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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인터넷 게시물에 유독 ‘대유쾌 마운틴’이라는 밈이 자주 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로봇공학 분야의 오래된 이론인 ‘언캐니 밸리(불쾌한 골짜기) 가설’에 따르면 인공물은 어설프게 인간을 닮으면 오히려 불쾌감을 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가상인간의 이미지가 실제 인간의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잘 만들어져서 더이상 불쾌감을 주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그 표현을 사용했다.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와 드디어 산 정상에 도착한 이들의 쾌감과 흥분이 느껴졌다.
신나 하는 사람들을 보며 괴로웠었다. 그들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 속 인간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연령대, 얼굴과 표정, 몸짓, 그리고 복장 등 모든 것이 비슷비슷한 여성들. 그곳에는 쇼트커트를 한 여자도, 주름진 얼굴로 흰머리를 쓸어 올리는 여자도, 정장 차림을 한 여자도, 땀 흘리며 달리는 여자도, 기골이 장대한 여자도, 중장비를 운전하는 여
[임소연의 클로징] 딥페이크 딥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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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동네의 문턱을 넘던 날이 기억난다. 성매매 집결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러 군데인데, 진입로마다 ‘미성년자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고 안쪽이 잘 보이지 않도록 반쯤 가림막을 쳐두었다. 일부 구간은 펜스와 오동나무로, 골목의 하늘은 빨간 천막으로 가려두었다. 곧 초여름으로 접어들 시기라 땀이 좀 났는데 그늘진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가 좋았다. 나도 통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못 되는지 문턱을 넘을 때 살짝 긴장이 됐다. “손님이 많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어깨를 치며 다녀야 할 정도”로 혼잡한 골목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길이 좁기도 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저 앞만 보고 직진해야 할 것 같은 좁다란 골목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어느 순간 내 움직임이 의식되면서 걷는 행위가 좀 부자연스러워졌고, 주변이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여기저기 둘러보는 건 실례일 듯해 자꾸 방황하는 시선을 최대한 앞쪽이나 아래에 붙들어두며 걸었다. 빨간 천막에 난 구멍에서
[장윤미의 인서트 숏] ‘캣맘’ 활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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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 걸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깨달았다. 일요일 아침마다 숙제처럼 찾아오는 중요한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아침 8시에 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볼 것이냐, 아니면 조금 더 늦잠을 잘 것이냐를 두고 매번 흔들렸다. 사실 뭘 골라도 상관없었다. <디즈니 만화동산>을 선택한 날은 “이번주는 별로네, 잠이나 더 잘걸”이라며 후회했고 늦잠을 택한 날은 놓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시무룩해지는, 예정된 아쉬움의 반복이었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던 건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느 쪽을 골라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먼저 떠오르는 ‘후회형 인간’인 나는 지나온 길을 곱씹고 되돌아보는 습관을 기본값으로 장착했다.
