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눈꺼풀님(이동진 [email protected])이 입장하셨습니다. 눈 깜박할 새님(김혜리 [email protected])이 입장하셨습니다.
이동진 “<추격자>는 아무래도 <살인의 추억>과 연계되어 논의될 운명인 것 같아요.” 김혜리 “스릴러 장르의 기본을 정확하게 터득하고 있는 영화죠.”
눈 깜박할 새님의 말(이하 깜박할): 눈을 감았다 뜨니 연휴가 등 뒤로 가버렸습니다. T-T 선배 대화명을 보니 무박이일 동안 주택가 비탈길을 질주하던 <추격자>의 엄중호(김윤석)의 피로가 새삼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추격자> 이야기부터 해야 하겠죠?
무거운 눈꺼풀님의 말(이하 눈꺼풀): 헉, 오늘 제 대화명은 실은 <잠수종과 나비>에서 따온 건데…. *.* <추격자>를 보고 나니 무엇보다 오랜만에 충무로가 주목할 만한 대형 신인감독 하나가 나왔다는 느낌이 먼저 들더군요. 어떻게 장르영화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에서 나홍진 감독은 상당수준에 올라 있는 것 같습니다.
깜박할: 긴박한 상황에서 편집으로 관객의 숨통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솜씨부터 크게는 한국사회가 범죄에 대응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눈까지 뛰어난 시나리오였어요. 인물 A와 인물 B가 어떻게 엮이고 부딪치는가도 자연스럽게 풀어냈고요. 무엇보다 스릴러 장르의 기본이 기상천외한 범죄나 동기의 심오함, 반전의 쇼크보다, 당면한 시퀀스와 전후 정황을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도록 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눈꺼풀: 초반 30분 동안 범인이 주인공과 격투를 벌이고 경찰에 체포되어 자백하는 장면까지 다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독의 자신감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릴러 장르에서 관습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재미를 초반에 전부 소화한 뒤에도 얼마든지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장담할 때에만 가능한 구조일 테니까요.
깜박할: 맞아요. 범인이 누구냐는 물론 범행 과정까지 소상히 초반에 관객에게 노출되죠. 물론 희생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결정적 ‘클리프행어’가 있긴 하지만요. 그런데 자백이 있은 뒤 시간이 지체되는 까닭이 특별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절차상의 미적거림과 알력 탓으로 그려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무릎을 쳤어요.
눈꺼풀: 아무래도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연계되어 계속 논의될 운명인 것 같습니다. 그건 <살인의 추억>이 이 분야에서 지표가 된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 <추격자>에 <살인의 추억>의 잔영이 일렁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무능하고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약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희생되는 과정을 그리려는 시각이 그렇지요. 해프닝에 가까운 경찰 수사 과정을 코믹하게 묘사하는 부분도 그렇고요.
깜박할: 그런데 저는 이 영화에서 대한민국 경찰의 무능이 중요한 이야기 포인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실제로 심하게 무능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예를 들어 피의자를 때리면 안 된다는 원칙이 수사의 진도를 늦춘다거나 경찰이 시장 경호 미비에 대한 비난을 무마하려고 무고한 사람 잡는 거 아니냐며 검찰이 영장을 기각하는 일을 무조건 한심한 처사라고 할 순 없잖아요? 차라리 어느 관료제나 갖고 있는 구멍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머리가 나쁜 관계로 버릇대로 공책에 <살인의 추억>과 <추적자>의 닮은 점, 다른 점을 적어봤는데요.
눈꺼풀: 들어볼까요?
