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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들의 전쟁
‘제일제당이 <춘향뎐>의 ‘흥수’를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일까? ‘제일제당이 <춘향뎐>의 배급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배급(권)을 ‘흥수(興手)’라 불렀다. 배급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손이라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유통구조에서 배급은 흥행을 판가름하는 관건이다. 노점에서도 물건 진열을 잘해야 하나라도 더 팔 수 있듯, 영화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선 상영관 확보가 절대적인 조건인 것이다.
한국영화의 새해맞이는 극장을 둘러싼 ‘배급전쟁’으로 유쾌하지 않았다. <박하사탕> <거짓말> <행복한 장의사>가 1주일 터울로 개봉하면서 극장 다툼을 벌였고, 잘나가던 <해피엔드>가 중도하차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의 횡포나 독선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어서 모두 말을 아끼면서 어벌쩡 봉합되긴 했지만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소지는 상당히 크다. 결과적으
영화 배급전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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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세계의 운명은 오직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초반부터 한바탕 실력을 보여준 그는 이제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러 갈 것이다. 아름답고도 이국적이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혼자 가긴 외로울 테니 어딜 가든 파트너가 따라붙는다. 이왕이면 비키니를 입은(완전 누드여선 ‘품위’가 없으니 곤란하다) 팔등신의 미인이면 더 좋겠지. 그렇다고 새로 개발된 무기를 챙겨가지 않는다면 프로가 아닌 법. 그의 앞에는 세계를 집어삼킬 야욕으로 불타는 다분히 천재적인 악당이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결국 승리는 그의 차지. 하늘을 찌르는 폭발을 뒤로하고 그는 새 파트너와 함께 유유히 악당의 숨겨진 요새를 벗어나온다. 마지막으로 사랑스런 파트너와의 파티타임. 그런데 이 소중한 시간에 ‘M’이란 작자는 눈치도 없이 웬 전화질이람.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맞춰보라는 건 퀴즈 축에도 못 든다. 영화나 소설을 봤건 안 봤건, 또는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든 아니든, 어쨌든 제임스 본
그는 세계의 운명을 지고 있다,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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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일이다, 내 인생의 영화라니. 거창하게 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 목록을 따로 간직하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서 곤혹스런 일이다. 사실 나는 각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거나 나름의 시선에 따라 특정 영화에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남들 4년 다니는 대학(연극영화과)을 무려 ‘10년’이나 다녔고,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영화일을 시작한 지 8년 가까이 됐지만 가슴 속에 따로 고이 담아둔 영화 몇편이 없다는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제작소 청년이나 예술실험영화전용관을 운영했던 동숭아트센터에서 일했던 이력 때문에 종종 예술영화를 각별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는다. 하지만 나는 잘 만든 상업 영화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사랑 영화를 좋아하며, 사랑 영화 중에서도 ‘촌스럽게도’ 슬픈 사랑 영화를 제일로 꼽는다. 따라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슬픈 사랑 영화를 고르면 남들이 말하는 내 인생의 영화에 해당하는 셈이다.
