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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까지 정지우가 만든 장편영화 중 최고작이다. 이는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는데,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일부로, 한마디로 공익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는 이 핸디캡을 극복한 것일까.
대부분 정상적인 교양인들은 국가 주도 공익영화에 의심을 갖는다. <배달의 기수>, 문화영화 등등의 시대를 거친 옛 세대는 더욱 그럴 것이다. 공익영화를 주도하는 관료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사고와 이미 그 프로세스를 거친 메시지의 강요이며 이는 대부분 올바른 예술로 이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국가의지에 굴복했거나 정직하지 않거나 생각이 짧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나온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들은 이와는 조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건 여기서 나온 <시선> 시리즈나 <날아라 펭귄> 같은 영화들의 목표가 다른 공익영화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앞에
[듀나의 영화비평] 공익영화의 ‘다른 길’ <4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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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크로닉>은 무시무시한 충돌 이미지로 끝나는 영화다. 결말을 언급하며 시작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크로닉>은 결말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결말의 충격적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곧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팀 로스)의 조깅 장면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끝맺는다. 데이비드를 마주 본 자리에서 그가 다가오는 만큼 후진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카메라는 데이비드가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난 차에 치여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멈춘다. 그와 함께 관객의 사유 역시 그 순간에 붙박인다. 이것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의 흐름을 일거에 무너뜨린 뒤 결말 그 자체에 모든 것을 수렴시켜버리는 무책임한 마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강렬한 결말이라고 해도 그 강렬함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왜 그런
[김소희의 영화비평] <크로닉> 둔탁한 충돌음이 남기고 간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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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필드 10번지>와 혈연관계라고 제작진이 주장하는 <클로버필드>(2008)는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준 새로운 스타일의 장르영화였다. 주로 저예산 호러나 오컬트영화에 활영되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을 대규모 괴물 SF물에 접목한 시도는 꽤 영리했고 효과적이었던 것. 특히 괴물의 존재를 영화 내내 간접적으로 묘사하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관객이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처리한 순간은, 제작진의 장르영화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나를 포함한 <클로버필드> 팬들은 그 후속편을 열심히 기다렸지만 5년, 7년이 지나도 <클로버필드2>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8년 만에 등장한 <클로버필드 10번지>. 전작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이나 무명배우 캐스팅, 대규모 재난영화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진 예고편은 역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나 존 굿맨 같은 멋진 배우들의 존재, 외부의
[임필성의 영화비평] 장르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는 데 성공한 <클로버필드 1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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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묘사가 있는 글임을 밝힌다.
소녀들이 길을 떠나는 엔딩을 언제나 좋아했다. 그들 앞에 놓인 철길이 불안과 희망으로 설레게 했다. <저주받은 재산>(1966)과 <천국의 나날들>(1978)이 그랬다. 관습에 저항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자들이 죽거나 희생한 길의 끝에서 소녀들만이 미래로 향한다. ‘아비치’의 노래 <날 깨워줘>(2014)의 뮤직비디오에도 길을 떠나는 자매가 나온다. 자매는 보수적인 마을에서 외계인 취급을 받으며 산다. 동생이 푸념한다. “그들은 우리를 싫어하나봐.” 어느 날, 소녀는 동생을 깨워 떠나자고 말한다. 동생이 묻는다. “어디로?” 소녀는 답한다. “우리가 속한 곳으로.” 그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속한 곳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어쨌든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성인 남자들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살기에 소녀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소녀들은 맞서는 게 맞다. 피가 너무 뜨거워서, 규칙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타
[이용철의 영화비평] 춤추며 살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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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내쉬(앤드루 가필드)는 납득이 안 된다. 데니스는 법원에서 퇴거 명령을 받는다. 평생 살던 집에서 나가라는 통지다. 데니스의 엄마가 작은 가게도 열었던 집이다. 아들이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갔던 집이다. 지금까지 내 집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데니스는 아들의 손을 잡고 법정에 서서 하소연한다. 법은 냉정하다.
어느 날 아침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부동산 브로커 릭 카버(마이클 섀넌)가 찾아온다. 손에는 법원 등기 서류가 들려 있다. 릭의 뒤에는 장전된 총을 찬 보안관이 서 있다. 릭은 데니스 가족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생필품만 챙겨서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한다. 릭은 얄밉게도 예의까지 차린다. “우리도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법원의 명령에 따라, 이제 이 집은 은행의 소유입니다.” 데니스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내쫓긴다. <라스트 홈>의 첫 장면이다.
