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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 인터뷰
사진 정진환김혜리 2001-12-05

“어둠과 밝음이 분명한 멜로를 원했다”

소년처럼 해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슴속에 늪 하나를 품고 있는 주인공 와니처럼, <와니와 준하>는 빛과 어둠이 동거하고 청춘의 천진함과 운명의 음험함이 공존하는 묘한 멜로드라마다. 그래서일까. 두번쯤 보아야 비밀과 매력을 온전히 드러내는 이 숫기없는 영화는, 개봉 첫주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두드러지지 않는 수의 관객을 모았다. 2년에 걸쳐 관객에게 보내는 이 수줍은 첫 번째 러브레터를 고쳐 쓰고 올해 늦봄부터 늦여름까지 필름에 옮긴 김용균(32) 감독은, 단편 <그랜드파더> <휴가> <저스트 두 잇> 등을 연출한 영화제작소 청년 출신의 신인. 그에게 <와니와 준하>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들과 가꾸어온 요람인 영화제작소 청년을 청년필름이라는 튼튼한 집으로 고쳐 짓는 첫 기둥이기도 하다. 한번 바라보기로 작정하면 대상의 미동도 놓치지 않을 듯 침착한 눈빛을 가진 그와의 대화에서는 ‘진심’, ‘취향’, ‘관객’이라는 단어가 퍽이나 자주 등장했다. 고통을 잘 극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여자와 남자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에게 “그럼 계몽적인 영화인가요?” 묻자 그제야 단단한 시선이 웃음으로 허물어졌다.

-개봉날 무슨 생각을 했나.

=<와니와 준하>는 청년필름의 공식 창립작품이다. 찍을 때는 맘대로 했지만, 개봉일에는 고용감독도 아닌 입장에서 흥행 스코어가 부담스러웠다.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고마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성적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에 영화가 관심권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어찌 보면 <와니와 준하>는 성인으로서 삶의 틀을 잡아가는 20대의 성장드라마다. <휴가> 등 단편들에도 성장하는 젊은이에 대한 관심이 비친다. 고교 때 밴드도 하고 가출도 했다고 들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소년이었을 것 같다.

=살다보니 의외로 가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많더라. (웃음) 내가 자란 소도시 진주는 지역의 교육 중심지라 중·고교 시절부터 유학 온 친구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부모로부터 일찍 독립한 아이들이었다. 그중 일부는 공부에 열중했지만, 일부는 엇나가서 술, 담배, 인생 고민에 더 열심이었다. 후자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내가 너무 고지식하게 살지않았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6인조 밴드를 구성해 리듬기타도 쳤다. 고3이 되자 대학을 가지 않고 음악을 계속하리라 생각했다. 정말 ‘와이키키 브라더스’ 되는 거였는데. 멤버 중 반수가 다른 진로를 택해 팀이 깨지고 말았다.

-‘순정영화’ <와니와 준하>를 기획한 데에는 기존 멜로드라마에 대해 관객으로서 느낀 아쉬움도 작용했을 것이다.

=해피엔딩을 ‘위한’ 멜로영화, 사랑을 쌓아나가 행복한 결말로 가는 여정이 정해져 있는 영화, 병이나 사고로 인한 부재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슬픔을 의도적으로 강요하는 멜로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원했다. 기획면에서도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영화를 더 좋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차피 내 영화도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다만 어떻게 새롭고 신선하게 접근할까를 고민한다.

-<와니와 준하>는 20대를 말하는 영화로 스스로를 규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10대, 20대의 경험을 말하려 하는 감독들의 경우 그 세대에서 한참 멀리 온 나이가 되어서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되곤 한다.

=녹음실에서 기다리며 <고양이를 부탁해>를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해당 연령층의 관객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많이 보지 않았다. <와니와 준하>의 경우는 세대보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로 나눠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남성성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25살 전후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면서 여성성에 눈뜨게 됐다. 그리고는 마초적인 것이 점점 싫어졌다. <와니와 준하>의 관객 반응을 보면 여성이나 여성성이 강한- 겉보기에 여자같다는 뜻이 아니라- 남자들이 한결 긍정적이다.

