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향뎐>이 가장 난해한 촬영이었을 것 같다. 색채부터 화려하기 그지 없다.
=난해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걸 했다. 이전엔 한번도 내 스타일을 바꾸려했던 적이 없었다. 난 70년대부터 카메라를 들었고, 어두운 시대에 살면서 아름답게 찍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묵화의 느낌이 강한 화면이 됐다. 움직임도 별로 없고, 빈 공간이 많은 쓸쓸한 화면. <춘향뎐>에선 아름다운 한국적인 색을 마음껏 표현하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다. 소품과 의상까지 본래의 색을 최대한 선명하게 잡겠다는 생각이었다. 낮은 톤을 버리고 우리 색의 느낌이라면 극단적으로 화려해보자는 것이었다. 필터도 코럴파스칼을 특별히 주문해서 썼다. 그것도 모자라서 필터 3, 4개를 겹쳐서 썼다. 색감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 흐린 날 촬영은 거의 피했다. <춘향뎐>의 색이 토속적이면서도 화려하고 인공적인 느낌이 든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느낌을 줬다면 난 만족
<춘향뎐>과 임권택 [3] - 정일성 촬영감독 인터뷰
-
1999. 7.24
문제의 사랑가 장면. “이리 오너라. 업고 노자”로 시작되는 이 대목은 아마도 <춘향뎐>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장면의 하나일 것이다. “5, 6일이 지나니 두 남녀는 부끄럼을 잊고….” 서로의 몸을 알게 된 어린 남녀는 이제 수줍음을 버리고 서로 수작하다가 병풍 뒤로 들어가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맞대야 한다. 문제는 그 전과정에 소리가 흐르고 모든 동작이 한컷에 담겨야 한다는 것. 3분 가까이 한 호흡으로 소리의 리듬을 타는 고도의 사랑놀이. 수줍은 첫날밤을 찍은 22일분은 무난하게 넘어갔지만, 이 장면에선 조승우가 눈에 띠게 굳어 있다. 경험이 없는 16살 소년이 하긴 어떻게 능청맞게 여자의 몸을 희롱할 수 있으랴. 조승우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 리듬감도 절실함도 없어보였다. 처음엔 조용히 타이르기만 하던 임 감독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속절없이 이틀이 흘러가고 전 스탭은 초긴장상태. 임 감독이 폭발했다. “니네 어리광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춘향뎐>과 임권택 [2] - 제작기 ②
-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결국 그 삶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먼길을 돌아 <춘향뎐>의 입구에 도착했다. 스스로 휴지같다고 표현한 1960년대, 동시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 1970년대, 그리고 방황과 구도의 1980년대를 보낸 뒤, 우리 것의 뿌리를 탐사한 90년대의 끝자락에서 그는 마침내 불멸의 고전 ‘춘향뎐’과 만난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회귀이면서 동시에 혁신이다. 서구적 영화문법을 훌훌 털어내고 그를 전율케 했던 판소리의 감흥으로 모든 형식적 규율을 제압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춘향뎐>은 그래서 임권택 영화 이력의 결산이라기보다, 새출발처럼 보인다. 막 데뷔한 신인감독처럼, 그는 솟구치는 흥분과 불안을 눌러가며 판소리 춘향가를 조심스럽게 영화로 옮기기 시작했다.
1998. 9.16
“춘향전 판소리로 영화할 거야
<춘향뎐>과 임권택 [1] - 제작기 ①
-
또다시 뒤척이며 옆으로 누워 본다. 그래도 그리 편하지 않다. 가장 편한 상태로 생각나는 영화에 관해 써 보라는 권유에 따라 이리저리 자세를 다시 잡아보지만 생각나는 영화가 없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내 인생의 영화랄 게 뭐있나. 본 영화도 많지 않은데…. 쉽게 생각해보지만 그게 그리 만만치 않다. 다시 정좌해서 물도 한컵…. 그럼 질문의 내용을 바꿔야겠다. 잘 만든 영화가 뭐지? 아니 인상깊었던 영화는 뭐지? 아니 재미있었던 영화는 뭐지? 좋은 영화가 뭐였더라?
