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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으로 일대 군상극을 벌인 마블 스튜디오는 또 다른 어벤져스 멤버들을 소개하며 전열을 재정비한다. <앤트맨>(2015)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에 간만에 등장한 단독 히어로영화다. 코믹스 원작에서의 앤트맨은 어벤져스 초창기 멤버이자 과학자로 울트론을 창조할 만큼 비중 있는 캐릭터였으니 도리어 영화화가 늦은 편이지만, 영화 버전으로 새롭게 각색된 <앤트맨>은 점차 매너리즘의 징후를 보이는 마블 슈퍼히어로영화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회장 케빈 파이기의 지휘 아래 마블이 2019년까지의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공개한 가운데, <앤트맨>은 앞으로 있을 마블 슈퍼히어로영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점검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다.
혼성(hybrid) 장르영화로서의 <앤트맨>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미래형 활극이지만 공교롭게도 <앤트맨>의 바탕에
[조재휘의 영화비평] 끝없이 확장되는 마블의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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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에서 성준(유준상)은 선배 영호(김상중)와 함께 술집 ‘소설’을 세번 방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세번 반복된 사건인지, 아니면 흐트러진 시간 혹은 흐려진 정신이 만들어낸 ‘분신술’인지 영화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 예전(김보경)은 술자리에 매번 늦게 도착해 자신의 부재에 대해 (거의) 똑같이 미안함을 전한다. 성준과 영호도 마치 매번 이곳에 처음 온 것처럼 그런 예전에게 (거의) 똑같이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영화가 이렇게 ‘시치미’를 떼기 시작하면 곤란해지는 것은 바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로부터 따돌림받은 우리를 어느 순간 보람(송선미)이 슬쩍 잡는다. 첫 번째 술자리에서 보람은 뒤늦게 가게로 돌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예전에게 웃으며 인사한 뒤, 옆에 있던 영호에게만 지나가듯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거 아니야?”라며 작게 이야기한다. 두 번째엔 좀 노골적으로 예전을 타박하더니, 세 번째에 와서 보람은 화를
[우혜경의 영화비평] 두개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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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의 사극이 연이어 개봉했다. 박흥식은 못다 이룬 이상향에 대한 판타지로 사극을 대했다. 실패한 혁명의 여파에 관한 영화인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은 박흥식이 역사 앞에서 꾼 꿈이며 한편으로는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2007)의 사극 버전이다. 박흥식과 임상수는 혁명을 부르짖었으나 그것이 요원한 것임을 기어이 확인하고 말았던 세대다(둘 사이에 있는 내게 그들의 영화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임상수가 애가를 부를 때, 박흥식은 원수 같은 낭만성에 죽음을 고하기로 한다. 그에겐 그게 협이다.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지도자로 행세하는 시대에 박흥식은 나쁜 아비를 죽이는 딸과 비상한다. 아비는 군사혁명을 빌미로 자신의 권력이 영속하기를 탐한 자였다. 보이는 대로 읽으면 되는 영화였다. 그런 영화에 무협만을 운운한 결과일까, <협녀>는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수모에 가까운 외면을 당했다.
이준익도 한때 칼의 이상향을 그린
[이용철의 영화비평] 그들의 정치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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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도세자의 죽음’은 광기로 인한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임오화변이 영조의 성격이상과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빚어진 사건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규정은 1990년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이 나오면서 흔들린다. 즉 임오화변은 단순한 광기나 부자 갈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이라는 해석이 힘을 얻었다.
<한중록>으로 회귀
<사도세자의 고백>을 쓴 이덕일은 <한중록>이 사건 후 수십년이 지나서 쓰인 책이란 점에 주목한다. 임오화변 당시 혜경궁은 사도세자를 적극 구명하지 않았고, 장인 홍봉한은 사위의 죽음을 방관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경궁의 가문은 승승장구했는데, 정조가 즉위한 후 홍봉한이 유배를 당하고, 정조가 죽은 뒤 정순왕후에 의해 몰락하였다. 혜경궁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행궁으로 옮기
[황진미의 영화비평] 딱 명절 덕담 정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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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시종일관 긴장감으로 충만하다.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가해자들의 증언과 그것을 듣는 피해자 가족의 표정을 주로 포착하는 이 영화는 말들보다는 말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드는 침묵의 행간에 집중한다. 형을 학살로 잃고 형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모를 대신해 가해자들을 찾아가 사과할 것을 침착하게 요구하는 주인공 아디의 표정을 보는 것은 관객인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나는 물론 상식적인 관전자의 입장에서 아디의 편이다. 그러나 아디는 대부분 자신들의 잘못을 부정하는 상대와 부딪치고 때론 협박을 받는다. 과거의 상황이 현재에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데 대해, 정작 아디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관전자들은 두려워하게 된다. 이 소시민적 불안에 대한 근심을 이겨내면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게 <침묵의 시선>의 화면에 긴장을 낳는다.
