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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는 어떻게 회고의 대상이기를 거절하는가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다른 분야의 비평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초대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연극과 미술 비평이 더는 존재하거나 볼 수 없는 작품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영화 비평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인식했다. 관람한 이가 드문 작품에 관한 글을 쓰면서 영화 비평 역시 때때로 그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생각했다.

목적에서 떨어져나온 선동

<새로운 땅>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요리스 이벤스 회고전이 진행되었다. 이 글은 회고전에 맞춰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 세계를 조망할 의도로 쓴 것이 아니다.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를 오늘날 체험하는 일과 그 의미에 관한 기록이다. 더 솔직하게는 같은 날 동시에 관람하게 된 두 영화를 중심으로 어떻게든 이벤스의 영화 세계와 접속해보려는 시도다. 그의 작품 중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 특히 초기작 <우리는 건설한다>(1930)에 주목했다. 긴급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그 목적의 시효가 다한 뒤에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이 작품이 던진 의문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실시간의 목적을 잃은 영화는 당대의 풍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록사진처럼 인식되거나, 영화적인 형식 요소들의 집합으로 기원의 움직임을 담은 대상이 된다. 그런데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는 풍속을 보존한 영화로 인식되는 한편, 모순적이게도 그것과의 단절을 지속한다.

<우리는 건설한다>는 건설노동조합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영화로 노동자에게 조합 가입을 권유하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채 제작되었다. 영화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 목적의 한시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노동조합 가입 권유를 위해 만들어졌음을 인식할 때 영화는 투명해지기보다는 복잡해진다. 먼저 영화가 당시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데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을지 의문스럽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회사에 대항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를 위해 필요한 서사는 노동자의 어려움과 회사의 폭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서사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노동의 기쁨과 활력을 담는다.

물론 오늘의 시선에서 열악함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벽돌을 나르고 쌓는 일을 하는 노동자의 맨손에 눈길이 가고, 간척 작업을 위해 무거운 돌을 반복해서 바다에 던지는 작업은 아찔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이미지를 노동자의 열악함이나 무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위험하거나 힘든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노동의 숏은 이후 조합원들이 여흥을 즐기는 숏의 에너지와 거리감 없이 이어진다. 기구에 몸을 맡긴 채 놀이의 시간을 즐길 때처럼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는 수시로 맺어진다.

영화는 그 관계성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물론 감독은 특정한 목적성에 부합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건설한다> 속 농지 개간 장면을 모은 작품에서 출발해 이를 확장한 <새로운 땅>(1933)에는 농민의 어려움과 자본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분명히 담겨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설한다>는 예외적인 영화인 것일까.

중단되는 말과 연결하는 이미지

<새로운 땅>이 말의 영화라면, <우리는 건설한다>는 침묵의 영화다. 이때 침묵은 단지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사실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나 그와 무관한 것도 아니다. 무성영화에서 말은 자막을 통해 얼마든지 발화될 수 있다. 그런데도 영화는 객관적인 사실을 적시한 중간 자막 외에 누군가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말’이 드러나는 유일한 부분은 노동조합의 모임에서 지도부 연설 장면을 보여줄 때다. 그마저도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이라는 호명에서 그칠 뿐 이후의 연설은 철저히 삭제된다. 이러한 중단은 그가 이미지의 언어를 신뢰했다는 분석만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데가 있다. 중단된 말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영화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관객의 신경을 자극한다.

이미지가 중단된 말을 대신한다고 볼 때 주목되는 숏이 있다. 건설 장면 중 기구를 이용해 공중에 매달린 쇠로 된 구조물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나무를 튼튼하게 고정하는 작업을 보여주는 시퀀스가 등장한다. 쇠의 낙하운동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던 숏 가운데 예기치 않은 시점숏이 끼어든다. 박히는 나무의 시점에서 쇠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숏이다. 관객은 순간적으로 마조히스트처럼 곧 자신을 압박해올 기계를 매혹된 듯 바라보게 된다. 하나의 시점 속에 나무와 노동자와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이 녹아든다.

이는 <바람의 이야기>(1988)에서 사막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을 보여주던 방식을 연상시킨다. 자신을 연기한 요리스 이벤스는 천진한 미소로 바람을 맞는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바람의 힘을 홀린 듯 만끽하는 얼굴 이미지 곁에는 바람에 천막이 날아가지 않도록 지탱하는 사람들의 사투를 보여주는 이미지가 놓인다. 이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어떤 것의 위험성과 그것이 주는 매혹은 그의 영화 속에서 좀처럼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다.

