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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다크 시티라고 들어봤나?” 오늘 아침, 편성국장이 기상 리포터 빌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처음 들어보는데요.” “아마 그럴 거야.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도시니까. 이 도시에서는 자정만 되면 빌딩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민들이 잠에 빠져든다네. 그리고 밤 사이 전혀 다른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기억을 주입받은 뒤 다음 하루를 살아가게 된다는군.” 빌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노망이 들었나’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밥줄을 위해 참았다. “아무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이 도시에서 방송을 진행하게. 매일매일 뒤바뀌는 도시에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오는가, 어때 낭만적이지 않아?”
빌은 지지리도 재수가 없다고 여겨졌다. ‘남들 다 노는 크리스마스에 출장이라니. 게다가 PD는 앤디라고, 왜 밥맛없게 여자야? 출장길에 재미보기도 글렀잖아.’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크 시티로 가는 도로 노선은 알려진 바가 없어, 터키인들이 운영하는 장거리버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다크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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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출신의 세 청년이 무작정 상경했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가 마침내 자리잡은 곳은 서울 변두리, 새로운 개발 지역. 중국음식점, 여관, 이발소에서, 기술이랄 것도 없는 하찮은 일거리로 삶을 유지해야 하는 세 청년은 각기 고향은 다르지만 우연히 객지에서 만나 동병상련의 우정을 나눈다. 그들이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란 우리의 정서와 뚝심이다. 심은 만큼 기르고 가꾼 만큼만 거두는 흙과 농사의 정직함을 조상 대대로의 삶에 이어온 그들이다. 눈속임으로 한탕 잘하면 떼돈 번다는 요사스러운 서울에서 그들은 당연히 시행착오의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끝내 좌절하지 않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우정을 조금도 잃지 않는 뚝심의 이야기가 내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의 기둥 줄거리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란 내가 농촌의 세련되지 않은 청년들 이야기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4년 동안의 값진 휴식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장호 [37] - 한국영화가 담지 못하는 현실, <바람불어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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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셰리던은 말하자면 인파이터 복서다. 딱히 기교라 부를 것 없는 영화 스타일은 정치적 소재는 논쟁적으로, 연애담은 멜로드라마로, 서글픈 현실은 비극으로 다루는 정면승부를 꺼리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그를 ‘배우의 감독’이라 부르는 것도 이처럼 곁눈질하지 않는 스타일과 관련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뉴욕에서 극작가 겸 연극연출가로 활동했던 짐 셰리던은 영화를 통해 시공간의 제약없이 자유자재로 옮겨다닐 수 있는 무대를 얻었지만 그 무대에 올려야할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렌즈를 통과한 빛의 환영이 한순간 배우의 영혼을 스크린 위에 새겨넣을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짐 셰리던의 특징을 드러낸다.
셰리던 영화의 중심에 놓인 것은 고난에 맞서는 주인공이며 그 역은 3번이나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맡겨졌다. <나의 왼발>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이은 <더 복서>의 주인공 대니는 IRA 테러사건에 연루, 14년을 감옥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더 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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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로 베니스 금사자상을 받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로 일본내 영화상들을 휩쓸었던 최양일 감독, <마지막 황제>의 음악을 맡았던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 로버트 알트만과 작업했던 구리다 도요미치 촬영감독, 니시오카 요시노부 미술기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난>으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디자이너 와다 에미. 이들 일본 영화 각 분야의 스타들이 한 영화의 배우나 스탭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60년대 일본 뉴웨이브의 기수였던 이른바 '운동권 출신' 오시마 나기사 감독(大島 渚,67)이 13년 만에 발표한 신작 <고하토>(御法度, 금기)가 바로 이같은 '드림팀'의 작업이다. 제작단계에서부터 화제가 돼온 <고하토>는 12월18일 일본 전역에서 개봉했다.