깜박할: 일단 어떤 의미에서건 실패한 추적이라는 점, 변태적 성욕이 동기로 작용해 여성들이 희생된 범죄라는 점, 정치사회적 공기가 원경으로 깔려 있다는 점, 추격자가 영웅적 인물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말씀하신 수사팀의 캐릭터 구성이나 블랙 유머가 <추격자>와 <살인의 추억>이 공유하는 요소예요. 차이점은 <추격자>은 폭력을 눈앞에 들이댄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범인이 누군지 확실하다는 점이고요. ^_^ 무엇보다 주인공이 갖는 심리적 부담의 성격이 다릅니다. 중호가 영민(하정우)에 대해 품는 증오에는 스스로 가해자의 일원이라는 자책감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고 봤습니다. 희생된 여인 미진(서영희)이 아프다고 거절했는데도 윽박질러 일을 나가게 한 장본인이니까요. 보도방 포주라는 그의 일 자체가 착취이기도 하지만요. 두 번째로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전화를 중호는 우연히도 받지 못했죠.
눈꺼풀: <추격자>는 영화가 무척 세다는 느낌을 주죠. 일단 폭력장면의 묘사 강도가 높잖아요. 세상에, 망치와 정을 무기로 쓰는 연쇄살인범이라니요. -.-
깜박할: 정말이지 둘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울고 싶다고요.T-T
눈꺼풀: 극 초반 살인 공장 같은 욕실에서 흰 팬티만 입은 범인이 여주인공에게 정과 망치를 연거푸 휘두르는 장면은 정말 끔찍하더군요. 아울러 추격하는 자나 추격당하는 자 모두 폭발성이 높은 캐릭터이기에 시종 격렬한 긴장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깜박할: 정말이지 둘 중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요. T-T
눈꺼풀: 격렬한 긴장의 원인은 범인이 지닌 악마성의 뿌리를 영화가 해명하지 않는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고 봤어요. 일반적으로 이런 스릴러에서는 잔악무도한 살인마라도, 하다못해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이라도 플래시백으로 넣어주게 마련인데, <추격자>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한 악’으로 범인을 다루잖아요. 시각적 쇼크의 이유를 머릿속에서라도 풀고 싶게 마련인 관객으로선 풀리지 않는 퍼즐 속에서 충격을 해소할 길이 없기에 더욱 강력한 심리적 타격을 받는 거죠. 살인마를 쫓는 중호조차도 뇌물 때문에 해직된 형사 출신 정도라는 게 암시될 뿐, 가족관계 같은 배경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잖아요. 그렇게 가장 중요한 두 인물에 대한 설명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두 남자가 몸으로 맞부딪칠 때의 파괴력과 쫓고 쫓기는 추격의 모티브에 집중함으로써 이제껏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었던 박진감을 만들어냈어요.
깜박할: 그 부분은 기존 스릴러 시나리오를 검토한 뒤에 정확한 의도를 갖고 내린 결단 같습니다. 영화 전체의 탄력과 박진감을 이야기하자면 생략 기교에 힘입은 바가 커요. 한 장면의 수위가 100%에 다다르기 직전에 컷해서, 안 봐도 짐작되는 행위는 생략하고, 곧장 다음 상황을 보여주는 편집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목놓아 우는 장면을 차창 안에 가둬서 묵음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같은 맥락이겠죠.
눈꺼풀: 캐릭터의 상태와 관련해서 흥미로웠던 것은 중호가 영민이 끔찍한 살인마라는 사실을 극중에서 가장 나중에 받아들이는 인물이란 사실이었어요. 처음에 중호는 그저 도망친 여자를 잡으려는 마음이었고, 그 다음에는 여자를 팔아넘긴 남자를 잡으려는 심산이었죠. 선배 형사가 영민이 살인마라고 말해도, 그 살인마의 자백을 들어도, 전혀 믿지 않으면서요. 그러다 혼돈의 와중에서 몸으로 직접 부딪쳐 뛰면서 악의 실체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 진진했어요.
깜박할: 사실 이 영화에 나오는 추적은 애초엔 모두 엇나간 동기를 갖고 있긴 해요. 중호는 ‘재산’인 여자들을 되찾으려는 거였고 경찰은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리고 싶어서 움직이니까요. ‘미치도록 그 나쁜 놈을 잡고 싶다’는 욕망의 발로는 아니죠. 하지만 중호는 영민이 저지른 일의 실체를 냄새맡기 시작하고 피로가 더해가면서 어느 순간 ‘생각’을 하게 되죠.