여기서 가해자인 상대방을 만나 직접 쳐다보거나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촬영한, 가해
[김영진의 영화비평] 흔들리지 않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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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계 영국인인 니마 누리자데는 저명한 정치 활동가인 알리레자 누리자데의 아들이자 CF와 뮤직비디오계의 스타이다. 그런 사람이 미국에 건너와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지 짐작해보자. 정치적인 영화일까, 아니면 감각적인 스타일의 영화일까. 선입견이 하나둘 쌓이기 전에 한국에서 홈비디오로만 선보인 데뷔작 <프로젝트 엑스>(2012)에 대해 우선 말해야겠다. 멀리 <애니멀 하우스>(1978)부터 <슈퍼배드>(2007)에 이르는 선배를 둔 <프로젝트 엑스>는 미국의 고등학생이 꿈꾸는 욕망이 어느 정도의 바닥으로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장이다. 앞서 말한 두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한심함은 비교할 바가 안 된다. 주인공 소년은 생일 파티에 예쁜 소녀들이 몇명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을 뿐인데, 악동 친구를 둔 덕에 하룻밤 파티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술, 음악, 섹스, 약은 기본이고, 천명이 넘는 인원이
[이용철의 영화비평] 의미 없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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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자>와 <선녀와 나무꾼> 설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멱 감는 틈을 타 의복을 절취하는 수법으로 선녀를 약취•유인한 뒤 강제로 성관계를 맺고 아이까지 낳게 한 나무꾼의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만주족 기원설화 중 하나로 출발해 시베리아, 일본 등 동북아 지역에서 여러 형태의 민담으로 변이, 전승돼왔다. 선녀의 날개옷은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도구이기에 앞서 지상의 인간과 다른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나무꾼은 이를 훔침으로써 천상의 여인을 자신과 동등한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동시에 욕망을 지속 가능한 상태로 유지한다. 이같은 이야기의 원형은 주로 나쁜 남자가 여성을 착취하는 얼개를 공유하며 무수히 활용됐는데 가까운 예로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2001)가 있다. 사창가의 폭력배가 길에서 본 여대생에게 반해 돈을 훔치도록 유도한 다음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시킨다는 이야기. 그 와중에 두 사람 사이에 스톡홀름 증후
[송형국의 영화비평] 날개옷을 빼앗긴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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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벨리에>는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Children of Deaf Adult), 일명 ‘코다’(CODA)인 폴라(루안 에머라)가 노래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면서 가족과 겪는 갈등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혹자는 농인들의 삶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비판하고, 혹자는 농인들을 자녀에게 의존하는 모습으로 그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농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빚어진 오해이다. <미라클 벨리에>는 농문화의 관점에서, 부모-자식간의 관계나 사춘기의 고민 등을 잘 풀어낸 영화이다.
흔히 농인을 ‘청각장애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장애인’이라는 규정은 비장애인 중심의 의학적 사고이다. 청인들은 농인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답답할 거라 생각하지만, 농인들은 소리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에 결핍도 없다고 한다. 마치 무성영화가 그 자체로 완벽하듯이 그들의 고요한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하며, 수어(手語)를 통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애를
[황진미의 영화비평] 차이 받아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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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공단>(2014)은 22명의 노동자가 자신의 일과 일터에 얽힌 사적 경험과 기억을 고백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를 듣다 보면,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사연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나무 하나하나를 보며 걸었는데 어느새 숲을 조망하는 위치에 서게 된 듯한 느낌. 임흥순은 자본주의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결과인 계급 갈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 땅의 노동자(더 나아가서는 동남아 지역의 노동자까지) 계급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사람의 집단으로서 노동자 계급. 어쩌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한) ‘얼굴 없는 마네킹’처럼 노동자 계급을 다뤄왔는지도 모른다. <위로공단>은 노동자 개개인의 사연을 통해 마네킹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노동자의 역사가 살아난다.
일터와 만나지 못한 목소
[안시환의 영화비평] 듣기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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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국영화는 남성들의 육체를 중심으로 그들이 누아르(액션)와 멜로드라마(신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뿌렸던 눈물과 땀, 피에 주목했었다. 고함치고 분노에 일그러진 표정에 담긴 고뇌와 단련된 신체로도 뚫을 수 없는 견고한 사회의 시스템과 싸움을 벌이면서 그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간혹 안간힘을 써서 이 세계의 끝까지 돌파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혹은 짝패)이 악의 득세를 막아낼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을 뿐이다. 남성 중심의 서사와 남성간의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여성이 중심축을 이루고 그녀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삶의 방식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보여준 신수원의 <마돈나>, 안국진의 데뷔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임흥순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은 서로 다른 형식과 시각을 지니고 있음에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들이 여성을 향해 다가서는 방법을 찾아보고 각 영화들이 지닌 태도에 대한 질
[박인호의 영화비평] 여성 노동자,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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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암살>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 최근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약진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총칼을 든 여주인공의 등장이다.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간주됐던 누아르, 액션, 무협, 잔혹극 등에서 최근 여성주인공이 잇따라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동안 무장한 여성 전사의 등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쉬리>(1999)나 <고지전>(2011)에서도 여성 저격수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반동인물들이었다. <쉬리>의 그녀(김윤진)는 북한의 간첩이자 암살범으로, 남한의 국정원 요원과 연인이었다. 즉 ‘두 얼굴의 괴물’로, 우리가 북한에 대해 품는 이미지를 대변한다. 사랑하고 통일하고 싶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존재라는 뜻이다. <고지전>의 그녀(김옥빈)도 북한군 저격수로, 감정이 거의 없는 기계적인 존재다. 남한 병사인
[황진미의 영화비평] 실현되지 못한 시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