<고하토>는 개봉전부터 일본 평론계로부터 만장일치의 반응을 얻었다. 지난 11월8일 첫 시사회가 열린 뒤, 비평가들은 “세기말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13년만의 역작 <고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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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을 만지고 싶었던 게 아니야! 잠자리를 하자고 한 게 아니야! 사랑하자고 한 거야! 외로우니까. 위로하자고 한 것뿐이야!…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수 없다면 이 힘든 세상 어떻게 살아.’ 남자란 이유로 사랑했던 게 아닌 사람들에게 남자라는 이유로 상처받은 준영의 영혼과 세상에서 설 자리를 서서히 잃어가는 문기의 영혼이 입을 맞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떨어지고 실루엣으로 처리된 그들의 얼굴이 서서히 포개지면서 암전. 그리고 그 위에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 밤, 그 포옹을 누구는 욕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터진 그 아이의 입술에서 내가 받은 건 위로였다. 가엾은 서로에 대한, 안스러운 위로.’
KBS에 동성애 소재 드라마?
남자는 염색해도 안 되고 밀어도 안 되고 귀걸이 해도 안 되는 KBS에서 내놓은 세기말 특집극 <슬픈 유혹>(KBS2, 12월26일 일요일 밤 10시10분)의 소재는 동성애다. 영화에서는 원조교제, 모럴 헤저드, 치정
노희경 작가의 KBS2 세기말 특집극 <슬픈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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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 먼 아프리카의 오지까지 날아온 영화 촬영팀이 있다. 한데 팀을 인솔해야 할 감독이라는 작자가 촬영을 위한 장소 헌팅에는 통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는 코끼리 ‘사냥’을 할 양으로 이 먼 곳까지 온 것 같은 그런 인상마저 준다. 이 촬영팀이 얻을 성과란 게 어떤 것일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을 맡은 또 한편의 외면당한 걸작 <추악한 사냥꾼>(White Hunter, Black Heart, 1990)은 마초 성향이 짙은 한 영화감독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예술적 광기의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다.
여기서 먼저 이런 의문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과연 이렇게까지 대책없이 무책임한 영화감독이 있을까? 극히 드문 경우라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존재했던 건 분명한 사실인가보다. 문제의 그 인물은 바로 존 휴스턴으로, <추악한 사냥꾼>은 그가 콩고에서 <아프리카의 여왕>을 찍을 때의 이야기를 기초로
로맨스는 급류를 타고, 존 휴스턴의 <아프리카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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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의 탓인지 모르겠으나 오늘의 프랑스에서는 시(詩)도 시인도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과거에 읽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지금에는 텔레비전, 영화, 컴퓨터 등이 토해내는 화면의 홍수 속에서 보고 즐기는 사람들로 바뀐 것인지 모른다. 이른바 ‘흥행 사회’에서 시인들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남의 땅에 있지만 아내와 나는 ‘창작과 비평사’가 고맙게도 꾸준히 보내주고 있는 시집들을 읽고 있다. 한국사회에 아직 시인들과 시들이 꿈틀대며 살아 있음은 실로 놀라우면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그 시들이 가벼운 언어의 조합이나 유희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수들이라면 말이다. 인간의 소박한 꿈과 이상은 현대에 올수록 더욱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을 일컬어 ‘현실로부터 스스로 추방된 사람’이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로부터 추방되고 물질이 가난한 시인들만이 이 팍팍한 시기에 인간성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보여줄 것이다.
또 하나의 영화,
시의 죽음을 슬퍼하며, <일 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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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 날다>는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연상케 하는 가난하고 간결하며 착한 영화다.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서 만난 민병훈과 잠셋 우스마노프 두 감독이 공동연출한 이 영화는 토리노 국제영화제 대상, 비평가상, 관객상,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은상 등 해외 평단의 지지를 얻어 개봉기회를 잡은 드문 예다.