눈꺼풀: 중호가 미진을 구하려고 사력을 다하는 것도 사실은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영화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중호와 영민은 둘 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 같은 남자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죠. 물론 그 본능이 향하는 방향은 전혀 다르지만요.-_-#
깜박할: 글쎄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없지 않지만 중호와 영민은 확실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중호가 생존 본능과 전직 형사다운 사냥꾼 본능을 가진 육체성이 강한 남자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완전히 반사회적인 캐릭터인 영민과 한데 묶긴 어려워요.
눈꺼풀: 흠, 살인마를 완력이 강하지 않은 모습과 아이 같은 외모로 그려낸 것도 인상적이죠. 악마와 아이의 모습을 결합한 것 같은 살인마 캐릭터는 다른 스릴러에서도 종종 볼 수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그려져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악에는 아이스러운 점이 분명히 있잖아요. 어린아이들을 악의 존재로 그리는 존 카펜터의 <저주받은 도시> 같은 작품이 바로 그런 점에 착목한 스릴러이겠죠.
깜박할: 영민이 살인 도중에 훼방을 놓은 이웃 사람에게 짜증을 낸다거나 여성 경찰에게 치근덕거리는 장면에 잘 드러나 있죠. 배우에게 탄복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눈꺼풀: <타짜>나 <천하장사 마돈나> 같은 작품을 통해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줬던 김윤석씨는 이 영화로 확고한 지점에 섰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김윤석씨가 폭발하는 연기 못지않게 폭발하지 않는 연기들에서 감탄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윤석씨의 연기는 생명력이 무척 길다고 봤어요. 하정우씨는 미래가 무척 기대되더군요. 이 영화에서의 연기는 캐릭터의 핵심을 잘 간파한 결과물이었습니다.
깜박할: <추격자>는 김윤석씨에게 마음껏 사지를 펼 수 있는 스페이스를 준 작품이에요. 누구나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하정우씨에게도 못지않게 <추격자>가 도약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그는 하정우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여요. *.* <가족의 탄생>에서 문소리씨를 보고 감탄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매우 어려운 도전이었을 겁니다.
눈꺼풀: 영화 속 이야기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에워싸고 있는 컨텍스트를 명확히 해석하는 시선이 약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어요. 그게 사회적인 측면이든, 인간의 심리적인 본성이든 말입니다. 주·조연배우들의 연기가 고르게 조율되지 못한 점도 아쉬워요. 그리고 미진의 일곱살짜리 딸은 관성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로 보입니다.
깜박할: 아무래도 중호가 평소 두르고 있는 껍데기를 자극할 감정적 뇌관이 필요했겠죠. 저는 영화를 보며 출장안마 서비스 여성이 한 손님에게 매맞는 도입부의 다소 무관한 시퀀스가 자꾸 떠올랐어요. 출장안마 서비스를 이용해 범인은 연쇄살인을 저지르잖아요. 그는 아마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희생자들을 보며 더욱 병적인 쾌감을 느꼈겠죠. 거꾸로 어떤 인간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방으로 매일 자기를 내던져야 하는 여성들의 일상적인 공포감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제 마음에 걸리는 대목은 결말부 구멍가게 시퀀스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네요. 다소 인물을 학대하는 느낌이 있어서요.
김혜리 “<잠수종과 나비>에서 처음엔 잠수종이 뭔가 했는데, 원시적 잠수복을 가리키는 말이더군요. 육체와 정신이 심하게 괴리된 상태에선 육체가 잠수복처럼 느껴지겠죠. 반대로 소리내어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떠오른 영감이 고스란히 간직되고 무성하게 가지를 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이동진 “보비가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베란다에 (이탈리아의 영화 스튜디오 이름인) 치네치타라고 이름 붙이는 걸 보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어요. 영화를 통해 결국 사람들은 삶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마음껏 비상하고 싶어하니까요.”
