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관련한 책부터 찾는 사람들이 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위로를 받기 위해, 계속 살아가기 위해. 룰루 밀러는 한 사람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에 대한 각종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 스탠퍼드대학 초대 총장이었던 그는 19세기에 활동한 생물학자(분류학자)다. 그와 그의 학생을 포함한 스탭들이 발견해서 직접 이름 붙인 물고기의 수는 당시 인류에 알려진 어류 중 거의 5분의 1에 달했다. 그런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1906년 4월18일 오전 5시12분, 리히터 규모 7.9로 추정되는 큰 지진이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강타해 그가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어류 표본이 든 수백개의 유리병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물고기 하나를 집어들고 바늘에 실을 꿰어 물고기의 목살에 이름표를 꿰매기 시작했다. 무용한 일 아닌가? 하지만 룰루 밀러는 조던이 결국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의 비밀을 알려주기에 적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삶이라는 실타래 풀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어두컴컴한 방에서는 사물을 볼 수 없다. 본다는 행위는 빛을 매개로 가능한 행위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사물은 ‘보이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조명 디자이너 조수민의 <빛의 얼굴들>은 우리의 시각 경험을 좌우하는 빛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빛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사물과 공간이기 이전에 ‘빛’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빛의 얼굴들>은 1장에서 빛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바로잡은 뒤, 빛과 사람, 빛과 공간, 빛과 사회를 차례로 이야기한다. 빛은 영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출과 일몰 시, 태양이 낮은 고도에 있어 지면을 측면에서 비추는 노란 태양빛과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며 진한 파란빛으로 빛나는 천공광이 만나 특별한 빛 환경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골든아워’라고 한다. 모든 존재가 부드럽게 빛나는 이 시간대는 하루 중 짧게 스쳐가는 순간이지만 많은 영화들이
씨네21 추천도서 <빛의 얼굴들>
-
세상의 자잘한 악이 싫어서 홀로 열심히 살아도,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의 주인공은 글 쓰는 프리랜서로 살며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성실히 살아왔다. 하지만 부동산 세계에 들어가며 달라진다. 전망 좋은 신축 빌라는 사자마자 바로 앞에 12층 빌딩이 세워지고 장마가 닥치자 곰팡이가 번진다. 보수 요청을 하려고 하니 시공사는 책임을 피하려고 부도를 내고 잠적해버렸다. 프리랜서라면 이미 다들 알고 있을 해촉증명서 제출에 시달리는 한편, ‘나’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기 위해 남들에게 꼭꼭 숨긴 장애로 점수를 얻을까 따져본다. 한때 문학이 가장 밝은 세계라고 믿었던 ‘나’였는데, 이제는 외벽 보수공사로 눈속임한 빌라를 팔아치우고 외곽 지대의 아파트로 떠나게 되었다.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 세계에 살다 보면 자잘한 악에 무감해진다.
우리가 디딘 세계 자체가 문제라는 의식은 <희고 둥근 부분>에서도 생생하게 나타난다. 기간제 교사로
씨네21 추천도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
네덜란드 시골의 작은 농장에 사는 야스는 냉장고 문을 열고 손톱으로 과자의 설탕을 긁어먹기 좋아하는 어린이다. 야스에게는 모든 경험이 차가운 유리를 만질 때처럼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상상이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가기도 한다. 다락방의 밧줄을 보며 아버지가 목을 매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하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스케이트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갈 수 있는 맛히스 오빠가 토끼 대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오빠가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호수 얼음이 녹아서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목욕 중에 오빠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말을 들은 야스는, 욕조에 오줌을 싸버린다. 이후 야스는 입고 다니는 코트를 절대 벗지 않는다. 지독한 변비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죽은 오빠의 시신 엉덩이에서 뭐가 더 나오지 않도록 솜뭉치로 막아놓았다는 말 때문일까, 똥을 빨리 싸지 않으면 두더지가 똥구멍에 들어가 굴을 팔 것이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야스는 몸에서 아무것도 내보내고 싶지
씨네21 추천도서 <그날 저녁의 불편함>
-
-
김현 시인이 이전에 출간했던 에세이집은 영화감독 켄 로치의 영화들과 노동자 친구들을 연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근면히 노동하는 친구의 거친 손,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을 믿지 않는 두 친구와 늦은 밤 소주를 기울이며 하염없이 슬퍼지던 기분, 아무도 언급하지 않으려 하는 세월호에 대해 쓸 때, 김현의 성실하고 맑은 문장들이 신기하게도 켄 로치 영화들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김현의 신작 에세이 <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에도 선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충실한 하루에 대한 낙관은 여전한데 그에 덧붙여 시인은 더 진솔하게 현실을 토로한다. 김현은 참으로 여전하면서도, 더 성숙한 어른이자 동료가 된 것 같다.
