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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이 <동감>의 여주인공 소은 역에 캐스팅됐다. 김하늘은 1997년 <바이준>에서 죽은 준을 잊지 못하는 채영 역으로 데뷔하고 <닥터 K>에서 신비한 의사를 사랑하는 소녀로 나온 뒤에는 TV에 주력했다. <동감>은 1979년 개기 월식이 있던 날 밤 소은이 우연히 고물 무선기 하나를 얻으면서 시작된다. 내팽개쳐 놓은 무선기로 아마추어 무선 마니아인 지인으로부터 교신이 들어오면서 둘은 서툰 교신을 주고받는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사실을 안 소은과 지인은 햄(HAM)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기로 하고 약속을 정해 만나기로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둘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살고 있었던 것. 1979년의 영문과 학생 소은과 2000년 광고창작과 학생인 지인은 만날 수 없지만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교감을 시작한다.
김하늘의 상대역인 지인 역은 <바이준>에서 물끄러미 채영을 바라보기만 했던 유지태. 준을
김하늘, <동감>에 캐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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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변호사이긴 하지만 영화쪽 사람들에게 조광희(34)라는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다. 영화검열 철폐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일에 발벗고 나선 것은 물론, 영화와 관련한 갖가지 일에 공식·비공식 자문에서부터 법적 대리인 노릇까지 해왔기 때문이다.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으로 참여해 영화와 영화인들 편에 서서 국가보안법에 맞서 싸웠으며, 98년에는 영화 <어게인> 연출을 준비하던 이순안 감독이 제작사를 상대로 낸 ‘영화제작 및 저작권침해금지 가처분신청’에 “이유있다”는 법원의 결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당시 이 결정은 비록 가처분 신청이기는 하지만 영화의 시나리오와 연출 관련 저작권에 대한 법원의 첫 판결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조광희 변호사의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약자인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에 대한 제작사의 횡포에 처음 법적으로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무게를 갖는다.
이 사건 이후 독립 영화쪽은 물론 영화계에서는 마치 무슨 해결사인 양 그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영화를 변호한다, 변호사 조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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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주위에서 ‘재미없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그런 ‘과’(科·발음대로라면 ‘꽈’)만 주위에 분포된 건지,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그런 건지는 확인할 길 없다. 그렇지만 ‘직장인보다는 재미있게 산다’고 자부하는 내 입에서도 이틀에 한번쯤은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후자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근거 하나 더. 원고를 청탁받을 때의 주문도 ‘쉽고 재밌게 써달라’는 게 대부분이다. 바야흐로 ‘재미 찾는 사회’다.
이전에는 어땠기에?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찾던 것은 재미가 아니라 의미였다”라는 주장이 꽤 있을 듯하다. 재미와 의미라. 그럭저럭 세태의 변화를 상징해주는 대조다. 운(韻)도 맞아떨어진다(의미는 한자어고, 재미는 순우리말이지만 무슨 상관이랴). 좀 과장을 보태면 재미는 이제 모든 것의 가치를 판단하는 지고의 기준이 되었다. 기왕 재미 타령을 한 김에, 몇 방울 남지 않은 먹물을 쳐서 “최근 한국사회에서 ‘재미의 정치학’에는 몇개의 양상이 존재한다”고 우겨보기로 하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재미 찾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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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대학생 단체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마흔을 넘기면서 '젊은층'이라는 착각이 확실히 불식되고 나이에 대한 자의식이 생겨나고보니, 진짜 젊은층들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나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강의시간 2시간 중 한 시간 강의하고 30분 질문받고 30분 질문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내가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은 대체로 직업관/결혼관 따위였다. 재미있는 건, 여학생들에게 결혼관을 물었을 때였다. 졸업후 결혼해서 현모양처 되는 것이 꿈인 사람? 아무도 없었다. 졸업후 취직하고 결혼해서 두 가지 모두 하며 살겠다는 사람?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사회활동만 하면서 독신으로 살겠다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의 정체는 뭐지? 혹시, 동성애 커플을 만들 계획들인가? 한 학생 대답이 졸업후 취직했다가 결혼하면서 그만둔다는 것이다. 그게 나머지 절반이라는 것이다. 그런 길도 있긴 있었군.