<벌이 날다>는 아주 고집스런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법을 빙자해 가난한 자의 권리를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남자는 아주 독특한 보복을 준비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다. 전 재산을 털어 검사네 옆집을 사고 화장실로 쓸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자 검사는 남자의 아들을 경찰서에 잡아다놓고 협박을 한다. 아들을 구하려면 당장 화장실 파는 걸 중단하라는 검사의 요구에 그는 맘대로 해보라며 경찰서 문을 박차고 나온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같은 분위기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사내의 우직한 저항이 전적으로 개인의 성격에 기인하며 해결책도 엉뚱한 곳에서
가난하고 간결하며 착한 영화, <벌이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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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들이 있었다. “네가 없었다면 벌써 자살했을 거야”라는 말을 서슴없이 던지던 때가. 자라서는 연인에게조차 입 밖에 못 낼 대담한 고백을 수백번 속삭이고도 성에 차지 않아 온종일 붙어다닌 단짝에게 다시 편지를 쓰던 시절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소녀가 소녀를 만난 첫사랑의 비극적 기록이다. 난청으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육상부원 시은과 가끔 이상한 소리를 듣는 중창반 반주자 효신. 또래들의 명랑한 공기를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그들은 둘만의 방을 짓고 빗장을 지른다. 하지만 서로의 다리를 묶고 고요한 물 속에 잠겨 있던 두 소녀 중 하나가 짝을 뿌리치고 수면으로 떠오르는 영화 도입부대로, 언약은 깨어진다. 효신의 지독한 애정으로 봉인된 ‘밀실’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시은은 “뭇사람 앞에서 연인에게 등돌리지 말라”는 사랑의 첫 번째 계율을 어긴다.
우리 스크린에서 소외되어 온 10대 소녀들의 공간을 매혹적인 영화 소재로 발견한 전편에 이어, 속편은
소녀가 소녀를 만난 첫사랑의 비극적 기록,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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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건한 피와 토막난 팔과 몸뚱이, 동강난 머리… 엽기적인 연쇄 토막살인사건의 정점에 가냘픈 한 여자가 서 있다.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하다. 감성멜로 <접속>을 만든 그 장윤현 감독이 2년 만에 내놓은 영화는 ‘피 범벅, 사지절단’의 하드고어 스릴러. 게다가 뭇 여성 관객들을 설레게 하는 한석규와 정갈하고 수려한 마스크의 심은하까지 피바다에 뛰어들었다니, 뭔가 범상치 않은 이야기인 듯하지만 어떤 그림인지 쉽게 떠올릴 수 없다.
도입부, 토막시체를 발견하는 장면부터 보자. 세기말의 음울함이 배어 있는 서울, 카메라가 향한 곳은 화사한 진열대 사이로 롤러브레이드를 탄 직원들이 일렁이는 도심 대형 할인매장. 엘리베이터 안, 모두 무심하게 층수를 가리키는 숫자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이 한 꼬마는 엄마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봉투를 자꾸 건드린다. 순간 엘리베이터 바닥은 피로 물들고, 찢어진 봉투 사이로 보이는 건 토막난 사람 머리. 엘리베이트
단절에서 오는 절망감, <텔 미 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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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켜고 두개의 윈도를 나란히 열어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의 미덕과 결함을 적어본다. 두 목록은 비슷한 길이로 늘어간다. 아니, 어쩌면 아쉽고 아깝고 짜증나는 항목수가 좀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4편까지 남은 30년 남짓한 시간을 세편의 에피소드로 쪼개느라 성격을 발전시킬 반경마저 비좁아진 인물들, 클라이맥스를 흐트러놓은 어눌한 편집, 무엇보다 거슬리는 인종적 편견이 스민 외계 생물들의 스케치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도도하고 위풍당당한 영화를 감히 변명(?)하고 싶다는 가당치 않은 생각에 혹하고 만다. 실망으로 인한 코웃음이나 엄격한 비판들이 충분히 많았기에 한번쯤 우물우물 볼멘소리를 해도 해롭지 않겠다는 마음이 고개를 든 걸까. 아니면 볼 때마다- 겨우 세번이지만- 내게 새로운 재미와 아름다움을 열어준 영화가 혹평의 단칼에 죽어나가는 모습이 한 관객으로서 못내 속상해서일까.
은하계 먼곳에서 해바암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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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 찾기, 행복한 체험, <스타 워즈 1:보이지 않는 위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