거두절미하고 전개되는 <라스트 홈>의 첫 장면을 이해하려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신기주의 영화비평] 승자의 나라에서 내 집을 지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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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사이드 다운>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4명의 유가족과 16명의 국내외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제목인 ‘업사이드 다운’은 관객의 뇌리에 깊이 남은 뒤집힌 세월호를 가리키는 말이자, 이러한 참사를 배태한 한국 사회의 뒤집힌 가치체계를 꼬집는 말이다. 즉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월호 사건은 배가 기울게 된 원인부터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구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한명도 구조하지 못한 해경이나, 대형 오보를 터뜨린 것도 모자라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은 언론이나, 유가족을 범죄자처럼 고립시키며 비난했던 정부의 행위는 모두 뒤집힌 가치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린 시절 이민을 간 재미동포 김동빈 감독은 20대 초반의 다큐멘터리스트이다. 2013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미군 유가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Vermont Fallen>을 찍은 후, 제작사가 제공하는 심리치료
[황진미의 영화비평] 참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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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번역 출간된 하스미 시게히코의 평론집 <영화의 맨살>에는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 할리우드의 50년대’라는 글이 실려있다. 강연을 풀어낸 이 글의 주제는 코언 형제의 신작 <헤일, 시저!>와 크게 통하는 부분이 있다. 경쾌하게 조롱 섞인 긍정을 담은 이 희극 영화는 언뜻 영화 찬가의 외피를 두른 것처럼 보이지만 할리우드 전성기인 1930년대나 1940년대가 아니라 1950년대의 할리우드를 배경 삼았다는 점에서 이 당시에 영화가 죽어가고 있다는 쓰디쓴 진술을 담으려는 속내와 무관하지 않다.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다수의 실력 있는 영화인들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실업자가 되거나 근신하며 남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지 않으면 망명해야 했다. 할리우드가 전무후무한 커다란 재능의 손실을 겪은 시기였다. 또한 텔레비전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1년에 500여편을 주기적으로 생산하던 작업공정 구조가 훼손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졌으며 단단한 드라마보다는 대작 위주의 물량공
[김영진의 영화비평] 비극의 시대를 비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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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등장한 가장 주목할 만한 미국 감독 중 하나인 데이비드 O. 러셀은 처음부터 일관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감독이었다. 데뷔작 <스팽킹 더 몽키>(1994)에서 <디제스터>(1996)를 거쳐 <쓰리 킹즈>(1999)와 <아이 하트 허커비스>(2004)에 이르기까지, 열혈 인권운동가 출신의 그는 자본주의가 잠식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웃픈’ 코미디로 둔갑시켜 조롱과 연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그의 영화관이 일종의 방향 전환을 이룬 영화는 2010년작 영화 <파이터>이다. 때로 과격하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화려한 허상에 반기를 들었던 그의 급진주의는 이 영화에 이르러 자취를 감춘다. 보다 세련되고 진중한 방식의 드라마로 구성된 <파이터>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하층민의 이야기는 훌륭한 배우들의 앙상블에 힘입어 밀도 있게 그려진다.
아카데미영화제에서 환대를 받고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휩
[최은영의 영화비평] TV 속 여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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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아들>을 VR(Virtual Reality)로 감상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곤 잠시 멍해졌다. 관계자들에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묻고 싶었다. 누가 그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싶어 한단 말인가. <사울의 아들>에 쏟아진 격찬의 근거는 대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비틀어 접근하는 형식, 재현의 윤리 때문이다. 감독은 대학살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선 안 된다는 판단으로 프레임을 제한하고, 초점을 흐리고, 일인칭의 제한된 시점을 택했다고 수차례 밝혔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이 영화에 보낸 지지 역시 이러한 형식이 영화의 윤리성을 담보한 고뇌의 결과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VR은 연출 의도를 정면으로 뒤집는 포맷이다. 보다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영상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지각적 리얼리티로서의 VR 방식을 라슬로 네메시 감독이 과연 허락한 것일까.
한편으론 궁금하다. 형식적 성취를 완전히 배반하는 VR을 앞두고 호기심이 앞선다.
[송경원의 영화비평] 액자는 그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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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이후 미국 군인의 파병은 대개 일관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상대편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는 미 제국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혁명전을 치른다고 생각하는 반면, 정작 전쟁에 뛰어든 미군은 정치적 측면에 무지하다. 혹은 관심이 없는 척해야 한다. 그들은 누군가의 결정에 따라 전쟁을 수행할 따름이다. 그러한 상황이 잘 드러난 작품은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2001)이다. 소말리아 내란에 끼어든 병사들은 하나같이 “나는 정치에 대해 모른다”라고 말한다. <블랙 호크 다운> 개봉 당시, 나는 영화는 물론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작전 자체에 반감을 느꼈다. 내 기본적인 생각은 ‘집안싸움에 이웃 아저씨가 주먹질로 개입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었고, 영화가 소말리아의 민중을 조지 로메로 영화의 좀비처럼 그리는 게 불편했다. 얼마 후 한국 장교들의 인터넷 포럼에서 내 표현을 비웃는 글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기자라고 판단했으며 마치 비전문
[이용철의 영화비평] 원치 않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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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는 1981년 북아일랜드에서 옥중단식으로 사망한 보비 샌즈를 그린다. 2008년에 만들어진 스티븐 매퀸 감독의 데뷔작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영화는 ‘목숨을 건 단식’이라는 역사적이고 논쟁적인 사건을 다루면서, 절제된 시선으로 객관성과 성찰성을 확보한다. 영화는 한순간도 숭고함을 주장하지 않지만, 지난한 ‘몸의 투쟁’을 면밀히 비춤으로써 숭고함에 육박해 들어가는 실존의 경지를 보여준다.
다층적인 시선과 구성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담요투쟁과 오물투쟁을 보여주는 1부, 단식투쟁을 결심한 보비 샌즈와 가톨릭 사제간의 대화를 담은 2부, 단식으로 죽어가는 보비 샌즈를 그린 3부. 1부의 중간까지 보비 샌즈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담요투쟁과 오물투쟁을 벌이는 다른 수감자들과 이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교도관을 비춘다. 영화 초반 마치 주인공인 양 비추던 강박적인 교도관의 총상 장면은 당혹스러운데, 영화는 왜 이처럼 비관습적인 흐름을 택
[황진미의 영화비평] 숭고함을 응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