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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엔트랩먼트> 국내 최고의 도둑 남기남
[정훈이 만화] <엔트랩먼트> 국내 최고의 도둑 남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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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네트가 별을 덮고, 전자와 빛이 뛰어다니며, 국가나 민족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정보화해 있는 근미래. 신기술을 이용한 고도의 살상과 파괴 행위가 만연하자, 동아시아의 어느 가상국가에서는 사이버 네트와 공안관계의 특수테러를 전담하는 경찰 조직인 속칭 ‘공각기동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 조직은 몸의 상당 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반인 반로봇의 특수요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의식을 조종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형조종사와 맞서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인형사의 음모는 분쇄되지만, 대원들 중 대다수가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입고 만다.
“바트, 팔다리가 없으니 시원하겠군.” 부상 병동에 누워 있는 토그사는 낄낄거리며 말을 걸지만, 자기의 아랫도리도 완전히 날아가버리고 만 신세다. 바트 역시 입만은 멀쩡하다는 걸 보여준다. “너희 마누라가 좋아하겠어. 이혼할 확실할 핑계가 생겼으니 말야.” “무슨 소리야. 이제 최신형 아랫도리로 ‘빠방’하게 장착할 텐데. 아마 매일 밤 죽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공각기동대 II - Ghost In the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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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캐스팅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별들의 고향>도 그랬고, <어제 내린 비>도 그랬고 <너 또한 별이 되어>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 <바람 불어 좋은 날>,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현실 도피처럼 신인을 찾았다. <어둠의 자식들>에서도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은 수없는 오디션을 거쳐 방숙희라는 신인을 찾아냈다. 생김새와 연기력 모두 작품에 잘 맞는 신인이었는데 무엇보다 ‘카수 영애’라는 부제가 말하듯 가수 지망생 역할이어서 가창력이 필요했다. 그 점에서도 합격이었다. 나는 한국영화의 아버지 나운규 감독의 성을 따와 그 신인에게 나영희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 영화에서 약 2시간가량, 얼굴 클로즈업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를 속속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영화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괴로운 일이다. 마오쩌둥과
이장호 [41] - 나의 신인중독증, <어둠의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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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한텐 다섯장만 샀다고 거짓말하고 열장 사서 꼭꼭 숨겨두었던 밀레니엄 복권이 꽝나고 만 지금, 아줌마는 다시 몇장 배춧잎 앞에 충성맹세하고 비상근무중이다. 아니, 사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창 비상근무중이다. 아줌마도 <비상근무>(Bringing Out the Dead)의 프랭크 피어스처럼 구급요원이기 때문이다.
프랭크가 인간의 헤벌어진 오장육부 같은 뉴욕 뒷골목을 헤매는 구급요원인데 비해, 아줌마는 자신의 미로 같은 오장육부 속을 헤매는 자신 목숨의 구급요원이라는 점이 다를뿐. 초기 프랭크가 그랬듯이 아줌마도 숱한 목숨 구했다. 열한살 아줌마, 열다섯살 아줌마, 열여덟, 스물, 스물다섯, 스물아홉, 서른… 그 많은 아줌마들을 구한 건 다 아줌마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타율 100%를 기록했을리야. 아줌마 또한 기술부족으로 숱한 목숨 죽였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산소주입기를 잘못 꽂아 열여덟 꽃다운 여인을 죽였다면, 아줌마는 정액주입기를 잘못 꽂아 숫처녀 아줌마를
[아줌마, 극장가다] 우리는 정말 살아 있을까, <비상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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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박하사탕>은 망각의 더께에 쌓인채 아득히 흘러가는 우리들의 오랜 기억들에 마치 면도날처럼 상처를 내었다. 면도날의 상처는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은 금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곧 그 금 사이로 붉디붉은 피가 점점이 배어나온다. 낡은 기차를 타면 떠오르는 얼굴들처럼, 그 역시 시간의 기차를 태운채 우리들의 현재가 서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해져버린, 이름조차 아물아물한 첫사랑의 그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70년대 학번이면 누구나 한번쯤 탔을 그 기차… 피와 눈물에 젖은 청춘들이 우울한 날개를 접고 ‘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가면…’라는 샌드페블스의 노래에 실어보냈던 그 검고 흰 추억들을 실은 야유회행 기차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이창동,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매서운 눈
나는 이창동이 뛰어난 영화감독으로 다시 태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그가 소설가였을 때부터 알고 있다. 그는 흥분 잘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나와는 과가 다른 인간이다
거꾸로 비친 우리 삶의 황무지, <박하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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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UFO 떴다
누구나 다 아는 전설이 팀 버튼식으로 변하기까지
팀 버튼은 의뭉스럽다. ‘1799년 뉴욕’이라는 설명을 달아 마치 <슬리피 할로우>가 역사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양 착각하게 하지만, <슬리피 할로우>는 지상에 없다. 팀 버튼의 주인공들이 현실세계에 안착하지 못하듯 그는 언제나 현실 밖에 이상한 나라를 만들어왔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그 나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기폐쇄적인 세계(singular self-enclosed world)다. 마치 이미지의 독재자처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믿음대로 그 나라를 통제한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그러하듯, 팀 버튼의 영화는 무엇보다 먼저 화면 그 자체를 살펴야 한다. 표면을 읽음으로써 심층을 헤아리는 게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가능하다.
