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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감독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숨겨진 부분들에 대해 짐작할 수는 있다. <아버지의 초상>(2015)은 다만 대부분 영화에서 ‘시네마틱한 말하기’라 믿는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해서만 거부한다. 이 점이 이 작품을 독특한 위치로 끌어올린다. 과거 다큐멘터리영화의 감독들이 선호하던 사실적 화면의 취향과 함께, 스테판 브리제는 자신의 영화를 더 미니멀한 것으로 세공해낸다. 이 미니멀한 미장센에 대한 의지는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찾을 수 있는 특징이다. <마드무아젤 샹봉>(2009)이나 <어 퓨 아워스 오브 스프링>(2012) 등 이전의 연출작들은 주인공의 심리를 3인칭 관점에서 최대한 간소화해 풀어낸다는 점에서 흡사한 리듬감을 지녔다. 하지만 이 전략은 인공적 절제미를 더 강조해 보여준다. 간소화되고, 그래서 아름답다.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찾
[이지현의 영화비평] 단순한 확신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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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가렐의 영화에서 음악의 삽입이 종종 난데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음악이 어떤 장면의 시작에 앞서 장면의 성격을 예견하는 표지점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어색한 지점에서 음악이 돌출되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연인들>(2005)에서 연인의 얼굴 클로즈업 위로 이따금 흘렀다가 멈추길 반복하는 분절된 음악, 혹은 부분적 무성영화라 할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1985)에서 영화의 침묵을 찢고 니코의 <All Tomorrows Parties>가 흐르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음악이 흐를 때의 느낌은 마치 장면을 보던 감독이 머릿속에서 불현듯 떠올리고 이것이 영화에 실시간으로 반영되기라도 한 것 같다. 이로 인해 그의 영화 속 음악은 상반된 두 기능을 동시에 취한다. 장면에 갑작스레 끼어들어 몰입을 방해하는 동시에 장면을 어루만지면서 더 깊이 몰입하게 한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속 첫 음
[김소희의 영화비평] 권태와 생동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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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리커트는 월가의 은둔 고수다. 제이미(핀 위트록)와 찰리(존 마가로)는 시골의 초짜다. 친구 사이인 제이미와 찰리는 부모의 차고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소액 투자를 거듭한다. 겨우겨우 약간의 자본을 축적하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은 월스트리트에서 큰 판에 끼기를 원해 벤 리커트에게 도움을 청한다. 초짜는 고수 앞에서 주름을 잡는다. “미국 부동산이 폭락한다는 쪽에 걸어보려고요.” 고수는 초짜의 투자 설명을 경청한다. “판을 제대로 봤군. 도와줄게.” 결과적으로 미국 부동산 시장은 붕괴된다. 덕분에 제이미와 찰리는 대박난다. 영화 <빅 쇼트>의 한 장면이다. 믿지기 않지만 실화다. <빅 쇼트>는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다룬 영화다. 미국 경제와 세계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뻔한 사건이다. 제이미와 찰리처럼 하늘이 무너졌을 때 솟아날 구멍을 찾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마이클 버리이고 마크 바움이고 자레드 베넷이다.
지금껏 월스트리트 금융계를 다룬
[신기주의 영화비평] 우리는 돈을 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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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필립 가렐의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을 보며 제목 그대로 한 ‘여인의 그림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이는 가렐과 동세대 작가인 샹탈 애커만이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주인공 피에르를 연기한 스타니슬라 메하르는 샹탈 애커만의 두편의 영화, <갇힌 여인>(2000)과 <알마이에르가의 광기>(2011)에 출연한 배우다. 그가 조연으로 잠깐 출연한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의 <편지>(1999)를 제외하면 나는 그를 애커만의 영화 속 음울한 표정의 배우로만 기억한다. 그가 벽에 기대어 바게트를 씹으며 종이에 적힌 무언가를 읽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첫 장면에서도 그의 특유의 연악함과 우울함의 검은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그 무렵 샹탈 애커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가렐은 지난해 12월, 서울에서의 강연에서 애커만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김성욱의 영화비평] 삶을 살아가는 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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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그의 현란한 기교에 매료됐다. 의심은 <바벨> 때부터 싹텄고, <버드맨>을 보고 불안해졌다. 그리고 <레버넌트>를 통해 확신했다. 이제 다음이 궁금하지 않다.
