휘의 영화비평] 시대극으로서는 아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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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암살>은 1933년 경성을 배경으로 조선독립군의 암살 작전을 그린다. <범죄의 재구성>(2004), <타짜>(2006), <도둑들>(2012)에서 보았던 최동훈 감독의 실력 그대로, 놀라운 짜임새와 인물들간의 조화가 돋보인다. ‘케이퍼 필름’이 제작한 영화답게, <암살>은 케이퍼 무비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며 장르의 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몇몇 스타일리시한 장면이나 장중한 음악으로 고전영화의 풍미를 살려낸 호쾌한 액션물이다.
영화는 1930년대를 입체적으로 재현한다. 단지 상하이의 조차지나 경성의 미쓰코시 백화점을 그럴듯하게 그렸다는 뜻이 아니다. 1930년대 초 사정을 매우 정교하게 그려낸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국을 수립한다.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 이후 항저우로 옮긴 임시정부는 지도력
[황진미의 영화비평] 염석진의 최후가 의미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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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수사극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은 전문가 집단이다. 형사 외에도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인물들이 사건에 뛰어들어 범인을 밝혀낸다. 그런 점에서 <극비수사>는 유별난 영화다. <극비수사>(2015)의 이야기(혹은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실화) 중 흥미로운 부분은 점쟁이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 김중산이 유괴 사건의 해결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점쟁이는 분명 프로페셔널한 직업이다. 하지만 그가 범죄 및 수사의 영역 안으로 뛰어들다 보니 내 몸속 수용세포들이 난감함을 표하기 마련이다. <극비수사>보다 1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나, 사건이 벌어진 시점으로 치면 10년 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살인의 추억>(2003)에서도 비슷한 장면 하나를 찾을 수 있다. 형사 박두만의 연인 설영(전미선)은 “정 답답하면 무당집 같은 데라도 가봐”라고 말한다. 다음날 두만은 진짜로 무당을 찾아가고, 무당은 이런저런 말을 내뱉던 끝에 묘책 하나를 제시한다. 부적 따위
[이용철의 영화비평] 현실 안에 신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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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는 미국의 목사이자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전기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마틴 루터 킹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를 순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1965년, 흑인 투표권 투쟁을 위해 벌어진 ‘셀마-몽고메리 행진’에 집중한다. 미국 인권운동사에서도, 마틴 루터 킹 개인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영화는 자극적이지 않다. 차분하되 밀도 있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의 새로운 표적이 된다. 또 <셀마>는 비슷한 영화 몇몇을 떠올리게 한다. 흑인 인권을 다뤘다는 점에서 일단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나 <노예 12년>(2013)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와 주제를 보다 정교하게 제한한다면 <미시시피 버닝>(1988)이 생각난다(이 영화는 1964년, 미시시피주의 흑인 투표권 등록을 돕
[김봉현의 영화비평] 힙합이 품은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