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프랑스 파리 출생.
프랑스인 의사 아버지와 스위스인 은행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파리7구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로 건너가 1940년 스위스 국적 또한 취득. 1948년 부모가 이혼하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1949년
소르본대학교 입학, 민족학 전공.
소르본대학교가 있는 파리5구 카르티에 라탱을 중심으로 에릭 로메르가 주도하는 영화 연구 모임, 시네 클럽(ciné-club)에 심취. 그의 곁에는 훗날 <카이에 뒤 시네마>의 주축이 되는 앙드레 바쟁, 누벨바그의 주요 이름들인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등이 함께였다.
1950년
영화지 <가제트 뒤 시네마>(Gazette du cin´ema) 창간 멤버.
시네 클럽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1950년 6월부터 11월까지 총 5개호 발간. 만 19살의 고다르는 한스 루카스라는 필명으로 뛰어난 문학적 지식이 돋보이는 글을 썼다. 조지프 L. 맹키위츠의 <이방인의 집>(1949)에 관한 짧은 리뷰로 시작해, 9월호에 발표한 ‘정치영화를 향하여’(Pour un cinéma politique)는 소련영화의 이미지를 나치 영화의 미학에 빗대어 예찬, 도발적인 논지로 주목받는다.
1951년
20살이 되자 가족의 경제적 지원이 끊어져 생활고를 겪다.
거리에서 음식과 푼돈을 훔치는 등 일종의 방랑 생활을 자처.
1952년
<카이에 뒤 시네마> 필진으로 합류.
루돌프 마테 감독의 <노 세드 송스 포 미>(1950)에 관한 글이 첫 원고였다. 고다르는 이후 긴 시간 동안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 인터뷰어, 특별호 편집자, 그리고 부지런한 독자로 살아간다.
1953년
스위스 댐 건설 현장에서 노동하며 영화 제작비 충당.
1955년
단편영화 <콘크리트 작전>으로 데뷔.
댐 건설 현장을 담은 20분 분량의 단편다큐멘터리.
1956년
<카이에 뒤 시네마> <아츠> 등 비평가로서의 입지를 넓히다.
“글쓰기가 곧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것이었던 이러한 독창성은 이후 발견되지 않았다.” 1950년대의 장뤽 고다르는 영화 만들기로서의 글쓰기를 계발한 장본인이다. 그가 쓴 앨프리드 히치콕, 잉마르 베리만, 니컬러스 레이, 막스 오퓔스, 로베르 브레송 등에 관한 글은 누벨바그의 토대가 된 셈.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장뤽 고다르에게 “우리의 유일한 집”이었다.(<고다르에 의한 고다르: 카이에의 시대 1950~1959>(1989))
1957년
단편 극영화 제작에 착수.
<모든 남자의 이름은 패트릭이다>, 장 콕토를 향한 오마주 <샤를로트와 남자친구>(1958) 등 젊은 지식인들의 허세, 댄디즘을 폭로하는 풍자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1959년
프랑수아 트뤼포와 주간지 <파리의 시간>(Temps de Paris) 발행.
잡지의 가십난, 영화평론,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에 몰두.
1960년
장편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
프랑스영화의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의 정점. 평단의 찬사와 박스오피스의 성공을 모두 거머쥐고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감독상) 수상. 같은 해 아나 카리나와 함께 <작은 병정>을 촬영하지만 정치적 검열로 인해 상영 금지 처분을 받는다.
1961년
첫 컬러영화 <여자는 여자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특별심사위원상) 수상. 아나 카리나와 결혼하다.
1962년
<비브르 사 비>.
베니스국제영화제 특별심사위원상 수상.
1963년
<기관총부대> <경멸> 그리고 <작은 병정> 뒤늦게 개봉.
1964년
아나 카리나와 함께 제작사 아누슈카 필름 설립.
<국외자들> <결혼한 여자>를 만드는 동시에 <붉은 사막>이 개봉하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을 <카이에 뒤 시네마>에 초대해 긴 인터뷰를 싣는 등 열정적인 행보를 이어간다.
1965년
봄에 <알파빌>, 여름에 <미치광이 피에로>를 서둘러 작업한 후 아나 카리나와 결별. <알파빌>은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았다. 그해 겨울, 1848년 제1대 대통령 취임 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프랑스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광풍 속에서 <남성, 여성> 촬영까지 마쳤다.
1966년
<메이드 인 U.S.A>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미래, 전망, 또는 2000년> 등.
데뷔 이후 6년간 12편의 영화를 만들다.
1967년
<중국 여인> <주말>.
아나 카리나와 이혼 후 <중국 여인>의 배우 안 비아젬스키와 결혼. <중국 여인>은 베니스국제영화제 특별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 <씨네21>은 1374호부터 3주간 장뤽 고다르 감독을 추모하는 연속 기획 기사를 마련했습니다. ‘연표로 보는 고다르의 생애’ 역시 1376호까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