1.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무덤에서 일어난 순간 헛된 기대인걸 알면서도 그의 걸음이 복수를 향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피츠제럴드(톰 하디)에게 살해당하는 아들 호크의 참상을 목격한 장면부터 이미 내정된 걸음이었지만 그럼에도, 글래스의 처절한 걸음이 종국에는 복수 이외의 다른 곳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 같다. 복수극이 끔찍하다거나 식상해서가 아니다. 영화 중간 어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어느 지점부터 주의가 흩어졌다고 해도 좋겠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한 줄로 정리한다면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복수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게 정말 복수심일까. 그 계기가 되는 사건, 아들의 죽
[송경원의 영화비평] 서사를 잃고 헛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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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풀8>는 대살육이 벌어지는 클라이맥스 직전, 영화의 주무대인 잡화점에서 그날 아침 일어난 일들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혐오스런 주인공들이 서로 죽고 죽임을 당하는 결말은 얼마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주요 인물들 외에, 이 회상 장면에서 잡화점 주인과 종업원들이 나올 때 나는 당황했다. 영화의 상당 부분이 지날 때까지 그들은 서사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관객인 나는 그들이 죽을 것을 알고 어떻게 죽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괴로웠다. 가벼운 인사치레와 무의미한 취향 테스트 같은 사소한 대화들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그들이 언제 죽임을 당할지 신경이 곤두섰다. 그들은 이 영화의 혐오스런 주인공들과 다르게 무구하고 명랑한 인물들이었다. 음식 솜씨 좋은 잡화점 주인 미니 아줌마와 종업원 젬마, 그리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마차 조수 주디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인간들의 하염없이 즐거운 행동을 보여
[김영진의 영화비평] 야만적인 죽음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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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미국 미네소타에서 고니시 다카코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 숲속 눈밭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죽기 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던 경관의 오해로 당시 모든 뉴스에서는 그녀가 코언 형제의 영화 <파고>(1996) 속 숨겨진 돈가방을 찾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라고 소란스레 보도했다. 이후 조사를 거듭한 끝에 그녀의 죽음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밝혀졌지만 <파고>의 돈가방을 찾아 미국의 소도시 ‘파고’에 도착한 일본 여성의 죽음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종의 ‘도시 전설’(urban legend)로 번져나갔다. 데이비드 젤너 감독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이하 <쿠미코>)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때 “바탕으로 했다”라는 말은 어쩐지 난처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바탕으로 한 출발점이 현실도 허구도 아닌 ‘(도시) 전설’이기 때문이다.
‘다카코 전설’에서 무
[우혜경의 영화비평] 폴 버니언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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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웨스턴은 무정부적이다. 첫 번째 웨스턴의 주인공은 강도였다. 수정주의 웨스턴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아니, 수정주의쪽으로 오면서 더 무정부적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스턴이 정치적 아나키즘에 딱 들어맞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나키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권력과의 관계’에서 그러하다는 말이다. 웨스턴의 주인공은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좇는 자들이다. 그들이 말을 타고 어디로 달려가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간혹 그것이 <헤이트풀8>(2015)처럼 지옥으로 판명날 때도 있지만, 웨스턴은 무법자가 찾아가는 공동체의 이상향에 관한 영화다. 기억하라, 웨스턴은 19세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관객은 무법자들의 세계를 동경한다. 당신은 언젠가 <내일을 향해 쏴라>(1969)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를 사랑한 적이 있다. 혹은 <와일드 번치>(1969)의 불한당들은 어떤가. 그런데 또 이상한
[이용철의 영화비평] 이상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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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반대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왔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는 신을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그리는 정도가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끌어내린다. 그런데 그 수단이 첨단의 장비(컴퓨터)를 신에게 선사하면서 이뤄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는 장비는 업그레이드됐지만 위엄은 다운그레이드되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진다. 베냐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물을 가장 가까이 끌어오려는 대중의 욕망이, 거리감을 전제하는 아우라와 대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그에 대한 하나의 증거물이다. 수많은 재현물에서 인간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신비화된 신의 창조과정을, 자코 반 도마엘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간단하게 누설해버린다.
감각의 언어를 긍정하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신에 대한 재현방식 자체는 따지고 보면 그리 도발적인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
[김소희의 영화비평] 디지털 유토피아의 가능성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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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영화 <캐리>(1976), <쇼생크 탈출>(1994) 등의 원작 소설가 스티븐 킹은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그는 [“내려놔요!” 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돌려줘.” 그는 애원했다]와 [“내려놔요!” 하고 그녀가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돌려줘.” 그는 비굴하게 애원했다]를 비교하며 각각의 문장이 전보다 약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약해진 것은 우리가 문장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인물의 감정, 톤과 뉘앙스 같은 것들일 터다. 후자에서 문장이 허용하는 상상의 두께는 얄팍해졌고 표현은 납작해졌다. 독자의 상상을 제한하는 화려한 사족에 그칠 때 수사는 표현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악화시키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지의 수사학에도 해당하는 지적이 아닐까.
이미지를 향한 소렌티노의 열망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는 과잉된 스타일 때문에 비판
[박소미의 영화비평] 아름다움의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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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프리퀄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리지널 3부작만큼 재미있지는 않지만 자기만의 이야기도 있고 자기만의 아름다움도 있는 작품들이다. 다들 죽이고 싶어 하는 자자 빙크스도 굳이 싫어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이 캐릭터에 반영된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매력 없고 짜증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집중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시된다면 우리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헤이든 크리스텐슨? 로렌스 올리비에의 재림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구박은 좀 심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프리퀄을 옹호하려고 해도 이 세 영화가 그렇게 매력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번에 새로 나온 J. J. 에이브럼즈의 속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이하 <깨어난 포스>)가 이들 세편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더 <스타워즈>스러운 영화라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크리에이터인 조지
[듀나의 영화비평] 보수적이고 완벽한 자기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