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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셸 프랑코의 멕시코영화 <애프터 루시아>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해설을 했다. 한달에 한번 늘 해설을 했던 극장인데도 평소에 비해 관객이 크게 줄었다. 지난해 칸에서 주목할 만한 부문 대상을 받긴 했지만 신인감독이 만든 멕시코영화에 관심이 쏠리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해도 수입사나 홍보사도 그다지 성의가 없는 기색이었다. ‘애프터 루시아’란 제목을 지은 이유가 궁금해 홍보사의 보도자료를 살펴보니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는 최근 이 나라에 살며 인터넷에 뜨는 뉴스에 무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통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누군가가 겪는 고통은,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가해자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우리는 가해자 편에 서는 방식을 택한다. <애프터 루시아>는 그 점에 관해 관객에게 대속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치유는 쉽지 않다
<애프터 루시아>는 교통사
[신 전영객잔] 피할 수 없다면 껴안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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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에 대해 “이번에 미친 짓 중 하나는 노래를 통째로 넣는 것”이라는 홍상수 감독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특집 ‘홍상수의 첫 경험’, <씨네21> 921호). 영화 안의 음악으로 세번 나오는 <고향>은 이미 알려졌듯, 1941년에 발표된 가수 이난영의 노래를 최은진이 다시 부른 곡이다. 그의 어떤 직관이 이런 시도를 하게 만들었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으나, 그간 홍상수의 음악에 친숙한 우리에게도 이 곡은 어딘지 과도하게 들린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 느낌은 그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근대가요가 흘러나오고, 그걸 부른 가수의 음색이 드라마틱하며, 무엇보다 이 노래에는 구체적인 가사가 있다는 점에 근거할 것이다. 애절하게 호소하는 가사를 더없이 애절하게 부르는 가수의 노래와 홍상수 세계의 조합에 대해 적어도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음악의 감흥은 음악 자체의 내용이나 개성이 아니라, 그 음악이 세
[신 전영객잔] 말(言)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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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설국열차>를 처음 봤을 때 봉준호만은 앞으로 한국에서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프로덕션 규모와 프로덕션 시스템의 가위에 눌려 봉준호가 자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악전고투한 흔적을, 주관적이지만,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는 대단원의 장면에서 윌포드를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는 내가 본 어떤 영화에서보다 압도적 기운이 약했다. 스테이크를 굽는 옆모습으로 에드 해리스/윌포드가 화면에 등장해 커티스와 긴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동작과 말투는 화면을 장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봉준호 영화에선 간단한 설정 화면에서도 늘 화면 내의 조형적 긴장이 탱탱하고 배우들의 기세가 그 긴장을 버텨내는 주요 동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이상했다. <설국열차>를 두 번째 보고 나서 이 작품이 여전히 흥미로운 봉준호의 영화적 진경이지 않을까 유보적인 입장이 되었다. 다소 이완된 형태지만 봉준호의 영화적 결기는 화면 속에서 지탱되고 있었
[신 전영객잔] 품었던 생각을 끊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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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인 엽문을 소재로 한 왕가위의 영화 <일대종사>에서 엽문의 아내 장영성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불산의 비 오는 어느 밤이다. 엽문과 장영성이 헤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1953년 대륙의 국경은 막혔고 엽문은 홍콩 신분증을 갖게 됐다”는 후반부의 자막 이후 고독한 상념에 빠진 엽문이 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므로 이 장면은 엽문이 기억하는 아내 장영성의 마지막 모습으로서의 플래시백이다. 영화 초반부에 잠시 등장했던 장영성은 영화 내내 잊혔다가 후반부에 문득 이렇게 다시 돌아와 이내 퇴장한다.
장영성의 등장 분량은 너무 짧아서 왕가위가 엽문과 장영성 사이의 이야기를 애초에 이렇게만 촬영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도 장영성 역의 송혜교는 3년여간 촬영하며 훨씬 더 많은 장면에 출연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빙성 없는 풍문으로는 극중 엽문(양조위)과 팔극권의 달인인 일선천(장첸)의 뜨거운 무술 대결 장면이 촬영되었지만 삭제되었다
[신 전영객잔] 인생무상의 멜로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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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송강호)가 등장하는 순간은 예상과 달리 영화의 첫 번째 클라이맥스가 지나간 뒤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와 꼬리칸 반란자들이 꼬리칸을 탈출하며 이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질주의 쾌감을 불러일으킨 다음, 열차의 감옥에 이르러 마침내 남궁민수의 정체가 드러난다. 반란 지도자 커티스와 비밀스러운 열차의 열쇠가 되어줄 남궁민수가 처음 대면하는 이 순간이 앞으로의 서사적 전개를 책임져줄 중요한 전환시점이 될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영화는 이 장면에 기대되는 긴장감을 뜬금없는 말장난이나 행동들로 분산시키며 앞선 탈출 시퀀스의 흥을 단절시킨다. 물론 그것이 서사적, 장르적 기대를 배반하는 봉준호 특유의 스타일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크로놀 냄새를 맡고 깨어난 남궁민수는 부스스한 얼굴로 커티스와 그의 일행을 쳐다본다. 잠시 어색한 순간이 지나간 뒤, 남궁민수와
[신 전영객잔] 두 이야기는 결국 만나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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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 전문가 남궁민수(송강호)와 반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마침내 설국열차의 지배자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기차의 엔진이 거처한 최전방 칸의 문 앞에 이르렀다. 커티스는 자신의 치욕스런 과거를 고백하고 참회한 뒤, 남궁민수에게 빨리 마지막 문을 열라고 재촉한다. 남궁민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다른) 문을 열고 싶어. (열차의 벽면에 난 문을 가리키며) 워낙 오래 갇혀 살아서 저걸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좆도 문이란 말이지.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잔 말이지….”