스타일화한 자연주의, 모순된 세계를 찾아서
팀 버튼 사단이 다시 뭉쳐 만든 <슬리피 할로우>는 더 깊어진 팀 버튼의 비전을 보여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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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다는 게 나만의 고유함이 아닐까”
-<슬리피 할로우>의 시나리오에 끌렸던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좋아서인가, 아니면 비주얼의 가능성 때문인가.
=둘 다다. 디즈니의 58년작 만화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을 봐서 그런지 이 이야기가 낯익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기 전까지는 워싱톤 어빙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목없는 호스맨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안다. 시나리오가 해머프로덕션의 공포 영화를 연상시키는 것도 맘에 들었다. 난 동화나 상징성을 띤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시나리오에는 내가 좋아하는 전래동화의 감동이 있었다. 이 카보드 크레인이란 사내는 자기 머리 속에서만 살지만 호스맨은 머리가 없다는, 대조적인 설정이 특히 좋았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봤을 것 같은데.
=맞다. 물론, 비주얼로만 영화에 접근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캐스팅이나 세트 제작 등 고려할 게 많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3] - 팀 버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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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완수하는 영웅, 팀 버튼답지 않은 캐릭터
한편 <슬리피 할로우>는 외골수 팀 버튼의 영화로서는 놀랄 만큼 개방적이다. 미스테리의 얼개를 입은 앤드루 케빈 워커의 각본은 그의 어떤 전작보다 강한 스토리에 대한 집착을 영화에 심어놓았다. 썩어 부푼 시체, 잘린 머리를 채운 자루, 구더기 끓는 주검 같은 역한 이미지들도 <쎄븐>의 작가였던 그의 취향이다. 품위있는 위트가 살짝 발라진 대사에서는 각본을 가다듬은 톰 스토파드(<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지문이 묻어난다. 크레인 역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팀 버튼 영화의 히어로다. 크레인은 팀 버튼이 붙잡고늘어져 온, 정상성의 세계에 몸을 밀어넣으려다 거절당하는 아웃사이더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누구 못잖은 정신적 외상도 있고 컴플렉스도 깊은 인간이긴 하지만, 걸핏하면 졸도하고 큰 소리라도 날라치면 방금 구출한 여자 뒤에 숨는 심약한 남자지만, 어찌됐건 크레인은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는 일 없이 기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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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속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
“난 꿈은 잘 꾸지 않는다. 그저 낮 동안에도 넋이 몸을 스르륵 빠져나가 남들이 내게 하는 말이 들리지 않고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팀 버튼(42)은 그렇게 본인의 몸 안에도 다소곳이 갇혀 있지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영악한 두뇌들이 연산을 거듭해 내놓는 영화들의 각축장인 할리우드에서 <피위의 대모험>(1985)과 <유령수업>(88)으로 관객 동원력을 인정받고, 급기야 블록버스터 <배트맨>(9?)으로 흥행 감독의 왕관까지 쓴 것은 확실히 통쾌하고도 아리송한 일이었다. 더구나, 버튼의 영화에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굳이 구부리고 꺾은 자국도 거의 없다. 그의 초기 단편 <빈센트>나 <프랑켄위니>에 담긴 극히 사적인 내용과 병적인 상상력은, 상업 영화에서 도리어 더 큰 화폭과 풍성한 팔레트를 만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팀 버튼의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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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의 계보1 - <비비스 앤 버트헤드>
이런 무정부주의적 냉소도 다 계보가 있다. 93년부터 97년 사이 기분나쁜 웃음으로 MTV를 장악했던 <비비스 앤 버트헤드>의 얼간이 듀오가 이 꼬마들의 선배격이다. 결국 레지스탕스가 되고마는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꼬마들에 비해서는 백해무익한 건달들이긴 하지만. 미국 서부 교외 하이랜드의 허름한 집에서 사는 비비스와 버트헤드는 배운 것 없고, 할 일 없고, 돈도 없는 10대 고등학생. 낡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죽이고, 특히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품평하는 게 낙이다. 세상만사를 ‘짱’(cool) 아니면 ‘꽝’(suck)으로 이분하는 이들에게 교양있는 취향이나 판단, 합리성, 윤리적 혹은 정치적 가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변두리에서 잘 교육받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그닥 잘되리란 희망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바라는 게 있다면 섹스나 한번 해봤으면, 그리고 파괴본능에 몰두하는 것 정도. 그래서
<사우스 파크>와 쓰레기 문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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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카타르시스의 태풍, “오 마이 갓!”
사시사철 봉우리에 눈을 얹은 로키산맥을 끼고 미국 콜로라도주 한켠에 자리잡은 가상의 마을 사우스 파크. 이 마을은 미국 애니메이션이 가닿은 표현의 신천지다. 내용의 새로움이라기보다 그 표현의 수위와 강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우스 파크>는 동글동글한 2등신 꼬마 4명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백인 깡촌 마을에서 살아가는 스탠, 카트먼, 카일, 케니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동갑내기들. 하지만 아동용이라고 방심해선 안된다. 집, 가족, 학교, 선생님, 친구 등에 둘러싸인 평범한 일상은 곧 모순과 폭력의 지뢰밭이 된다. 아이들은 입만 열면 욕설이 튀어나오고, 엄마와 선생님과 정부와 의사 등 그 모든 기성의 권위는 발밑에 까뭉개지고, 흑인과 동성애자와 그 모든 소수자들이 놀림감이 되는 성인 만화? 그런것을 미국 TV와 극장은 어떻게 허용한 거지?
하지만 흥미진진한 것은, 기성의 모든 가치를 뒤집어 보이는 이 애니메이
<사우스 파크>와 쓰레기 문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