-비주류로 취급되는 동성애,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동거, 변형 가족의 묘사를 영화 안에 심상하게 묻어놓았다. 남다른 조건을 안고 살아가는 이 인물들이 자신의 ‘다름’에 대해, 피해의식이나 은근한 우월감이 없고 쿨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일반시사에서는 게이 캐릭터가 나오는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다.

=웃음에는 솔직히 당황했다. 기획회의를 통해 그런 인물들을 하나씩 넣은 게 아니라 내 취향 또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금기시된 소재와 설정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사회가 이런 대상을 낯설어하고 불편해하고 매도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도 있었다. 그럴수록 이들을 확대하고 보편화해서 똑같은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와니와 영민을 이복남매가 아닌 친남매로 설정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나.

=개인적으로는 친남매인 쪽이 더 재밌다. 그러나 소재나 상황 자체가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회자되면 이 영화에서 본질적인 부분인 인물이나 심리가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정선을 고민한 결과가 현재다.

-와니와 준하의 동거생활 묘사에서도 베드신은 최소화했다.

=개인적으로 에로틱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저 이번 영화에서는 그쪽으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거짓말>의 메이킹필름에 참여한 것도 섹스를 ‘제대로’ 찍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주로 느꼈으면 했던 감정은 천진함, 순수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베드신이 들어가더라도 구조적으로 비중이 미약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어설프게 건드리게 될 것 같았다. 함께 사는 관계에서 섹스는 무척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떤 시기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와니와 준하가 그런 시기 아니었을까.

-단편 시절에는 주로 스스로 카메라를 잡았다. <와니와 준하> 촬영에 원칙이 있었나.

=화면의 깊이감에 대해서는 촬영감독과 처음부터 합의했다. <와니와 준하>의 화면은 예쁘지만 콘트라스트가 분명하다. 기존 멜로드라마의 화사하고 뽀얀 평평한 화면과 조금 다르다. 어떤 주제를 다루어도 어둠과 밝음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와니의 고백이 아버지의 죽음을 야기한다. 영민과 말없이 유학을 떠나도 될 일을 왜 굳이 운전중인 아버지에게 충격을 주냐고 농담처럼 말하는 관객도 있더라.

=평소 ‘충동’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입 밖에 내지 않을 수도 있고 누가 추궁하는 것도 아니지만 와니는 영민에 대한 사랑을 어떤 형식으로든 소리내어 말해야만 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와니와 내가 닮은 부분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만화 기법을 영화에 옮겨오는 과정에서, 조금만 더 지그시 응시하면 감정의 파고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부분에서도 편집 리듬이 규칙적으로 갔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편집이 더 좋았다는 말도 들었다. 잘 모르겠다. 단번에 재료를 맘대로 요리하거나 객관적이 되긴 어려운 것 같다. 어쨌든 현재 113분의 러닝타임도 잔잔한 멜로영화로서는 긴 편이라고 생각했고 더 길어지는 건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단편 시절에는 유럽영화들을 좋아했는데 직접 장편을 만들고 나서는 아시아영화의 리듬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최근에는 <햇빛 쏟아지던 날들> <귀신이 온다> <하나 그리고 둘>을 좋게 봤다.

-점프 컷 사용이나 애니메이션같이 다른 매체를 쓰는 시도 등 형식적인 유희에도 무관심한 편이 아닌 것 같다.

=첫 장편이라 더 조심하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한 건 정서와 인물이니까 스타일이 관객의 시선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편에서 그런 욕심이 앞서 실패한 경험도 있어서 더욱 신중했다.

-<와니와 준하>의 애니메이션은 완성도가 높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애니메이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첫사랑의 신화와 사랑의 운명성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적인 사랑의 굴곡을 침착하게 그린 실사 부분이 갖고 있는 멜로드라마로서의 혁신성을 가리는 면도 있지 않았나.