간혹 왜 그런 식으로 인생을 낭비하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언해주는 이들도 있다(특히 명절 때만 보는 먼 친척들). 솔직히 고백하자면 걱정해주시는 것만큼 상황이 나쁘진 않다. 스무살 무렵에는 질척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소년 시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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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인가?” 기사에 적힌 그의 나이가 낯설다.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 지회장. 2015년 아사히글라스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원청은 하청 기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서울에 직장이 잡히면서 내가 구미를 떠나던 무렵이다. 이후 그는 내 머릿속에서 옛날 그 나이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최근 대법원은 원청이 해고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9년 투쟁 끝에 그들은 원청 정규직으로 복귀했다.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태 당시 바로 옆 공장 아사히글라스는 작업을 강행했다. 차헌호는 이를 세상에 알린 제보자였지만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노동자는 서너명이었다. 그 공장은 불량품을 만든 노동자에게 빨간 징벌 조끼를 입히는 곳이었고, 구미 4공단은 민주노조의 불모지였다. 소수 인원으로 노출되면 노조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반면 당시 지방의원이던 나의 활동은 노골적이었다. 집회에서 때로는 노조 간부보다 더한 강경 발언을 해 지역 재계
[김수민의 클로징] 두 세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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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기의 은밀한 매혹 중 하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실천하기 두려운 파국적 상상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극한의 황홀과 흉포한 실망을 경험하는 스크린의 얼굴들은 잔뜩 취약해져 있거나 비틀거리기 일쑤다. 나는 영화예술의 친밀하고도 위험한 이 속성이 한 사람에게 세례처럼 쏟아지는 것을 본 적 있다. 1965년 촬영한 <얼굴들>부터 <사랑의 행로>(1984)까지 존 카사베츠 감독이 연출한 6편의 영화들 속 배우 지나 롤랜즈를 통해서다. 고객 앞에서 사랑을 연기하는 성노동자(<얼굴들>), 고집 센 중년의 미혼 여성(<별난 인연>), 우울과 절망에 빠진 노동자계급의 주부(<영향 아래 있는 여자>), 알코올중독에 빠진 배우(<오프닝 나이트>), 남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마피아 정부 (<글로리아>)와 같이 롤랜즈는 언제나 모범으로부터 멀리 달아난 인물에 적역이었다. ‘창녀와 정부, 아내와 노처녀, 여동생과 여배우’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고장난 영혼의 빛, 지나 롤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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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의 노래 <내게 사랑은 너무 써>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어리거든요. (…) 한 잎 지면 한 방울 눈물이 나요. 슬픈 영활 보면 온종일 우울해요.’ 이 노랫말은 세상의 감동에 쉽게 마음이 일렁거릴 수 있었던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는 카타르시스 중독자였습니다. 밤 늦도록 인터넷 세상에서 알게 된 슬픈 노래와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고, 울음이 주는 쾌감에 빠져 점점 더 강도가 강한 감동을 찾으며 즐겼습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해소되는 듯한 그 감각은 약간 중독성이 있었습니다. 흡사 매운 볶음면을 먹는 이야기 같기도 하네요. 매운 음식 역시 통각의 카타르시스가 있는 장르이지요.
감동은 마치 짜릿한 전기처럼 몸과 정신의 어딘가로 흘러갔습니다. 마음의 전선은 대체 무슨 방식으로 작동하는 걸까요? 어떤 이야기는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뭔가 제 이야기 같진 않아서 마음을 스쳐 지나갔고요, 다른 어떤 노래는 시시콜콜하고 보편적인데도
[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마음이 가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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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할 때 나의 모습을 좋아한다. 호기심을 잔뜩 안고 시작해, 푹 빠져들어 정신없이 헤엄을 치고, 아파하기도 많이 아파하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부분들을 포착하게 되는, 이 ‘연애’라는 여정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고 풍만해지는 이 시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 외의 다른 것들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땐 무턱대고 아팠던 일들이 지금은 참 이쁘다고 느껴진다. 정말 웃기다. 기억나는 약속들이 몇 가지가 있다. 대부분 바보 같은 약속들. 가령, “태풍이 강타한 날 여기서 꼭 입맞춤을 하자!” 혹은 “화이트와인을 한번에 세 모금 이상 마실 땐 꼭 눈을 질끈 감자!”와 같은. 그런 약속들을 한 데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웃기 위해 했던 것 같다. 대부분 지켰다. 