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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를 맞이하다
2001-03-21

낯선 길 위의 초상, 황량한 이미지의 블루스

<시간의 흐름 속에서>(1976)의 후반부에서 로베르트는 기차역 근처에서 한 어린 소년을 만난다. 그 소년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건

노트에 적고 있다. 철로, 하늘, 구름, 가방을 든 남자, 검은 눈, 주먹, 돌 던지기…. 영화 속에서는 아주 잠깐 등장하는 이 장면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꽤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 소년의 사소한 행위란 바로 빔 벤더스 감독 자신이 영화를 구축하는

방식, 영화에 대한 견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벤더스의 영화란 마치 어린아이가 무언가 난생 처음 보는 어떤 것을 접해서 기뻐하고

그것을 자기 기억 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애쓰는 행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그런 ‘순수한’ 시선을 가지려고

하는 것. 벤더스가 정의한 영화의 속성이란 일차적으로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영화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

벤더스는 기본적으로 영화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또 ‘탐구’하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화들 속에서

그것들이 만들어진 시대, 도시들,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을 다루기를 원한다. 그런 사고가 벤더스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벤더스는 지금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그 이전에, 오즈 야스지로의 자취를 더듬으려 했던 <도쿄가>(1985)

이전에, 그리고 니콜라스 레이의 마지막을 기록한 <물 위의 번개>(1980) 이전에, 이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던 시네아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도시의 앨리스>(1974)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같은 경우는 스토리상의 시간 순서대로 촬영함으로써 발견이 드러난

바로 그 시간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사물을 ‘전시’하려고 하기보다는, 벤더스의 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사물의 상태’를

기록한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뉴 저먼 시네마의 ‘실존주의자’ 또는 ‘새로운 감성’(Neue Sensibilitat)의 영화감독

같은 벤더스에 대한 호칭들은 모두 ‘다큐멘터리스트’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띠는 것도

분명 영화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와 관련있을 것이다. 정체해 있기보다는 유동할 때 이 세계와 접할 기회가 훨씬 많지 않겠는가 말이다.

미국, 무의식의 주인 혹은 캔버스

벤더스가 영화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해준 매개는 주지하다시피 미국영화들이었다. 그가 50년대를 다룬 최고의 다큐멘터리들이라고 간주하는

영화들, 즉 하워드 혹스와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들이 그로 하여금 픽션영화는 종종 한 시대의 가장 뛰어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몸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확실히 벤더스는 미국영화와 미국문화로부터 영화적 자양분을 섭취한 감독이다.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영화를 ‘발견’했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전에 평론가로 먼저 활동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앞선 누벨바그 세대와 동류항에 넣게 만들어주는 것은

미국영화에 깊이 매혹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미국문화와 미국적 풍경을 비롯해 미국적인 것에 대한 ‘망집’에서 고다르나 트뤼포의 그것은

벤더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의 이 집착은 80년대 이후 벤더스의 퇴행에 대한 한 가지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벤더스는 구명대(life-savers)로서 미국영화와 미국의 록 음악이 없었더라면 미치지 않고 유년기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런 탐닉은 단지 개인적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인들은 대개가 어느 정도는 미국문화에 동화돼 있었는데, 그건

그들이 파시즘의 수치스런 기억을 망각하려는 데서 생긴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과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벤더스와 미국문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대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에 나오는 “양키들이 우리의 잠재의식을 식민화했어”이다. 하지만 이걸 아메리카가 깊숙이

침투한 미국화한 독일인의 심성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언설로만 보면 좀 곤란하다. 지금껏 벤더스는 미국적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을

가한 적은 있어도 완전히 등을 돌린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인 친구>(1977) 같은 경우는

유럽에 남아 있는 미국인이 과연 어떤 악행을 일삼고 있는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니콜라스

레이와 새뮤얼 퓰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미국식 스릴러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벤더스와 미국문화 사이의 관계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또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심지어 그것에 대한 증오를 포용하기까지 하는 관계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80년대 초반 프랜시스 코폴라의 초청으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했던 벤더스가 결국엔 끔찍한 ‘악몽’만을 경험하고 독일로 돌아온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벤더스가 이후에 미국문화를

처절하게 혐오했느냐고 하면 전혀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파리 텍사스>(1984)를 예로 들자면 그것은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감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지만 또한 미국적인 것, 그것의 ‘황량한 아름다움’을 그린 우수 어린 블루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영화는 존 포드의 <수색자>에

바치는 벤더스의 오마주이기도 하지 않았던가(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임무’를 수행하고 그리고는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로 떠나는 트래비스라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수색자>의 이산과 공명한다). 비교적 근작에 속하는 <폭력의 종말>(1997)에서는

아예 LA라는 도시 자체의 초상을 만들어냈던 벤더스는 최근 이렇게 말했다. “나는 LA를 좋아한다. 그곳은 너무나 텅 빈 캔버스여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위에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땅이 돋보이는, 음악이 돋보이는

