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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오로지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영화 <기적의 시작>이 공영방송 KBS에, 그것도 광복절에 편성된다고 한다. 이 글이 나갈 시점엔 이미 전파를 타고 난 뒷일이 될 듯하지만, 본래 일정표로는 금요일인 <독립영화관>을 하루 앞당겨 추가 편성하면서까지, 제작진이 방송권 구매를 거부하자 담당 국장이 기안하여 전결하는 기괴한 방식으로, 끝끝내 방송을 고집하고 있다 하니 기가 찰 일이다. 역사에 무지한 광신도들의 기적(奇蹟)을 작위하기 위해 다수가 기함(氣陷)할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로 의도했던 건 실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 진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헛웃음을 자아내는 허구적 코미디가 아닐까 의심케 하는 대목 한 가지. 제작자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독립영화 인증을 신청했지만 영진위는 “객관성 결여와 설득력 있는 논증 제시 부족” 등을 이유로 인정을 거부했다는 것. 그런 영화가 공영방송 KBS의 <독립영화관>에
[정준희의 클로징] 기적의 시작, 파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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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조금도 난 겁나지 않아 - <FANCY>(트와이스, 2019)
종종 인천의 ‘인천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입을 떼기 전부터 실실 웃음을 흘리다가 상대가 반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인천이라는 도시의 저속함에 대해 쏟아낸다. 그들의 묘사 속에서 인천은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장소이며, 거칠고 더럽고 나쁘기만 한 동네다. 그러나 경계라 부를 만한 것도 마땅히 없는 작은 나라에서 어떤 지역이 특별히 거칠고 더럽고 나쁠 수 있는 확률은 몇이나 될까? 아랫동네 사람인 나는 별다른 계산 없이 떠올린다. 오직 멸시를 위해 거칠고, 더럽고, 나쁜 땅이 되는 수많은 고향들을. 그 생각 다음으로는 말이 지겨워진다.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전부 싫다.
송도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던 동안엔 남동공단에 집을 얻어 생활했다. 집값이 싸고 거리가 가까워 출퇴근은 편했지만, 동네가 너무 빨리 조용해져서 해가 저물면 괜히 겁이 나 집 밖으로 나가지 않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파티] 괜찮아 조금도 난 겁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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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 우울할 때 더 우울함으로 파고들어 바닥을 찍은 후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인 나는, 요즘처럼 현실이 버거울 땐 암울한 다크 판타지의 결정체 <베르세르크>를 종종 꺼내 본다. 여기 시궁창 같은 마을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가 있다. 소녀는 마을을 벗어나고 싶지만 용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동화처럼 요정과 광전사가 나타난다. 실종되었던 동네 언니가 요정이 되어 나타나자 소녀는 자신을 구원해줄 탈출구라 여기고 쉽게 따라나선다. 하지만 언니는 실은 요정의 모습을 한 괴물이었고, 이때 주인공인 광전사 가츠가 난입하여 괴물을 사냥한다. 그러자 소녀는 이번엔 가츠에게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광전사를 둘러싼 세계 역시 괴물들과 영원한 싸움을 이어가는, 끔찍한 지옥이다. 갈피를 잃은 소녀에게 가츠는 냉혹하게 내뱉는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종종 말의 앞뒤를 잘라 본래 의도와 달리 편의적으로 사용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한국이 싫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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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들른 박물관에서 봤던 개미들을 잊을 수 없다. 한구석에 얕게 물이 채워진 수조가 있고 그 안에 큰 잎사귀가 여럿 달린 나뭇가지가 꽂힌 유리병이 두어개가 놓여 있었다. 그 사이를 다리처럼 연결하고 있는 베이지색 굵은 로프와 함께 거의 모든 잎의 가장자리가 톱니바퀴처럼 뜯겨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이 전시물이 뭘까 의아해하며 가까이 가보니 수조의 한쪽에 뚫린 구멍을 두고 로프 위를 양방향으로 줄지어 가는 개미들이 보였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같기도 하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동하는 부품 같기도 했다. 잠깐 동안 진짜 개미가 아니라 혹시 ‘로봇 개미’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작동하는 자연을 보여주는 전시에 감탄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영상 촬영을 하다 보니 다른 모습의 개미들이 눈에 띄었다. 길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 끝쪽에 자기 몸집보다 큰 잎사귀 조각을 물고 모여 있는 개미 무리였다. 가만히 보니
