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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아이를 동정하는 마음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 아이를 하룻밤 내 집에서 재워주는 것도 쉽다. 이 아이는 선의를 베푸는 어른에게 처음엔 머뭇거리며 몸을 의탁하지만 차츰 매달리려는 기색을 보인다. 이러면 선의로 시작한 어른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이 <도희야>의 도입부 설정이다. 나는 그다음이 궁금했지만 예상보다 영화는 뭔가 답답했다. 그 이유를 찾고 싶은 게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나는 이 영화가 소심하며 어느 쪽으로도 깊게 들어가지 않고 주춤거리는 자세를 취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게 신중한 윤리적 태도로 섬세한 비평적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아이가 짐승의 시간을 살았으나 짐승의 내면을 드러낼 기회는 적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온당할 것 같다. 이 아이의 이름은 도희(김새론)이며 영화의 주인공이다. 도희는 의붓아버지에게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고 할머니에게도 인간
[신 전영객잔] 그들의 고통은 제대로 표현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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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존즈가 2010년에 만든 단편 <아임 히어>(I’m Here)의 주인공은 때묻은 구형 PC의 머리와 엉성한 기계 몸을 가진 로봇이다. 로봇들은 허드렛일을 하며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로봇이 날라리 여자 로봇을 사랑하게 된다. 여자 로봇이 클럽에서 춤추다 팔이 잘리자 주인공 로봇은 자기 팔을 떼다 붙여준다. 한쪽 다리도 그렇게 떼준다. 사고로 그녀의 상반신이 으스러지자 주인공은 자신의 몸마저 이식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로봇은 머리만 남은 주인공을 품고 휠체어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이 감상적인 단편을 이주노동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의 고단한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관심사가 거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2009년에 만든 장편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아이가 집을 뛰쳐나와 가는 곳은 투박한 동물인형처럼 생긴 괴물들이 살고 있는 섬이다. 스파이크 존즈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 같다
[신 전영객잔] 이제, 나 여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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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래, <한공주>에 대한 국내외적인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다수의 국제 영화제들에서의 수상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며, 국내에서 개봉한 지 20여일 만에 20만명 이상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분명 이 영화는 더 많은 관객의 주목을 끌며 더 많이 회자될 것이다. 평단의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다만 이들이 호평을 전제하면서도 영화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공통적으로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 주목할 만하다. 많은 장점을 열거한 뒤에도 이들이 망설이는 지점은 영화의 현재에 개입하는 플래시백, 특히 성폭행 현장이다뤄지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김혜리는 같은 소재를 이야기하는 다른 영화들과 이 영화의 차별성을 섬세하게 읽은 뒤 “그날의 재현이 감독의 의도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알맞게 통제됐는지”에 대해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한다(<씨네21> 950호). 혹은 정한석은 이 영화의 탁월한 면과 지지할 수 없는 면을 나눠 비평을 시
[신 전영객잔] 윤리와 폭력과 연민의 이상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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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공주>는 지극히 양가적 감정을 일으키는 영화다. 모두에게 그러한 건 아닐 테고 내게 그러하다. 게다가 그 양가의 감정은 당황스럽게도 비율조차 동등하다. 한쪽에 있는 건 영화에 대한 찬사의 마음이다. 이 영화는 찬사를 받을 만한 탁월한 면모들을 많이 지녔으므로 그건 조금도 아까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 있는 건 어떤 소수의 장면들에 공감되지 않는 마음이다. 그 장면들은 적게 등장한다 해도 강력하고 강력할수록 더 공감되지 않는다. 지지하고 싶은 영화, 공감되지 않는 장면. 이런 경우에 흔히 옳은 건 장단점을 묘파하면서도 더 깊은 심도를 지닌 탐구의 장으로 옮겨가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차라리 각각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걸 택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극단의 판단이 각각 동등하게 확연하다면 그 양가적 상태를 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옳진 않아도 솔직할 순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한 사람에 의해 제출된 찬/반의 비평문, 이라는 짧지만 모순적이기 이를
[신 전영객잔] 창의적 자극과 잉여의 이미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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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의 정재영과 <한공주>의 천우희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정재영은 <방황하는 칼날>에서 성폭행당하고 죽은 딸의 아버지 이상현으로 나온다. 천우희는 <한공주>에서 본인도 성폭행을 당하고 함께 폭행당한 절친한 친구가 자살한 사건으로 고통받는 한공주로 나온다. 그들의 표정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딸을 잃은 아버지 이상현은 종종 절규하지만 내내 넋이 나가있으며 복수에 나선 길에서도 유령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한공주는 언뜻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그녀가 표정을 보이는 순간은 친엄마나 아빠를 만났을 때, 또는 새로 사귄 친구의 호의에 힘겹게 반응할 때뿐이다.