=영화의 흐름이 닫히는 느낌이 있긴 하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애를 먹었다. 지금은 영화가 순정만화처럼 포장돼 있고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논의가 가장 두드러져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영화에 애니메이션을 쓰려는 욕구가 워낙 강했다. 관객도 좋아한다. 내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영화의 맥락을 잘 이해해주는 것이고 따라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보는 것은 참 긴요한 일이다. 다른 선택을 해서 애니메이션 부분을 뺐다면 실사 부분이 지금보다 더 완성도가 높아져야지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거, 동성애 등 이 영화의 주제와 갈등, 개성이 더 잘 짜여진 구조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편애니메이션을 연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계획은 없다.

-첫 영화를 마쳤다. 연출 방법론에서도 나아갈 방향이 보이는지.

=<와니와 준하>에서는 영화의 톤과 현장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해 말수를 아끼고 기다리는 태도를 취했다. 노력했다. 느낀 바가 있다면, 감독은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한 프로젝트의 핵심 라인을 쥐고 누구보다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제안을 하고 프로덕션이 흔들릴 때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이 부족하고 게을렀는지가 보인다. 얼마 전 <대부>의 DVD에서 당시 코폴라의 작업 모습을 보았다. 거대 예산영화를 풋내기 감독에게 맡기고 불안을 느낀 제작사가 여차하면 편집을 대신할 감독까지 대기시켜놓은 상태에서, 그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준비하고 노력했나를 보며 좋은 감독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새삼 느꼈다.

-앞으로도 청년필름에서 계속 작업할 계획인가.

=같이 갈 거라는 전제는 확실하다. <와니와 준하>는 청년필름이 모든 프로덕션을 독자적으로 해결한 첫 작품이고 이번에 축적된 제작력은 당연히 <질투는 나의 것>에 발전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와니와 준하>는, 그저 정리하고 끝내지 않고 대안을 낼 때까지 회의를 끌고 나가는 청년필름의 방식에서 큰 힘을 얻었다. 나의 결핍을 많은 사람의 힘과 통제가 메워주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전적으로 거기서 나왔다.

-결국 대학 시절부터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함께 성장한 <해피 엔드>의 정지우 감독과 나란히, ‘감정’에 관한 영화로 장편 극영화 데뷔전을 치른 셈이 됐다.

=지우와 나는 20대를 온통 같이 보냈다. 결혼식 비디오, 홍보 비디오를 찍으며 청년 사무실 살림을 꾸려가면서. 둘이 장편영화에 착수할 때쯤 되자 오래된 연인처럼 그냥 바라보고 특별한 대화가 필요치 않은 경지가 됐다. ‘청년’이 영화운동 주체였기 때문에 우리도 사회,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짐작하는 시선도 있지만 그건 좁은 시각인 것 같다. 정지우 감독도 나도 오락영화를 하더라도 진심을 담아낼 거라는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영화에 관심이 깊어 보인다. 그렇다면 <와니와 준하>에서 경험한 스타, 장르영화에 대해서도 길게 연구하게 될 텐데.

=관객과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노력하면 뭔가 이룰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기고 그것이 내 장편영화 커리어의 목표가 될 거다. 보기와 달리 근성이 있다. (웃음) 스타에 대해서도 두려움과 낯섦이 있었는데, 첫 영화를 통해 그런 환상과 거리감이 사라졌다. 스타 시스템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저예산영화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많은 사람이 보는 웰메이드 영화를 하고 싶다. 장르를 연구하려는 욕심도 생겨 영화를 보면 예전 같지 않게 잘게 뜯어본다. 지금은 내게 남아 있던 ‘예술한다’는 허위의식을 지워가는 시기 같다. 대중과 호흡하고 싶다는 말이 돈 벌고 싶다는 뜻만은 아닐 거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직업관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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