왜 그런지 타르코프스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냥 단어일 뿐인 이름…. <노스탤지어>의 김이 많이 나던 그 온천물…. 그 옆에 어슬렁거리던 개도 있었지, 시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냐고 화내던 그 남자…. 그 대사를 나는 번역해서 보고 있었다. 그 남자의 고향은 어디지? 그러다 문득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생각났고 다른 곳에서 온 그 남자, 그 남자가 다치고 배에 천연덕스럽게 올라타던 그 여자의
[내 인생의 영화] 한국영화 안 본 것, 반성했다, <우묵배미의 사랑>
-
-
국내에 널리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앨런 루돌프는 미국 인디영화계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인물이다. 70년대 <내쉬빌> 등 로버트 알트먼 영화 4편의 조감독으로 입문, <메이드 인 헤븐> <위험한 상상> <미세스 파커> 등을 만든 루돌프는 9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애프터글로>를 통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브루스 윌리스의 챔피언>은 그가 <위험한 상상>에서 같이 작업했던 브루스 윌리스를 파트너 삼아 만든 신작. 앨런 루돌프의 시나리오를 본 브루스 윌리스가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고 닉 놀테, 바버라 허시, 알버트 피니 등 중량감 있는 연기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영화의 원작인 커트 보니깃 주니어의 소설은 60년대 미국 반문화운동이 70년대 풍요와 성공을 추구하는 소비주의 문화에 흡수되는 과정을 풍자한 작품. 주인공 드웨인 후버는 그 전형이 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의 첨병인 자동차 판매업
60년대와 70년대의 극단적 대립, <브루스 윌리스의 챔피언>
-
얼룩덜룩한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끈적거리는 쾌감까지 포기할 순 없다. 스릴러를 즐기기 위한 기본자세는 스크린에 시선을 맡겨두고 꼬인 매듭을 풀기 위해 머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땀에 절어 있는 몸뚱이를 일으킬 때 느슨한 정신을 긴장케 하는 한기까지 파고든다면 아주 훌륭한 관람이 될 테지만, <이노센스>는 그 경지엔 이르지 못한 범상한 범죄스릴러다.
<이노센스>는 한 남자의 아내와 정부가 공범이 되어 남자를 죽인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실은 남자는 죽지 않고 살아나, 심장병을 앓던 아내가 쇼크사해버린다. 아내의 재산을 노린 릭과 정부 엘시의 음모였던 것이다. 전반부는 영화 <디아볼릭>의 설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내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릭과 엘시는 서로 틀어지고 결국 감옥과 재판정에 서게 된다. 신문기자 엘든의 증언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데, 엘든의 증언까지 계산해놓은 음모의 전모는 마지막에 가서
범상한 범죄스릴러, <이노센스>
-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하얀 눈이 수북이 뒤덮인 산모퉁이를 비집고 달려오던 기차가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지른다. 한칸짜리 증기기관차가 힘에 부쳐보이듯, 검은 연기와 기적소리는 이내 흩날리는 눈 속에 스며들고 만다. 기차가 멈춰 선 곳은 홋카이도 지선의 종점인 폐광촌 호로마이역. 하얀 눈과 어울려 낡아 보이긴 하지만 철도원 제복의 맵시가 멋스러운 역장이 어김없이 기차를 맞는다. 호로마이역에 인생을 묻은 철도원 사토 오토마츠다.
오토마츠의 풍모는 촌스러운 시골 역장의 모습이 아니다. 일면 근엄해보이기도 하지만 지그시 보고 있으면 정도 많고 고운 인상이다. 모두들 대처로 떠났지만 호로마이역에 청춘을 묻고 정년퇴임을 맞이하면서도 철도원의 기풍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호감이 간다. 이처럼 자신을 곧추세워온 오토마츠의 인생을 보노라면 짐짓 가슴이 뭉클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 멜로드라마의 배경에 깔리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눈감아 주긴 어렵다. 오토마츠에게서는, 전후의 폐허를 딛고 ‘오늘의
동화적인 발상과 환상적인 표현, <철도원>
-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다. 정말 대단한 장관이다.” 이라크 첫 공습을 수행한 미군의 소감이 그랬다. 과연 걸프전을 낭만적인 불꽃놀이나 무해한 전자오락에 비길 수 있을까. 잠시 잠깐 해외 뉴스를 오르내리던 걸프전의 이미지와 정보 뒷편에 뭔가 다른 사연이 숨어있을 법도 하잖은가. 미 국방성의 여과장치로 거르지 않은 걸프전 원액에 듣도보도 못한 화학 처리를 한 영화 <쓰리 킹즈>의 시작은 그런 의문에서 시작됐다. <쓰리 킹즈>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전쟁 액션 영화로 지칭하긴 마뜩찮다. 아예 휴전 직후를 이야기의 기점으로 잡고 있고, 전쟁 영화 특유의 무게잡는 스타일이나 구태의연한 스토리텔링도 구사하지 않는다. 곳곳에 폭소를 터뜨리게 할 지뢰가 묻혀 있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웃게나 만드는, 생각없는 코미디도 아니다. 날선 풍자와 비난이 따끔거리기 때문이다.