지금은 여성특파원을 둔 신문사도 여럿이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82년만 해도 여성
[편집장이 독자에게] 대학졸업을 맞는 여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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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만큼이나 영화비평가협회도 많다. 그 중에서도 뉴욕비평가협회를 필두로 하는 5대비평가협회의 권위를 제법 알아주는데, 이들의 평가는 곧잘 아카데미의 평가와 심각한 괴리를 보여주곤 한다. 그 가장 극적인 예가 <LA 컨피덴셜>. 사상 처음으로 5대비평가협회의 작품상을 모조리 휩쓸어간 이 걸작 누아르에 대해서 아카데미는 대단히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그 잘난 유치뽕짝 신파극 <타이타닉>(1997)에 상을 몰아준 까닭이다. 그나마 각색상이라도 건진 게 다행이라고 할까? 과연 <LA 컨피덴셜>은 <개 같은 내 인생>(1985), <프라하의 봄>(1988)과 더불어 각색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우리나라에서는 각색을 창작보다 저열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편견. 할리우드에서는 “각색이 창작보다 어렵다”는 것이 공자님 말씀처럼 지당하게 받아들여진 지 이미 오래이며, 따라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나 베
[할리우드작가열전] 이토록 완벽한 각색! 브라이언 헬겔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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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악, 꺄아악, 너무 멋져.” “정말이야, 언니. 나 미칠 것 같아. 어쩜 그렇게 잘 생겼을까? 마치 진주로 빚어놓은 것 같았어.” “아, 비극이야. 비극. 왜 이 바다 밑에는 해삼이나 말미잘 같은 것들밖에 없을까? 바다 위는 저렇게 눈부신데. 아, 나의 왕자님.” 인어 공주 에어리얼은 귀를 쫑긋 세우고 언니 인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언니 또 이야기 해줘. 그 왕자님이 어떻게 했어?” “아니, 얘는? 너는 빨리 잠이나 잘 것이지, 여기서 뭐하니. 꼬마들은 빠져. 열네살 되기 전에는 꿈도 꾸지마.” 그러나 인어 공주는 언니들의 이야기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머리 속에는 환상의 왕자님이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에어리얼은 몰래 소라 침대를 빠져나와 물 위로 올라갔다. 멀리서 옅은 태양빛이 수면 위에 스며들고 있었고, 아름다운 보트 몇척이 그 위에 떠 있었다. “오케이, 레오, 한번 더 가자구!” 커다란 구슬이 달린 검은 소라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인어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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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연출에 혼이 난 나는 다음 영화로 속 편하게 <어둠의 자식들> 속편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공부에 제작 신고를 하려면 당시엔 반드시 시나리오 사전 심의를 받아야 했는데 여기에 통과하지 못하고 자꾸 반려되었다. “내용이 어둡다” “사회의 어두운 면만 부각시켰다”는 게 반려 이유였다. 더욱 괴로운 것은 그 시절 한국영화 제작 독려 정책으로 해당 분기 안에 의무 편수의 영화 제작을 하지 않으면 외화 쿼터를 주지 않는 악독한 시행령이 있어 영화사가 줄기차게 나에게 계약 이행을 촉구하는 까닭이었다. 이른바 시한부 제작에 걸려든 것이었다.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마치 양쪽에서 기계처럼 밀고 들어오는 철벽을 양팔 벌려 막아야 하는 악몽의 형국이었다. 그때 내가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구멍은 그저 포기하는 것이었고 그 포기마저 허락이 안 된다면 곱게 영화판을 떠나야겠다는 마지막 결단뿐이었다.
우선 영화 하나를 철저히 망쳐버릴 수 있도록 결심을 단단히 했다.
이장호 [44] - 독재시대가 만든 영화, <바보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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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이 아직 ‘어른스러운’ 주제는 다뤄본 일이 없지만, 돈 되는 할리우드 감독치고 미학적 완결성을 그보다 더 엄격하게 추구하는 이 또한 없다. 데이비드 린치보다는 좀더 폼잡는 대중적 감독이고 스티븐 스필버그보다는 대중적 성공에 신경을 덜 쓰는 편인 버튼은, 스튜디오 영화의 소잿감을 특유의 음습하고 수다스러운 표현주의적 목표를 위해 끈질기게 뒤집고 뒤틀어왔다.