‘준비되지
[내 인생의 영화] 너무나 슬퍼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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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다.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 이 정도 코미디 연기는 그의 이력에는 차고도 넘친다. 크리스 콜롬버스 감독? <나홀로 집에>나 <스텝 맘>을 만드는 재주와 시나리오 작가의 역량은 살만하지만 끌리는 감독은 아니다. 원작자는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이라는 좀 딱딱하게 들리는 원칙을 세운 인물이다. 또한 자신이 세운 이 법칙을 바탕으로 ‘로봇’에 관한 소설들과 과학 이야기들을 펼쳐 보인 기념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SF소설가 정도로 알려진 아이작 아시모프는 1976년에 <바이센테니얼 맨>이라는 중편 하나를 썼다. 지면상 옮길 수는 없지만 아시모프는 마치 화두처럼 소설의 서두에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을 써놓았다. 원작은 이후 이 법칙을 바탕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간다. 앤드류는 이 법칙의 지배를 벗어나 법정 투쟁을 불사하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윤색과정에서 ‘로봇 공
로봇과 인간의 사랑, <바이센테니얼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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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전사>는 피와 살점이 튀는 활극이지만, 서사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실존인물 아메드 이븐 파들란의 모험담을 토대로, 마이클 크라이튼이 펴낸 소설 <시체 먹는 사람들>이 영화의 원전. 따라서 이야기는 북구인의 삶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아랍 시인 아메드의 순진한 시점에서 전개된다. 북구의 오지를 삶의 터전으로 나눈 바이킹의 선조들과 식인 부족들의 대결 구도 사이에서 그가 전사의 용태를 갖춰가는 과정엔, 서로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이뤄지는 교환수업의 의미가 보태진다. 아랍인은 북구인에게 글의 쓰임새와 일신교의 의미를, 북구인은 아랍인에게 자기방어의 능력을 일깨워 준다. 우정과 의리는 민족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해묵은 주제와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강렬한 요소는 역사적인 맥락이나 배경도, 신의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비장미와 역동감의 전투신이다. 안개 속에 펼쳐지는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장대한 숲과 벌판, 500여명의 기
전형적인 마초적 세계관, <13번째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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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우드의 B급 SF 영화에 대한 기억에서 <에드 우드>와 <화성침공>을 끄집어낸 팀 버튼이 이번에 들고나온 발명품은 해머 공포 영화의 이미지로 채색한 <슬리피 할로우>다. 50∼60년대 영국 영화사 해머 프로덕션은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 미이라 등 30년대 미국 유니버설 공포 영화 캐릭터들을 소생시켜 인기를 누렸다. 팀 버튼은 그 시절 해머 영화의 특징인 기괴하면서도 로맨틱한 이미지를 머리없는 귀신 호스맨의 전설에서 찾아 환상적 세트 위에 펼쳐놓는다.
괴담을 구성하는 요소는 단순하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주인공이 있고, 댕강댕강 목을 치는 무서운 귀신 호스맨이 등장하며, 주인공을 매혹시키는 신비의 여인이 끼어든다. 하지만 정색을 하고 덤비는 해머 공포 영화와 달리 팀 버튼은 어깨에 힘을 빼고 조니 뎁을 코믹하게 만든다. 애당초 명탐정이 되기엔 겁이 너무 많은 주인공 크레인은 놀란 토끼눈을 한 채 꺼벙한 표정을 지으며 요란스런 모양에 비해 별
잔혹함과 순수함이 어우러진 팀 버튼의 마을, <슬리피 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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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오직 어머니만이 슬퍼할 것이다.”(롤랑 바르트) 망자(亡者)로 인해 삶의 궤도를 바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여기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예외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이처럼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한 어머니, 그녀가 상실의 슬픔을 더욱 숭고하고 폭넓은 사랑으로 승화하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죽은 아들의 빈 자리를 메우려는 노력 속에서 타인에 대한 헌신을 실천하는 주인공 마뉴엘라의 이야기는 꽤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어느덧 50줄에 들어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역시 어머니의 원숙함을 체현한 탓일까? 그의 13번째 장편 영화인 이 작품이 이른바 알모도바르적이라 불리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에 일종의 평정(平靜)의 미학을 덧씌워주고 있는 것이. 예컨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알모도바르 특유의 알록달록한 야만적인 원색주의는 온