유치하고 뜬금없다고 키득대다가도 폭풍우 속 키스를 하는 와중에는 누구보다도 진지했고, 화이트와인을 들이켤 때에도 필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장마 때였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내렸고, 그때 당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주제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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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현역 시절 일어난 일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김연아 선수의 한마디를 처음 들었을 때 ‘우문현답’이란 고사성어를 재연드라마로 시청하는 기분이었다. 격언 탄생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마주하며 실력을 갈고닦아 경지에 오른 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저런 걸까 하는 경탄과 다른 사람도 아닌 ‘김연아’의 말이니까 가치를 지니는 거 아니겠냐는 배배 꼬인 심보가 동시에 교차했다. 더위에 지친 탓인지 요즘 부쩍 ‘이걸 꼭 해야 하는 걸까’라는 잡념 속에 피곤한 나날이 이어지는 중이다. 더 편한 길이 있는데 괜히 사서 고생하는 것 같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는 바보짓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는다. 그럴 때 문득 ‘그냥 하는 거지’란 말이 떠오르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할 일을 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마감에 허덕이는 목요일, 유튜브 쇼츠로 잠시 도망쳐 이런저런 영상을 뒤적이다가 오래전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법정 스님을 봤다. ‘우리는 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잃어버린 의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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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한때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었던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파괴, 테러, 방화, 무질서 등 부정적인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아나키즘은 19세기 이래로 폭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운동의 한 조류로서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도 이를 공산주의 이상으로 과거의 유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유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등 기존의 거의 모든 정치적 이념이 파산하거나 거의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에서 아나키즘은 대단히 매력적인, 아니 어쩌면 거의 유일의 출구가 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아나키즘은 그 장구한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은 면모를 띠고 변해온 사상이기 때문에 파괴, 테러, 무질서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나키즘을 정의하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한마디로 ‘소외된 일체의 외적 권위에 대한 거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신도, 주인도 없다’(No God, No Master)라는 간명한 구
[홍기빈의 클로징] 아나키즘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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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킬링 타임’을 위한 블록버스터영화에서 과학 논리는 어느 정도 엄밀해야 할까. <트랜스포머>는 여러모로 견디기 힘든 영화였지만 가장 보기 괴로웠던 장면은 극 중 분석가가 외계 로봇의 흔적을 두고 “이 신호 패턴은 스스로 학습하면서 자체 진화하고 있으므로 푸리에 변환을 넘어 양자역학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원래 양자역학에서 쓰는 게 푸리에 변환인데 무슨 소리지? 왜 같은 말을 두번씩 하면서 있어 보이는 척을 하지? (끝까지 보고 나니 심지어 영화가 엉망진창인데?!?!) 즉, 아무 말이나 한 거다. 이런 대사를 마주하면 영화를 호의적으로 보려고 애쓰다가도 갑자기 튕겨져 나오게 된다.
토네이도 재난을 다룬 <트위스터스>는 <트위스터>(1996)의 28년 만의 후속작이다. 얀 더본트 감독이 <스피드>의 대성공 이후 연출한 <트위스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토네이도를 쫓는 스톰 체이서들의 삶의 태도를 삼각관계
[임수연의 이과 감성] 블록버스터영화에 과학적 자문이 왜 필요한가요?, <트위스터스>가 토네이도를 길들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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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지켜줄게. 넌 혼자가 아니야.” 극장 가가 ‘하츄핑’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개봉 3주차 누적 관객 70만명 돌파를 앞둔 국내 애니메 이션의 돌풍은 좋은 기사 거리이긴 하다. 아이들 때문에 갔다가 엄마아빠가 울고 나왔다든지, 공주 분장을 하고 관람하는 아이들이 캐릭터 대사 하나하나에 답하며 스크린과 대화를 나눈다는 에피소드는 건너 듣고 있으면 꽤 재미있다. 다만 ‘하츄핑’ 열풍의 실제 당사자가 되면 강 건너 불 보듯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것이 다. 사랑에 빠진 존재 옆에서 동행한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지 마시길. (언론 시사도 제대로 못 챙겨보는 내가 <사랑의 하츄핑>을 이미 2번이나 봤다.)
‘애니메이션 애호가’ 입장에서 기분 좋은 소식 사이사이 이상한 포인트로 어그로를 끄는 기사들이 보인다. ‘<리볼버>, <하츄핑>에 참패…’, ‘<하츄핑>, 전도연 이겼다’ 같은 제목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
[송경원 편집장] 이해와 애정의 상관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