<슬리피 할로우>는 ‘반(反)엔터테인먼트적’이라는 측면에서는 그의 비운의 실패작 <화성침공>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끝내주게 멋지고 살 떨리게 무서운 신작의 순수한 영상은 가히 눈부시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목표물에 명중하고, 신호에 맞춰 셔터가 흔들리고, 번개가 악귀의 등장을 비추는 일종의 할로윈 귀신 영화라고나 할까. 이 버튼판 유령의 집은, 비록 살아 숨쉬는 배우들이 우글거리기는 하지만, 반세기 전 워싱턴 어빙의 귀신이야기에(빙 크로스비의 내레이션은 말할 것도 없고) 코믹한 한기를 불
디즈니랜드에 들어선 공포 극장, <슬리피 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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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옷이 공기와 같아서 입고도 입은 줄 모른다면, 결국 문화를 잡는 방법은 그릇과 종지, 촛대와 장신구 같은 사소한 것들이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좀 멀리 돌아가야겠다.
와리바시- 일회용이 주는 비장함
<러브레터>와 <철도원>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웬 난데없는 젓가락 장단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일단 일본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이즈’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얼마 전에 도쿄에 갔을 때, 일본의 청담동격인 비교적 좋은 동네라고 소문난 데서 묵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급 호텔이라는 그곳은 겨우 손바닥만한 방 하나에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고, 그 방의 조립식 목욕탕은 뚱뚱한 사람 절대 사절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은 것처럼 작았다. 푹신한 의자 하나 없이 영업하는 카페며, 맞은편 사람의 무릎이 닿을 것 같은 지하철. 이게 정말 ‘땅이 작아서’ 생기는 문제일까? ‘땅이 작아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이름을 부른다, <철도원>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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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1등 기관사의 꿈을 보듬고 있는 사람. 그의 종착역은 관객이 모여 있는 상영관이다. 극장 라인을 잡는 것부터 비디오 및 공중파, 유선방송 판권까지 포함하는 배급의 역할을 김길남(33)씨는 “소프트웨어를 시장에 공급해서 수익을 발생시키고 이를 다시 제작에 재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배급은 영화제작 현장과 영화관을 부단히 왕복하는 기차인 셈. <박하사탕>으로 새해 첫 기적을 울린 김길남씨는 “흥행의 성패를 배급력만으로 이야기하거나 배급력을 라인업과 극장수 확보만으로 설명해선 부족하다”고 미리 못박는다.
배급에도 컨셉과 전략이 엄연히 있다.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던 <박하사탕>이 좋은 예. 주위에선 영화제 열기가 식기 전에 곧바로 극장 개봉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단관 개봉. <박하사탕>은 “판을 크게 벌이는 것보다 판이 최대한 데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영화”라 판단했다. “극
현장과 영화관을 왕복하는 기차, 배급 김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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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탄 1996년작 <그림 속 나의 마을> 개봉에 맞춰 서울을 방문한 히가시 요이치 감독(東陽一·66)에게 한국 나들이는 이번이 네 번째다. 1993년 <NHK> 다큐멘터리 <한국의 서커스>를 위해 두 차례 취재 여행을 다녀갔고, 1998년 서울 국제독립영화제 손님으로 초대받은 것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교육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이름난 이와나미영화사를 거쳐 1969년 히가시프로덕션을 설립한 히가시 감독은 <써드>(78), <다리없는 강>(92) 등 일본사회의 저변을 훑는 사실주의적 영화들로 일본평단에서 가볍지 않은 믿음을 쌓아온 노장. 필름 위에 빛으로 그린 그림책 같은 영화 <그림 속 나의 마을>에서도 그의 투명하고 엄정한 시선은 그대로다.
지난 2월9일 회색 양복에 갈색 편물 넥타이를 맨 젊은 차림새로 <씨네21>을 방문한 히가시 감독은 활달한 손짓을 곁들여 자신의 영화와 인생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그림 속 나의 마을>의 히가시 요이치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