눈꺼풀: 그럼 다음 영화로 넘어갈까요?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제 대화명은 줄리앙 슈나벨 감독의 <잠수종과 나비>에서 따왔습니다. 이 영화는 감금증후군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오직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남자 보비(마티외 아말릭)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죠.
깜박할: 프랑스판 <엘르> 편집장으로 화려하고 활동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죠. 원래는 조니 뎁에게 제의됐던 배역이라고 합니다. 몸은 마비되어 있는데 시청각과 의식, 기억과 상상력은 멀쩡한 상태죠. 그야말로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상태죠. 처음엔 잠수종이 뭔가 했는데, 원시적 잠수복을 가리키는 말이더군요. 육체와 정신이 심하게 괴리된 상태에선 육체가 잠수복처럼 느껴지겠죠. 반대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떠오른 영감이 고스란히 간직되고 무성하게 가지를 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눈꺼풀: 지금도 깊은 밤에 깨어 있자니 눈꺼풀이 아틀라스가 떠받치고 있는 하늘만큼이나 무거운데, 이 눈꺼풀을 일일이 움직여 책 한권을 썼다니, 정말 생명의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더불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강하고, 글쓰는 작업이 그토록 지난한 걸 보면서 살짝 반성도 했고요.-_- 눈꺼풀만으로 소통해서 책을 써야 하는 보비로선 처음 글을 쓸 때보다 이미 쓴 글을 퇴고하는 과정이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저로선 잘 상상이 되지 않는 방식입니다만….
깜박할: 시사회에 온 기자들 모두 그랬을걸요. 저 역시 눈꺼풀은 물론 열 손가락이 멀쩡하면서도 책은커녕 원고 한 꼭지도 제대로 못 쓰는 자신이 새삼 한심했거든요. -.-
눈꺼풀: <잠수종과 나비>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씨 인사이드>와 연이어 보면 좋을 영화라는 생각을 했어요. 두 영화에서 전신마비로 고통받는 두 주인공들의 처지는 무척 흡사한데,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정반대이니까요. <씨 인사이드>는 죽을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남자의 이야기였으니까요.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위엄있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요.
깜박할: <비포 선셋>에 염세적 사람은 복권이 당첨돼도 우울한 부자로 살고 명랑한 사람은 불구가 돼도 휠체어에 앉은 유쾌한 사람으로 산다, 뭐 그런 식의 대사가 있었는데요. <잠수종과 나비>를 보면서도 인간 승리 드라마라기보다 본래 이 남자는 특별히 강인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어떤 상황이건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계속 사랑하는 거죠.
눈꺼풀: 서구에선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 생각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지배적이잖아요? 이 영화는 마비된 육체에 유폐된 자유로운 정신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런 인간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봤어요. 보비의 시점숏으로 표현된 초반 장면들에서 보비의 눈에 비친, 보비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처리도 그런 면에서 이해가 되지요. 바라본다기보다는 육체에 감금된 정신을 남이 들여다보는 시선이었잖아요? 초반 20여분간을 보비의 시점숏으로 찍은 것도 참 영리한 선택이죠? 그런 형식을 통해 관객이 한쪽 눈꺼풀밖에 움직일 수 없는 보비의 고통에 어느 정도 감정이입할 수 있게 하잖아요.
깜박할: 촬영 속도에도 변화를 줘서 코마에서 깨어난 어지럼증을 표현한 듯하더군요. 그런데 <클로버필드>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솔직히 혹시 영화 전체를 이렇게 촬영한 것일까 하는 두려움도 초반에 밀려왔답니다. -..- 감염을 우려해 한쪽 눈꺼풀을 꿰매는 장면까지 시점숏으로 찍었는데요. 실제로는 카메라 앞에 뭔가를 덧씌우고 꿰맸겠지만 섬뜩했습니다.