쿠웨이트 왕족의 금괴가 숨겨진 후세인의 비밀 벙커를 습격하자는 계획을 세우며 결성된 ‘쓰
흥미진진한 액션 모험 영화, <쓰리 킹즈>
-
타이타닉의 갑판에서 살얼음 낀 검은 바다로 떨어진 지 3년. 나른한 태양 빛에 온종일 희롱당하는 아름다운 해변을 지닌 남국에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도착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인생을 선택하라”던 <트레인스포팅>의 이완 맥그리거와 비슷한 목소리로 뇌까린다. “내 이름은 리처드. 그것 말고 나에 대해 뭘 더 알 필요가 있나. 부모가 누군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런 건 다 부질없다.” 모름지기 영화의 쿨한 서두를 위해 이 정도 불친절은 감수할 수 있는 법. 영화의 전개와 함께 주인공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마약에 중독된 스코틀랜드 실업자 렌튼과 달리, 동남아 관광지의 미국인 배낭족이 삶의 진면목과 엑스터시를 맛보려면 약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속물’ 관광객을 벌레보듯 경멸하며 그들과 다르기 위해 애쓰는 리처드는 낯선 도전을 두려워 말자고 다짐하며 충동에 몸을 싣는다.
소품 <에일리언 트라이앵글>을 제외하면, 대니 보일
파라다이스의 숨막히는 풍광, <비치>
-
본의 아니게 살인극에 휘말리는 산장의 가족들이 ‘코믹 잔혹’한 웃음을 선사했던 데뷔작 <조용한 가족>과 마찬가지로, 김지운 감독의 두번째 영화 <반칙왕>은 웃음의 색깔이 좀 이상한 코미디다. 실적 위주의 사회에서 부적응자에 가까운 은행원의 지지부진한 일상과 이제는 한물간 프로레슬링의 세계가 엉뚱하게 맞물려 쓴웃음과 폭소의 묘한 배합을 이룬다. 물론 웃기고 짠한 부조리극처럼 매순간 희비가 교차하는 게 세상살이인지라, 전혀 낯설기만한 배합은 아니지만. 출근길 지하철 유리창에 눌린 임대호의 얼굴처럼 주눅든 소시민의 일상에서 사각의 링 위로 뛰쳐나간 일탈은 소박한 자아 찾기의 과정을 짠한 웃음으로 풀어나간다.
TV 속 프로레슬링 장면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몇개의 장으로 나뉜다. 우선 은행원 임대호의 윤기없는 일상을 따라가는 ‘공포의 헤드록’부터 유비호와 혈투를 벌이는 ‘사각의 진혼곡’까지. 지각대장에다, 은행직원 중 유일하게 한 계좌도 못 튼 대호는 부지점장에게 눈엣
소박한 자아 찾기의 과정, <반칙왕>
-
이제 마이클 J. 폭스를 보기란 쉽지 않다. 지난 1월18일 마이클 J. 폭스가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쇼 프로그램 <스핀시티>를 그만두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는 1천명 중 한명꼴로 발병하는 파킨슨병과 싸우면서도 그동안 <스핀시티>에는 출연해왔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백 투 더 퓨처> <코 끝에 걸린 사나이> <프라이트너> 등에 출연했던 마이클의 나이는 38살. 그를 빼놓은 쇼는 생각할 수 없다는게 <ABC> 제작관계자들의 말이지만 그렇다고 붙잡을 수도 없는 일. 100회를 채우고 그만두겠다는 마이클은 이날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느니 그 전에 내가 직접 선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이클 J. 폭스, 쇼 프로그램 <스핀시티> 그만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