[임소연의 클로징] 언캐니 밸리에 빠진 개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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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장에 다녀왔다. 소와 돼지를 죽이는 곳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도살장은 입구에서부터 외부인 출입이 불가능한데 이곳은 축산물시장과 접해 있어서인지 도살장 부지만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소와 돼지를 직접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구경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평소 습관대로 어슬렁거리며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느닷없이 돼지를 보았다. 소리가 먼저였을까 모습이 먼저였을까. 트럭에서 내리지 않으려는 돼지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 직원들은 전기봉으로 보이는 작대기를 들고 그들을 끌어내리려 애쓰고 있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축산동물이라 규정된 존재들을 만나는 순간에는 현기증이 난다. 평소 가까이서 볼 일이 없으니까. 마치 야생에서 코끼리나 기린을 보는 것 같은 경이감도 든다. 그 경이감은 이내 비참함으로 바뀌지만. 돼지들은 도살 전 대기하는 장소인 계류장으로 모두 들어갔다. 지금 비록 카메라를 들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에 좀더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
[장윤미의 인서트 숏] 도살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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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표지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희생>의 한 장면이다. 예술영화의 아이콘으로 불러도 손색없을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지만 정작 영화를 극장에서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나중에 비디오로 보긴 했지만 제대로 본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보면서 많이 졸기도 했지만, <희생>은 극장이란 공간의 제약을 필요로 하는 종류의 영화기 때문이다. 똑같이 졸아도 극장에서 시간을 놓치며 졸아야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영화. 이런 이유로 <희생>을 향한 찬사는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도시 전설을 연상시킨다. 예술영화를 향한 존중과 동경과 허세까지 포함해 <희생>의 아우라는 지난 30년 세월 동안 켜켜이 쌓여왔다.
<희생>이 8월21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국내 관객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표지에 싣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최초 개봉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나오지도 않고, 화제작도 아니기에 표지로 다루기엔 꽤 난감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지루하고 어렵고 낯설고 불편하여 마침내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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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병 제도는 전쟁과 군대로 인한 제반 논의가 특정 소수집단의 문제로 축소되는 체제다. 이에 반해 보편적 의무로 운영되는 징병제는 어쩔 수 없이 전 사회적인 관심사가 된다.”(‘징병제는 최선의 선택’, 정희진, <한겨레> 2013년 10월11일) 한때 징병제는 국민을 상명하복 질서에 총동원하고 전 사회를 병영화했다. 하지만 군에 대한 문민 통제가 뿌리내릴수록 징병제는 민주주의와 어울리게 된다. 병사 하나하나를 무사히 민간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 국가와 군의 가장 중요한 작전이 된 원동력은, 군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 온 국민에게서 나왔다.