중단되었던 말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비로소 돌아온다. <우리는 건설한다>의 마지막 자막은 중단된 연설의 이어짐이자 작가의 말이다. ‘노동자여, 자신의 힘을 알라! 단결조직!’이라는 마지막 문장 속에 영화가 보여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노동자가 뭉쳐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연약해서가 아니라 힘이 있기 때문이다. 위협적인 기계들과 반복적인 노동의 손끝에서 탄생한 건물의 겉모습과 이들의 조화가 만든 도시의 외양은 그 자체로 노동자의 힘을 증명한다. 노동자와 건설 기계와 도시의 외양 사이 긴장 관계는 이벤스가 초기 영화에서 자연현상이나 사물을 조망하는 방식과 연결된다.

벨라 발라즈는 요리스 이벤스의 초기 대표작 <비>(1929)와 <다리>(1928)를 분석하면서 두 영화가 분산된 이미지를 통해 특정 시간과 장소에 한정된 현상이나 사물이기를 그치고 시각적인 변주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들뢰즈는 이에 덧붙여 비나 다리가 개별적인 물적 상태나 개념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들을 불러들이는 ‘독특성의 집합’으로 정의했다. <우리는 건설한다>에서 그 대상은 기계와 건축물과 인간으로 이미 하나의 집합을 이루며, 이 구체적 물질성은 추상적인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요체다. 인간의 힘과 기계의 힘과 그것이 이루는 도시의 힘은 대결과 합치를 포괄한다는 의미에서 ‘절합’된다.

미래에서 온 현재

<바람의 이야기>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제작된 반전영화 역시 노동조합 가입 권유 영상만큼이나 한시적이다. 요리스 이벤스를 비롯해 크리스 마르케, 장 뤽 고다르, 아녜스 바르다, 알랭 레네, 클로드 를르슈, 윌리엄 클라인 등이 협업한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1967)는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미국을 비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반전의 주제를 위해 효과적인 이미지는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지역과 시민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에는 끔찍한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이 중심은 아니다.

이는 많은 감독의 협업에서 비롯된 결과일 수 있다. 영화에서는 통일되지 않은 양식들이 서로 부딪힌다. 고다르는 총기를 설명하듯 자신이 촬영 중인 카메라의 정면과 측면, 부분 클로즈업과 푸티지를 교차하며 영화를 찍는다는 것과 총을 쏘는 전쟁 사이의 유비 구조를 반성적으로 재건한다. 알랭 레네는 베트남전쟁을 넘어 강대국이 개입한 전쟁의 역사를 거론하며 현재 진행 중인 싸움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발언을 쏟아내는 남성을 보여준다. 어떤 방식이든 베트남전쟁이 지구 어딘가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이벤트임을 강조하는 방식과는 멀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이들의 위치가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측면은 베트남에서 촬영된 장면들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로버트 플래허티(<북극의 나누크>(1922))와 장 루슈(<신들린 제사장들>(1955), <나, 흑인>(1958))가 자신의 영화에서 스테레오타입을 연기하는 현지인을 보여준 것과 연속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요리스 이벤스는 전시 상황에 대한 베트남 국민의 결연한 대처를 집단 군무와 카메라와 관계 맺는 퍼포먼스 형식으로 보여준다. 풀숲에 잠복해 있던 무장한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전진하고 멈춤을 반복하는 숏을 통해 이들의 싸움이 땅과 자연의 힘을 빌린 싸움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가 베트남 인민을 보여주는 방식은 <우리는 건설한다>에서 노동자를 보여주는 방식과 통한다. 노동자에게 자신의 힘을 알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영화는 베트남 사람들이 그들의 힘을 자각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노동자들의 힘은 그들의 손에서 탄생한 건축물과 도시의 모습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베트남 사람들에 의한 힘의 결과물이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건설한다>가 마지막 자막을 통해 노동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임을 분명히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는 베트남전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관객으로 초대한다. 이때 멀리 떨어졌다는 의미는 공간적인 거리감을 지시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관객에게는 시간적 거리감까지 덧붙는다.

영화는 관객에게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선동하거나, 그들에게 행해진 잔혹한 폭력을 보고 전쟁의 위험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뚜렷한 목적성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당대의 관객에게 미칠 영향은 의심한 것 같다.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들이 기다려온 이가 어쩌면 미래의 관객일 수 있음을 들려준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베트남은 베트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우는 것이며, 우리는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일종의 학대당하는 신으로서 베트남인이 쌓아올린 건축물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폭발 이후의 잔해로 남아 먼 훗날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구축되는 것이다. 영화는 미래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순식간에 현재성을 낚아챈다. 오늘날에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이 ‘그들’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싸움임을 인식할 눈을 제시한다.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는 고정된 것에 움직임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고정된 것을 통해서만 움직임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가 궁극적으로 관계에 관한 영화임은 그 때문이다. 이벤스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카메라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라 정의했다. 움직임과 구분되는 생명성은 움직임으로 인해 창출되는 공간성과 함께 시간성을 내포한 말이다. 영화에서 포착된 말과 이미지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제는 과거가 된 현재가 아니라 언제라도 우리를 그 당시의 현재성으로 돌려놓고야 마는 생포된 시간의 흔적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는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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