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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의 마지막 장면에는 밥 딜런이 나온다.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가 노래하는 가스등 카페에 르윈 데이비스 차례 다음으로 밥 딜런이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때, 르윈 데이비스는 밖에 정장 입은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걸어나간다. 르윈은 걸으면서 밥 딜런의 노래 모습을 본다. 르윈의 시점으로 밥 딜런이 보인다. 그는 “안녕”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밖에 나온 르윈은 전날 그가 무대에 오른 시골 할머니 가수를 실컷 모욕한 것을 복수하러 온 그녀의 남편에게 얻어터진다. 밥 딜런의 노래는 계속 화면에 흐르는데 르윈은 호되게 당하고 거구의 그 남자에게 “우린 빠질 테니 계속 시궁창에 살아라”라는 악담을 듣는다. 남자는 택시를 타고 떠나고 르윈은 프랑스 말로 작별 인사를 한다. 밥 딜런의 노래는 계속 깔린다.
르윈의 자기학대 같은 농담
이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조응하는 장면이다. 감독 코언 형제는 이 마지막 장면의 일부를 첫 장면에 옮겨놓고
[신 전영객잔] 힘을 내서 노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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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려고 산 반지를 저 멀리 바닷가로 던진다. 모든 걸 걸고 함께 도망치기로 약속했던 그녀가 헤어진 애인이 다시 돌아왔다며 남자를 배신한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남자가 운다. 그때 그의 주머니에서 장갑 한짝이 젖은 모래 위로 떨어진다.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는 남자의 착한 애인이 언젠가 준 선물이다. 남자는 눈물을 그치고 장갑을 줍는다. 모래 위에 처박힌 반지상자도 다시 집어든다. 그리고 송년파티가 벌어지고 있을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다급하게 집으로 돌아와 앉은 자리에서 남자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남자의 이 짧은 부재와 돌아옴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는 그의 애인이 해맑은 표정으로 거기 앉아 있다. 남자는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흐느낀다. 둘은 포옹을 하고 남자가 잠시 카메라를, 아니, 우리를 쳐다본다. <투 러버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홀로 견뎌야 했을 감정은 무엇
[신 전영객잔] 필연의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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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는
장률이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는 환경과 풍속의 필연적 관계를 고려하여 인물들의 허구를 조성하는 감독이다. 다만 작업의 착수 과정을 되짚어보는 게 필요하겠다. 만약 이방인이라는 주제어가 아니라 다른 것이 주어졌더라면 장률이 다큐 연출에 눈을 돌렸을 가능성은 얼마나 됐을까. 장담할 수 없다. 장률은 이방인이 주제어로 제시되자 평소에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았던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고 그들의 삶을 잘 알지 못하므로 극보다는 다큐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니라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최초의 사실이다.
모르기는 해도 장률은 중국에서 온 누군가를 네팔이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누군가보다는 훨씬 더 깊고 폭넓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충분한 제작 기간이 주어졌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풍경>의 등장인물 중에서라면 도축업에 종사하는 쉬첸밍과 같은 인물에 전적으로
[신 전영객잔] 풍경, 꿈,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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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의 에필로그 장면은 특이한 여운을 남긴다. 시위를 주동하다 구속된 주인공 송우석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들이 일일이 법정에서 호명된다. 당시 부산 지역 변호사들 가운데 절반 이상 숫자의 변호사들이 변호를 맡았다는 자막이 뜬다. 이 장면은 이상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실화에 기초했으나 굳이 그걸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전개되는 이 영화는 이 에필로그에 이르러 다시 한번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실화임을 확인시킨다. 그때까지 송강호의 송우석이었던 주인공에게서 노무현의 그림자가 강하게 얹히는 순간이다.
자연인 노무현을 존경했으나 대통령 노무현의 시대를 늘 불편한 심정으로 지냈던 나는 ‘국가는 곧 국민입니다’라고 울부짖는 영화 속 송우석의 사자후를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한 노 대통령의 말과 병렬시키기 힘들었다. 그것이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한계이자 한국 사회의 한계임을 인정해도 속이 쓰리는 건 마찬가지다.
권력을 쥐었으나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그의
[신 전영객잔] 영웅의 일대기에서 멈춰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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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은 장률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다. 다섯 번째 극장편인 <두만강>과 <풍경> 사이, 그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평론가 정성일과의 지난 인터뷰(<씨네21> 933호 “안개 속의 풍경”)에서 그가 말했듯,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거주지를 서울로 옮긴 것이다. 그의 지난 영화들을 돌아볼 때, 장률에게 장소의 이동, 변화는 거의 모든 것의 변화다. 그것은 삶의 조건과 태도뿐만 아니라, 영화의 형식과 리듬의 필연적인 변화를 예견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산다는 것. 사건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 그 차이가 <풍경>에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풍경>은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률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는 첫 영화가 될 터였다.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종종 예상치 못한 당혹감과 마주해야 했다.