상실의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하는 여정, <내 어머니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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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의 줄거리를 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한국에서 중등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야기, 불멸의 고전 <춘향전>을 영화로 만든다는 건 그래서 대단한 모험이다. 줄거리야 이미 뻔하고 게다다 수십번 영화로 TV드라마로 재탕돼온 이 오래된 이야기에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게 아직 남아 있기나 한 걸까. 임권택 감독은 조상현씨의 판소리 완창 ‘춘향가’를 듣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어떤 좋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영화 만드는 일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 그 느낌을 자기 안에 가둬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귀에서 판소리가 계속 윙윙거려 임 감독은 결국 영화 <춘향뎐>에 손을 댔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문제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었다. 판소리의 리듬과 감흥을 판소리 자체보다 훨씬 뜨겁게 살려내는 방식. 임 감독이 택한 길은 판소리와 영화의 경계를 없애는 것, 그래서 판소리의 효과를 끌어오는 게 아니라
한국적 영화미학, <춘향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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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이 코너에서 나는 한 극장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려 했었다. <박하사탕>을 1개관에서라도 장기상영할 수 있도록 그의 양식에 호소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관객이 늘면서 개봉관이 늘게 된 것이다. 시장이란 기본적으로 대자본가가 다루기 편하도록 설계된 제도이지만, 아주 가끔 그 힘관계를 교란하는 작은 반란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은 음흉한 만큼 건강하기도 한 것이다. <박하사탕>이 개봉관을 줄여가다가 설에 극장가에서 사라져주기로 돼 있었고, 그것은 소프트웨어 공급자와 배급사의 힘관계에 의해 예정된 코스였으나, 뜻밖에 관객의 힘이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배급업자와 극장주들이 반드시 좋은 영화 편은 아닌 다음에야, 시장 속에서 ‘좋은 영화 볼 권리’를 유린당하지 않으려면 대중도 스스로 저항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박하사탕>은 그 흥미진진한 사례다.
<박하사탕>이 전폭적인 호평에 휩싸이자 짐
[편집장이 독자에게] <박하사탕>을 볼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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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면 공짜 좋아한다’는 말은 이 아저씨에게도 예외가 아닌 모양인지 하루 전에 전화를 받고 토요일 오후 서울의 중심으로 달려갔다. 목적지는 영화 <박하사탕>의 특별 초청 시사회장이었는데, 전해 들은 바로는 초대 대상이 ‘30대 이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라고 했다. 뜻하지 않게 ‘리더’도 되었고 난생 처음 ‘리셉션’이라는 자리도 갖는다니 기회를 놓칠쏘냐.
‘한국사람들이 제시간에 시작하겠어’라는 느긋한 생각으로 20∼30분 늦게 도착한 극장(아니 공연장) 안의 객석은 사람들로 빼곡이 차 있었다. ‘공짜 좋아하는 한가한 오피니언 리더들 꽤 많네’라는 생각 한편으로, 선 채로 영화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라도 빈틈은 있는 법, 앞에서 세 번째 줄에 빈자리가 시야에 들어왔고,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리 있나요”라고 물어본 뒤 침묵은 수긍이라는 판단으로 염치없게 자리에 앉는 순간, 옆에 앉은 관객은 마치 ‘지하철에서 자리만 나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박하사탕> 공짜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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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결혼한 신부와 함께 마을을 떠나려던 보안관 윌 케인은 나쁜 소식을 전해듣는다. 그에게 복수하기로 맹세한 악당들이 정오에 마을로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도망치면 그뿐이다. 그러나 그는 악당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을사람들의 반응이다. 예전에 그가 악당들을 잡아넣었을 때에는 환호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무도 그의 편이 되려 하지 않는다. 홀로 맞선다면 승산 없는 싸움이다. 그는 과연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스크린타임과 리얼타임이 일치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색적인 서부극 <하이 눈>이 던진 질문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되돌려주는 대답은 예스! 보안관은 악당들을 모두 처치하고 신부의 사랑을 되찾으며 자부심에 가득찬 채로 마을을 떠난다. 윌 케인처럼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선 사내들의 운명은 <하이 눈>의 작가 칼 포먼이 평생토록 탐구한 테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영화의 엔딩에서 그가 예스라는 대답을 되돌려준 것은
[할리우드작가열전]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선 사내들, 칼 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