벤더스에 대한 비평문들의 상당수는 그에게 영향을 준 미국영화들 가운데 하나로 <이지 라이더>(1969)를 꼽는다. 벤더스 자신도 그 영화에

어느 정도 매혹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화평론을 쓰곤 하던 젊은 시절에 그는 그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것은 아름답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화이다. 두대의 커다란 모터사이클이 지나가는 땅이 아름답고, 우리가 듣는 음악이 아름다우며, 데니스 호퍼가 연기만 할

뿐이 아니라 연출까지 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벤더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어떤 평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벤더스의

영화경력이 <이지 라이더>의 리메이크라고 본다면 너무 단순한 도식에 빠지는 것일 터이다. 단지 이 글에서 우리는 벤더스가 옹호하는 영화,

또 그가 지향하는 영화가 어떤 타입의 것임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땅(풍경)이 아름다운(돋보이는) 영화, 그리고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다. 여기에서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벤더스의 로드 무비란 무엇보다도 우리가 보고 듣는 것, 그것의 ‘묘사’(description)에

치중하는 영화가 될 것이었다. ‘묘사’라는 이 단어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벤더스의 많은 영화들은 대체로 인물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둘러싼 것(ambience), 즉 풍경이나 음악에 치중하는 영화들이다. <도시의 여름>(1971)에서처럼 친구를 찾으려고 하든,

또는 <도시의 앨리스>에서처럼 어느 순간 자기 손에 맡겨진 어린 소녀의 할머니를 찾아주려고 하든, 그 인물들의 추구 행위란 건 그들을 둘러싼

물리적 공간‘들’을 탐사하려는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벤더스의 영화들이 공간적 자리바꿈을 해나갈수록 그 안의 인물들은 ‘빗나간 움직임’으로

발을 디뎌간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쯤에도 그들은 어떤 의미 있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그들은 외적으로는 움직였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정체 상태인 것이다. 벤더스의 영화들이 자아내는 정서적인 공허감은 상당 부분 여기에서 연원한다. 결국 벤더스의 로드 무비들에서

행위자(actor)와 그를 둘러싼 환경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그 영화들은 인물들이 지나치는 풍경, 또는 도시에 관한 자발적인 다큐멘터리이다.

비록 오래 전이긴 하지만,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할 때 벤더스는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나는 항상 풍경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난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그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벤더스의 세계에선 음악도 배경 요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스토리가 되기도, 또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단편영화를 만들던 당시에 이미 벤더스는 그런 가능성을 실연해 보였다. 단편 <알라바마>(1969)에서

그는 밥 딜런이 부른 와 지미 헨드릭스가 부른 같은 곡의 차이를 영화적인 주요 요소로 이용했던

것이다.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서서

이처럼 ‘서술’의 방법보다는 주로 묘사의 방법을 통해 구축되는 벤더스의 영화들은 자연히 ‘이미지’ 중심적인 영화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감각주의적인 ‘이미지 메이커’(image-maker) 벤더스는 오래 전부터 그 (순수) 이미지라는 것(과 영화라는 것)의 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던 영화감독이었다.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그의 사유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에서 ‘시네마의 죽음’을 목도했을 때처럼 다소

부정적인 색채가 짙었다. <도시의 앨리스>의 저널리스트 필립은 그 자리에서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폴라로이드의 위력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한다. 그것 때문에 그는 세상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알고보니 현실을 복제한다는 그 이미지는 리얼리티

자체와도 별 연결점이 없는 것만 같다. 앨리스의 할머니를 찾는 데 할머니 집의 사진은 도통 도움이 되질 못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주조하는

테크놀로지가 여기서 한참을 더 발달한대도 사정이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 <이 세상 끝까지>(1991)에 등장하는 20세기 말의 인간들은

비주얼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상용화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젠 인간의 꿈과 기억마저 이미지로 재현하는 경이적인 테크놀로지를 개발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하이테크 미디어는 사람들을 이미지에의 중독증에 빠뜨린다. 해결책은 스토리텔링이라는 전통적인 기술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벤더스는 이미지와 영화의 문제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리스본 스토리>(1994)에서 영화감독인 친구의 부탁으로 리스본에

온 녹음 엔지니어 필립은 그 친구가 종적을 감춘 것을 발견한다. 친구는 비디오 테크놀로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도대체 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결말부에서 필립은 친구에게 말한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영화를 찍으라고, 그러면 영화는 아직도 그것이

100년 전에 했던 일을 할 수 있다고. 필립의 그 전언은 시네마가 이리저리 착종된 이 복잡한 현실에서 사실 지나치게 나이브한 결론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면 어쩌면 그건 벤더스 자신을 위한 예언 내지는 자기 암시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면이 있다.

90년대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던 벤더스가 자기 자신은 철저히 지운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오랜만에 감동을 만들어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을 찾아 진실하게 찍었고 그것만으로도 소박한 감동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필립의 말이 그르지 않았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