눈꺼풀: 보비가 눈꺼풀을 움직여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문장이 “나는 죽고 싶다”라는 게 그렇게 슬프더라고요. 그 말을 받아 적은 언어치료사가 화를 내고 나갔다가 잠시 뒤 들어와서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사과하는 장면 역시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어요.
깜박할: 보비의 생각을 전하는 보이스 오버가 농담을 던지고 이죽거리다가도,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어찌할 수 없는 비탄과 절망을 표현하니까 더욱 효과적이었죠? 제 경우 가장 감정이 격앙된 장면은 보비의 늙은 아버지가 차마 와서 아들을 보지 못하고 전화기 너머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울먹일 때였어요. 코마에 빠지기 전 아들이 아버지의 면도를 해주던 장면이 있어서 더욱 감상적이 되게 만들었죠. 아버지 역의 막스 폰 시도의 연기는 대단했습니다. +_+
눈꺼풀: 보비가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베란다에 (이탈리아의 영화 스튜디오 이름인) 치네치타라고 이름 붙이는 걸 보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어요. 보비는 온몸이 마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은 치네치타에서 회상력과 상상력으로 맘껏 뻗어나가는데, 그게 관객이 기본적으로 영화에 바라는 점이라는 거죠. 영화를 통해 결국 사람들은 삶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마음껏 비상하고 싶어하니까요.
깜박할: 흠, 예술을 통한 감금상태의 극복 혹은 초극은 줄리앙 슈나벨 감독이 지금까지 세편의 전기영화(<바스키아> <비포 나잇 폴스>)를 통해 되풀이 탐구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죠.
눈꺼풀: 사고의 순간을 무너져내리는 빙벽으로 표현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죠. 모든 것이 종결된 뒤의 엔딩 크레딧에서는 그 장면을 거꾸로 돌려 무너진 빙벽을 다시 올려붙임으로써, 간절했던 보비의 소망을 선명하게 응축해 보여주잖아요? 줄리앙 슈나벨은 화가 출신의 감독이어서인지 상징적인 이미지를 아주 잘 차용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바스키아> 를 보면서도, ‘화가 출신의 감독은 화가인 주인공 이야기를 다룰 때 전통적인 화술을 넘어서서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싶은 느낌이 있었죠.
깜박할: 그런 점 때문에 슈나벨의 영화가 예술영화인 척하는 관습적 드라마냐, 관습적 드라마인 척하는 예술영화냐 하는 망설임을 낳는지도 모르죠.^.~ 어머, 저 오늘 좀 심술궂네요.
눈꺼풀: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여전히 감정의 찌꺼기 같은 삶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도 인상적이었죠. 조강지처 같은 동거녀 셀린느가 헌신적으로 간호해주다가 애인 이네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보비 대신 받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세 사람 사이의 심리가 정말 묘한데, 그 장면의 끝에서 보비는 셀린느의 입을 빌려 이네스에게 결국 ‘매일매일 당신을 기다려’라고 말하잖아요? 이 영화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부분들을 무척 솔직하게 그려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깜박할: 사실 이 영화는 주인공을 둘러싼 여성들의 외적 아름다움과 너그러움을 환상적으로 극대화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셀린느의 헌신도 약간 과한 감이 있죠. 그나저나 현실에서 보비 곁에 머무른 것은 반대로 애인이었고, 마비 전에 이미 헤어진 아내는 그대로 헤어진 채로 살았다고 하네요. 자, 다음 영화는 진가신의 <명장>입니다. 참, <명장>과 앞서 이야기한 <추적자>에는 비슷한 장면이 있어요. 살아남고자 하는 최후의 몸부림으로 죽은 시늉을 하는 장면인데요. 긴장도 긴장이지만, 목숨이 뭔지 서글퍼지는 광경이었어요. <명장>의 첫 장면에서 태평천국군에 패한 장수 방청운(이연걸)이 부하들의 시체더미 사이에서 죽은 척해 살아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