출판 편집자로 일하는 직장인,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을 지지하는 생활인, 시인이며 누군가의 애인이고 친구이기도 한 그의 이번 에세이는 유머러스하게 인간 김현을 내보인다. 책에 인스타 아이디를 쓰면서(여기 쓰면 얼마나 느는지 보겠다고 쓰고), 심심할 때마다 전국 팔도의
씨네21 추천도서 <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
책 제목 <이런 얘기 하지 말까?>를 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기자의 글쓰기(기획, 취재 등의 과정을 거쳐 목적이 확실한 기사)가 익숙했던 내가 ‘내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써야 할 때마다 든 생각이 ‘이런 얘기 해도 되나?’였기 때문이다. 혹은, 이런 얘기를 누가 읽는다고, 이런 얘기가 남한테도 의미가 있나, 라는 장벽이 가로막았다. 대중문화 기자로 일했던 최지은 작가 역시 자신이 겪은 일을 쓰기보다는 미디어라는 창을 한번 거친 글쓰기가 더 익숙한 방식이었을 거(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추측해본다. 거기다 ‘이런 얘기 하지 말까?’는 불특정 다수가 모인 자리에서 페미니즘이 대화의 소재가 될 때마다 여성들이 속으로 하는 생각이다. 괜히 분위기를 망치는 건 아닌지, 상대가 나를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면 어쩌지? 불평등한 사회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은 그런 오해를 감수하고 ‘이런 얘기’를 부득불 꺼내는 여자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용기내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
씨네21 추천도서 <이런 얘기 하지 말까?>
-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기, 차분하게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당신의 독서 리스트를 풍부하게 만들 만한 책들을 소개한다.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2월의 책
-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는 왜 현대에도 고전이라 불리는가? 무엇이 특별한가.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가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깃들던 1938년에 쓰기 시작해 40년에 처음 발표한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일리아스>를 읽는 독법을 제시하고, 세계의 폭력에 대해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존엄을 논한 글이다. 이 글은 이번에 처음 번역·출간되었는데,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와 함께 한권의 책으로 묶였으며, 시몬 베유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작 <중력과 은총>과 나란히 선을 보였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라는 제목과 “<일리아스>의 진짜 주인공, 진짜 주제, 중심은 힘입니다”라는 첫 문장처럼, 이 글은 <일리아스>가 힘에 대한 서사시임을 밝히고 그 주장을 증명하는 식으로 쓰였다. 호메로스가, 또는 고대 그리스인이 왜 힘에 대해 썼는지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가 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다. 선과 악으
서사시적 천재성,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
<내 친구들은 왜 산으로 갔을까>를 쓴 아레 칼뵈는 노르웨이의 코미디언이다. 도시에 살던 그가 중년이 된 어느 날, 친구들이 모두 산에 빠져 있어 자신과 소원해졌음을 깨닫게 되면서 그 자신도 산으로 향한다. 이는 비단 중년에만 해당되는 일도, 노르웨이만의 현상도 아니다. “우리는 삶의 어느 한 지점에서 별안간 자연에 애정을 지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아레 칼뵈는 자신이 예외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가 친구들이 산에 빠진 이유를 탐색하는 과정은 일단 책에서부터다. 노르웨이의 모험가 엘링 카게를 인용하면 이렇다. “만약 등산이나 세일링을 통해, 아니 심지어는 걸어서도 세상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 나는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나만의 방법을 통해 휴식을 취하곤 한다.” 세상과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산에 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레 칼뵈는 코미디언이므로, 모범답안 말고 픽션에서 자연으로 도피한 이들의 결말도 추적해보었다. “이들 중 10퍼센트는 무엇을
자연은 어려워, <내 친구들은 왜 산으로 갔을까>
-
“사람은 신선한 공기와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없어도 절대 살아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는 것.” 요 네스뵈의 <킹덤>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 가족의 사랑에 대한 범죄소설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말이 가족의 범주를 정하고, 내부를 지키기 위해 외부를 배척하거나 공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될 수 있을까. 요 네스뵈는 두 형제를 중심으로 범죄자의 심리를 추적해간다. 요 네스뵈의 대표작인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연장에서가 아니라 ‘스탠드 얼론’, 즉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는 소설 <킹덤>은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로위’라는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로위는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친구, 애인, 이웃, 지역, 국가 모두를 앞세우는 가치가 바로 가족이라고 교육받는다. 로위는 동생 칼을 잘 돌보려고 노력하는데, <킹덤>은 초반부터 로위의 세계가 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씨네21 추천도서 <킹덤>
-
김영란 전 대법관의 독서 에세이. 어린 시절에 읽은 소설들에서 시작해,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 작가들을 지나, 현대인의 삶을 담아낸 이야기들에 도달하는 <시절의 독서-김영란의 명작 읽기>는 개인의 성장사이자 생애사가 책을 통해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저자의 삶이 중심에 있고 책이 거드는 방식이 아니라, 독서 목록을 재구성하면서 개인사가 살짝 언급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저작이 비소설을 포함해 다수 남아 있게 된 이유에는 남편 레너드 울프가 출판업자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문학사를 위해서는 너무나 행운이지만 버지니아는 마치 몸에서 뽑아낸 거미줄로 집을 짓는 거미처럼 작품 속에 자신의 인생을 온전하게 녹여넣는 방식으로 글을 써왔으므로 글 밖에서는 온전한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런 버지니아 울프의 구심점이 된 것이 바로 블룸즈버리그룹이었는데, 저자 자신은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발을
씨네21 추천도서 <시절의 독서-김영란의 명작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