한국 사회는 최근 연달아 작전에 실패했다. 지난 5월 수류탄 훈련 도중 훈련병이 사망하고 부사관은 중상을 입었다. 2019년 실수류탄 훈련이 부활했을 때 시민들은 토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또 어느 훈련병은 완전군장 차림으로 구보하고 팔굽혀펴기를 하다 숨졌다. 완전군장 상태에서는 걷기만 한다는 건 20여년 전 훈련소에도 있
[김수민의 클로징] 돌아오지 않는 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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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수프>의 엔딩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식은 음식은 미식의 세계에서 폐기 대상이다. 제철 식재료가 무르익는 계절을 기다렸다가 주방에서 준비와 조리에 몇 시간을 투자해도 코스 식사의 지속시간은 길어야 몇 시간. 순간을 위해 강도 높은 노동과 극도의 섬세함에 헌신하는 요리사를 다루는 오늘날의 인기작들이 퍽 전투적인 까닭도 이해가 간다. 대표적으로는 <보일링 포인트>(2021)와 <더 베어>(2022~) 시리즈가 있다. 전쟁터로서의 주방 재현에 충실한 이들 영화는 속도가 중요한 요리전에 걸맞게 카메라를 채찍처럼 휘두르고, 그보다 빠른 칼날 같은 편집으로 주방을 해부한다. 폭발하는 감정과 고함 소리로 동요하는 일도 예사다. 그에 비하면 트란 안 훙 감독의 새 영화는 다분히 시대를 역행하는 작품이다. <프렌치 수프>의 진원지가 19세기 프랑스 전원저택 1층에 자리한 커다란 주방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입부부터 무려 40분 동안 하나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초월에 필요한 시간, <프렌치 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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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가을 어느 날, 아빠가 급하게 날 깨웠다. 얼른 나와보라며 재촉을 했다. 비몽사몽 거실에 나갔더니,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생명체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인지하기까지 몇초가 걸렸다. 뭉크. 나의 반려견. 다리가 짧아, 힘겹게 한발 한발 내디디며 나에게 다가왔던 뭉크는, 얼른 온기가 필요한 듯 내 품에 자리를 잡고 쉽게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뭉크는 2014년 우리 집에 선물처럼 나타났다.
꼬물이 시절과 사뭇 다르게 현재 약 30kg 나가는 뭉크는, 움직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어디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존재감이 상당하다. 어디에선가 에너지가 느껴져서 돌아보면 뭉크가 있다. 보통의 강아지 같은 경우, 간식을 꺼내면 바람같이 달려오지만 뭉크는 본인이 있던 자리에서 침을 흘리며 간식을 한번 쳐다보고, 날 한번 쳐다본다. 굳은 인내심으로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면 결국 나는 이기지 못해 뭉크에게 간식을 대령해준다. 뭉크는,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본인에게 오게끔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뭉크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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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실을 이길 수 없다, 는 말이 이렇게 와닿은 적 없는 7월이었다. 7월1일, 시청역에서 발생한 끔찍한 교통사고는 9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7월11일, 긴급방송으로 진행된 1060만 유튜버 쯔양의 피해 사실 폭로는 그의 밝은 에너지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이어지는 고발 속에 사람들은 사이버 렉카들의 추악함이 상식 선 따윈 가뿐히 넘어설 수 있음을 확인했다. 7월13일, 홍명보 국가대표 감독의 기습 선임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빗발쳤다. 이번 사태의 파장이 축구 팬들에 그치지 않는 건 책임지지 않는 결정권자에 좌우되는 우리 사회의 불공정, 불투명한 시스템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7월24일, 법인카드 유용의 신세계를 보여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청문회는 현 정부의 현실 인식을 단적으로 표상한다. 이윽고 7월31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에 이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의 임명은 사실상 도덕적 파탄 선언이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도파민 중독 사회, 뜻밖의 해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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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다. 카를 마르크스 하면 ‘자본주의의 붕괴’다. 소스타인 베블런 하면 ‘과시적 소비’다. 하지만 <국부론>에는 ‘보이지 않는 손’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자본론>에는 ‘자본주의의 붕괴’ 이야기가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유한계급론>에서 정말로 중요한 개념은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모방적 소비’다.
‘과시적 소비’의 아이디어는 꽤 널리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 피지배계급과는 다른 종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실제 생활에는 전혀 쓸데가 없는 품목에 엄청난 돈을 지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품목들– 예를 들어 1억원짜리 ‘만수르 세트’- 에 물 쓰듯 돈을 쓰는 소비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조금 험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돈지랄’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꼭 들어맞는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유
[홍기빈의 클로징]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모방적 소비'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