이 대목에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봉준호의 대사가 아니다. 물론 이 대사는, 그 서민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지적이며 급진적이다. 그는 지금 하층민의 봉기에 의한 권력 교체만을 생각해온 커티스에게 체제의 변혁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체제의 바깥을 꿈꾸는 형이상학적 결단을 제안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그의 딸 요나(고아성)에 의해 기차의 벽은 폭파되고 연이어 기차 전체가 붕괴된다.
[신 전영객잔] 봉준호 바깥의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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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를 보고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 건 미국 현대사의 이면을 자기만의 독법으로 파고드는 이 내공 깊은 감독이 내리는 결론이 내게는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와킨 피닉스가 연기한 주인공 프레디, 누가 봐도 정신병자이거나 정신병자가 될 가능성이 짙은 남자를 감독이 긍정하는 것으로 봤다. 이는 프레디의 마스터였던 랭카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입을 빌려 그를 ‘마스터가 필요없는 남자’로 찬양하는 대사로도 드러나지만 이미지로도 느낄 수 있다. 영화 초반,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해군 갑판병인 프레디가 무료하게 배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이 이어질 때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이것저것 재료를 섞어 술을 만든 프레디가 만취해 배 꼭대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때 저쪽 아래 갑판 위의 다른 병사들이 먹을 것 등을 던지며 야유하는 광경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 시점 아래 프레디는 순교자처럼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조정할 수 없는 운명으로부터
[신 전영객잔] 실패자들 그래서 더 긍정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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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석유 시추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인생 노년은 아수라장이다. 그는 대저택을 지녔지만 그 안에서 외롭고 포악한 늙은이로 살고 있으며 오랫동안 키워온 양아들과도 방금 악담을 퍼부으며 서로 돌아섰다. 때마침 영화 내내 경쟁자였고 눈엣가시였던 젊은 사이비 기독교 교주 일라이(폴 다노)가 그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자 대니얼은 오래전에 그가 일라이에게 당했던 방식 그대로 모욕감을 갚아준다. 그러고도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해 일라이의 머리를 볼링 핀으로 두들겨 살해하고는 “내가 다 이루었다”(I am finished)고 읊조린다. 본론에서 펼쳐졌던 미치광이 사업가와 야욕에 찬 교주의 터질 것처럼 팽팽했던 대결은 그렇게 대단원에 이르러 전자가 후자를 해치우고는 상대방의 대표적인 교리 한 구절(“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을 마음대로 착취하며 끝나게 된다. 장대한 이 영화의 끝도 여기다.
이 라스트신은 벼락
[신 전영객잔] 이건 영화인가? 아니 이건 영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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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에 대한 꼼꼼한 통찰이 담긴 글들(김효선 “지금 여기는 지옥입니다”, 허문영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 김지미 “구원은 없어라”)을 읽었다. 그 통찰들을 능가하는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할 자신은 없지만, 하나의 질문만은 덧붙일 필요를 느낀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당신의 시선은 지금 영화 속 어느 자리에서 어느 곳을 향해 있는가? 영화를 보는 동안 이걸 묻지 않은 채, 관객인 우리가 마치 객관적인 자리에서 자본의 추상성, 권능, 환상을 보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인가. 혹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에 대한 근심으로 읽어내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위의 질문을 경유하지 않고 이 영화가 형상화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초월적인 자리에서 그 자본의 매커니즘을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유사한 착각일 수 있지 않은가.
허문영만이 이 영화에 대한 섬세한 비평의 결론에 이르러 ‘우리의 자리’를 의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크로넨버그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를 묘사하며
[신 전영객잔] 출구를 마련하지 않은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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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 주인공이 탄 리무진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 중심가가 느린 속도로 전시된다. 도시는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희뿌연 연기로 뒤덮인 거리를 소요 군중이 어지럽게 오가고 있다. 널뛰는 주가와 환율이 점멸하던 거리의 전광판에는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유령이
이상한 문구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고 썼다(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코스모폴리스>가 첫 소개된 지난해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마르크스의 이 문장을 인용하고, 이것이 자신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것은 “현 상태를 지양(止揚)해나가는 현실의 운동”(<독일 이데올로기>), 혹은 현재적인 자본주의 내부에서 엄청난 속도로 에너지를 비축 중인 파괴-창조적 잠재력, 혹은 자본주의의 바깥이며 피안이었다. 그러니까
[신 전영객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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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이하 <앤젤스 셰어>)를 본 뒤 남다은 평론가가 얼마 전 <씨네21> ‘신전영객잔’에 쓴, 최근 독립영화의 경향에 관한 편지 형식의 글이 생각났다. 나는 그 글이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글에 감동받아 필자가 가르치는 대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프린트해 나눠주려다 말았다. 대신 몇몇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그의 글을 언급하며 지적질을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앤젤스 셰어>를 보고 다시 남다은의 그 글이 떠오른 것은 관객과의 대화 도중 영화청년으로 보이는 한 패기있는 젊은이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는 종래의 켄 로치 영화와는 결이 좀 다른 이 영화가 나름 재미있고 연륜을 증명해준다고 한 내 말을 반박하고 그저 능숙함만 보이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국의 독립장편영화를 본 최근의 경험을 말하면서 남다은의 글을 인용했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무식하고 더럽고 게으른 쓰레기들…
[신 전영객잔] 이 루저들의 무심한 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