[신 전영객잔] 장률의 마음이 선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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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확실히 <사이비>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나쁜 인간이 더 나쁜 인간을 응징한다. 물론 이 설정 자체는 새롭지 않다. 좋은 악인(good badman)은 거의 영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낯익은 캐릭터다. 적지 않은 영화들에서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이 관습적 영웅이 아니라 악인에 의해 추방되어왔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 <추격자>의 엄중호도 이런 좋은 악인의 계보에 속한 인물이다. <사이비>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민철은 거의 최악이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가족을 내팽개치고 몇달 동안 나타나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 수몰지구 보상금과 딸의 저축금마저 도박으로 탕진하는 파렴치한, 항의하는 아내와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무뢰배. 이 구제불능의 사내가 마을 주민의 수몰지구 보상금 전체를 횡령하려는 사이비 종교인/사기꾼과 대결한다. <사이비>의 특별한 점은 민철이라는 악인에게 최소한의 선한 동기
[신 전영객잔] 단단한 서사 속 불완전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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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가 되기란 어렵지만 좋은 시나리오인데도 나쁜 영화가 되기란 쉬운 일이라는, 영화계에서는 얼마간 통용되는 이러한 격언은 시나리오가 결코 영화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시나리오 무용론을 가리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나리오가 영화 완성의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공정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는 그 잠정적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루이스 브뉘엘 만년의 중요한 영화들을 함께했으며 그 자신이 대단한 학식과 재담을 갖춘 사람이기도 한 시나리오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는 그가 막 입문했을 당시 위대한 감독 자크 타티와 그의 편집기사에게서 배운 촌철살인의 교훈 한 가지를 끝내 잊지 못한다고 전하고 있다. 시나리오작가로서 영화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질문하는 타티에게 카리에르가 영화에 대한 추상적인 열정과 사랑만을 열거하자 타티는 편집기사를 시켜 카리에르를 편집실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편집실에서 편집기사가 한손은 시나리오가 적힌 종이를, 또 한손은 필름 릴
[신 전영객잔] 실종된 코맥 매카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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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화 감독의 <잉투기>에서 어른들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인터넷 격투기 동호회에서 ‘칡콩팥’이라는 아이디로 유명한 태식은 커뮤니티 라이벌이었던 ‘젖존슨’으로부터 대낮에 기습적으로 얻어터진 뒤 그걸 담은 동영상이 네티즌들에게 회자되는 공개망신을 당한다. 태식은 젖존슨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그를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단기 목표인 백수 잉여인데도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별달리 타박하는 기색이 없다. 자식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포기한 듯 보인다. 경매로 처분된 부동산을 접수하는 일로 돈을 버는 그의 어머니는 한국을 1%만을 위한 사회라고 원망하면서 코스타리카로 이민 갈 생각이다. 영화 후반에 태식이 ‘잉투기’라는 잉여들의 격투기 대회에 나가 젖존슨과 오프라인에서 재대결할 의지를 불사르며, 이제 뭔가 할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의지를 얻었노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이민 가지 말자고 부탁을 하자, 어머니는 부드럽게 거절하면서 그렇다면 그녀 혼자만 이민을
[신 전영객잔] 바보도, 괴물도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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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를 3D로 처음 보았을 때, 대체 무엇을 새롭다고 느껴야 할지 난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감을 이야기했지만, 그 실감의 정체도 모호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동일시 혹은 나비족의 판타지적 세계에 대한 동화를 의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3D 안경이 주는 멀미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튀어나오거나 창공을 가로지르는 이미지들이 나의 육체를 건드렸던 기억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이 영화의 서사적인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영화가 나의 육체를 통과하는 경험과 나의 육체가 영화 속 세계에 말초적으로 동화되는 경험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3D영화의 목적 아니, 효능은 결국 관객이 영화 속 세계 ‘안’에 있다는 완벽한 환영을 주는 데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궁극의 영화적 경험일까. 영화를 본다는 행위와 그 안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욕망은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를 3D로 보았을
[신 전영객잔] 카메라여, 당신은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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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비티>의 초반에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탐사선의 우주허블망원경을 수리하던 여성 우주비행사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은 위성 파편들의 습격으로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 쳐진다. 지지할 곳도 탐사선과의 연결선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의 몸은 텅 빈 우주 공간에서 빙글빙글 돌며 어둠이 깃든 지구 반대편 상공으로 빨려들어간다. 동료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와의 통신도 이제 끊겼다. 이곳은 지구의 600km 상공, 중력도 소리를 전달할 매개체도 없고 영하 100도를 넘나드는, 생명이 살 수 없는 공간이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 있다.
카메라는 라이언의 주변을 돌며, 방향도 속도도 짐작할 수 없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그녀의 육체와 함께 조난의 움직임을 체화한다. 그러다 한순간, 라이언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녀의 헬멧에 점점 가까워지더니 헬멧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눈이 된다. 이제 스크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속절없이 유영하는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 그녀의 눈
[신 전영객잔] 무중력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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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쓸 소재를 편집기자에게 문자로 알리며 처음엔 이렇게 적는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쓸게.’ 뭔가 좀 어색하다고 느껴서 잠시 멈춘다. 물론 영화 제목을 적은 것이라고 상대방이 모를 리 없지만, 몇초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랑에 빠진 것처럼 글을 쓸게’라는 뉘앙스로도 읽힌다. 부호를 추가한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쓸게.’ 그때서야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라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쓸게’라는 뜻으로 명료해진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조금 전의 문자로 보내고 싶은 엉뚱한 충동에 잠시 시달린다. 언어에서 부호라는 프레임은 의미에 봉사하므로 때로는 명료하지만 때로는 갑갑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프레임이라는 태생을 본래부터 지닌 영화는 이것을 능동적으로 이용할 때에만 애매와 모호와 열림의 순간들을 만끽한다. 이 사소한 문자 보내기의 경험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그의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보는 감상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
[신 전영객잔] 그 돌멩이가 깬 것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