두편의 영화 모두 선악 구분에 기초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 구도에 호소하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기초한 <방황하는 칼날>이 상대적으로 스릴러 문법에 더 가깝지만 이 두편의 영화에서 사건은 더디게 전개되는 편이
[신 전영객잔] 배우의 얼굴이 우리에게 말을 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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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폭력이라는 문제는 사실 생소한 화두였다. … 나에게는 그 폭력을 비주얼로 표현할 수 있는 영화적 언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개의 이야기 속 폭력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다루면 좋을지 그 마법의 언어를 찾지 못해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전 무협영화 한편, 즉 <협녀>가 생각났다. … 호금전은 영화에서 사회적, 경제적 상황 속의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에 반응하는지를 폭력이라는 언어를 통해 보여주었다.”(<씨네21> 906호)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천주정>이 공개된 뒤, 지아장커가 한 말이다. 급변하는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폭력 사건들, 그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네개의 이야기, 그리고 무협 장르. 영화를 보기 전, 감독의 인터뷰를 읽는 편은 아니지만 지아장커와 무협의 만남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인터뷰들을 먼저 읽고 말았다. <천주정>과 관련해 <씨네21>과
[신 전영객잔] 패턴화된 폭력이 지워버린 현실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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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노아>를 일반적인 재난블록버스터 혹은 종말론적 SF 범주의 코드로만 한정지어 말하는 건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이 영화의 매력을 거론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예사롭지 않은 특수효과가 돋보이는 장면이 많아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더 특별한 매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노아>는 전반적으로 볼 때 투박하지만 일면 기괴하다. 투박하다는 건 영화의 미진한 만듦새를 지적하기 위한 비판의 표현이지만 기괴하다는 건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질문들이 긴장감 있고 매력적이라는 호감의 표현이다. 지금은 그 질문들, 투박함보다 기괴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기괴함은 불균질함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불균질함은 신의 심판 이후에 인간의 심판이라는 예상치 못한 비약적 전개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영화가 신의 프로젝트 혹은 그걸 수행하는 인간의 모험극으로 끝날 것이고 더 나아간다 해도 거기 기발한 장르적 결합 정도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신 전영객잔] 세상을 멸하라고 누가 명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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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은 평판이 좋다. 올해 오스카 작품상을 받았으며, 김영진과 김혜리도 지난호(945호) <씨네21>에 호의적인 글을 썼다. 나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노예 12년>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있지만 관습적인 화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류영화라고 생각한다. 수작 혹은 범작. 서로 견해를 경청하는 평자들 사이에서도 이 정도의 견해 차이가 생기는 일은 드물지 않다.
다만 이 영화는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노예 12년>이라는 영화의 내용은 거의 거론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우리의 자리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 자리는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한편의 영화 앞에서 종종 잊는 종류의 상식에 가깝다. 다소 원론적이고 뻔한
[신 전영객잔] 진실이 고통 이미지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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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에는 두 차례의 인상적인 린치 장면이 나온다. 영화 중반, 원래 자유인이었으나 강제로 납치당해 솔로몬이란 이름 대신 플랫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주인공은 다소 온정적인 주인 포드의 호의를 사면서 그의 마음에 들어 언젠가는 자기 신분을 되찾을 희망을 은근히 품는데, 그의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산산이 찢어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자기를 무시하고 농장주의 환심을 샀다고 분노하는 젊은 백인 감독이 플랫을 사적으로 린치하려다 거꾸로 플랫에게 두들겨 맞자 동료 두명을 데리고 와 거대한 나무 기둥에 그를 묶고 죽이려 한다. 그보다 윗자리에 있는 감독관이 재산보호 차원에서 그들의 린치를 막은 뒤 플랫은 주인이 올 때까지 나무에 묶여 있는데 그의 다리는 겨우 진흙땅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거의 반나절 넘게 주인이 올 동안 올가미에 걸린 채로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는 플랫을 카메라는 오랫동안 응시한다. 풀숏으로 지켜보다가 역앵글로 바꿔 플랫을 근접화면으로 보여주
[신 전영객잔] 아프다, 방관자의 이 무기력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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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받아야 한다. 억지를 좀 피우자면 그가 <링컨>의 병사 중 하나로 나왔건 <레미제라블>의 시민 중 하나로 나왔건 상관없이 우리는 그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호프먼은 단지 영화 속 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영화 속에 있는 또 다른 한 세계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2013년 오스카 시상식을 앞두고 각 부문의 수상자를 예측하고 주장하면서 놀이하는 기분으로 썼던 기사의 일부다. 지나치게 명랑한 애정 표현이라도 너그러이 용인될 만한 축제의 자리라고 여겼고, <마스터>의 호프먼이 남우조연상을 받아야 한다고 우기며 그렇게 썼다.
거의 정확히 일년 전 그때에 지금과 같은 글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다. 다시 보니 저 표현은 명랑함보다는 맹랑함쪽에 가깝지만 도로 주워담지는 않을 생각이다. 호프먼의 죽음은 근래에 개인적으로 접한 가장 얼떨떨한 영화사적 사건 중 하나다. 그의 죽음은 피터 오툴의 죽음과 다르다. 그를 할
[신 전영객잔] 그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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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의 영화가 휩쓸고 갔다. 소위 1천만 영화가 이제는 1년에 한두편 등장하는 게 예사가 되었지만, 단기간에 전 국민의 5분의 1이 극장에 가서 같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단순한 일은 아니다. 대박 영화들의 운명이 모두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간판이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진다. 또 어떤 영화는 그것이 불러일으킨 집단적 감흥의 다층성이 공동의 의제가 되어 하나의 사회사적 사건으로 남는다. 극소수이지만 어떤 영화는 그것을 본 관객수와 무관하게 의미 있는 영화적 질문을 남기고 혹은 재발견의 과정을 거쳐 오래 되새겨진다.
<변호인>은 어떤 운명의 영화일까. 아마도 두 번째 범주에 가까울 것이다. 비평은 첫 번째 범주의 영화에는 대체로 무관심하며, 세 번째 범주의 영화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 범주의 영화들을 다루는 비평은 대개 그 영화의 사회적 파장을 잊고 텍스트의 미학적 자질에만 몰두한다.
비평이 제일 버거
[신 전영객잔] 그를 전설의 서사로 추어올리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