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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이웃의 히어로
김혜리 2016-12-14

<캡틴 판타스틱>

<캡틴 판타스틱>은 제목 탓에 ‘또 한편의 슈퍼히어로영화인가’ 했다가 한번 속고, 다 보고 나면 궁극적으로는 슈퍼히어로 이야기가 맞다고 깨닫게 되는 영화다. 벤(비고 모르텐슨)은 오리건주 산속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제공하는 모든 편의를 차단하고, 6남매를 지적으로 물리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인간으로 양육하고자 한다. 이 가족의 대화에서는 섹스와 죽음을 포함해 금기시되는 토픽이 없다. 현실에서 슈퍼히어로는 세계를 구하는 초인이 아니라 세계를 거스르며 믿는 방식대로 원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비순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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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동물사전>의 마법사 뉴트 스캐맨더로 분한 에디 레드메인은,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대니쉬 걸>의 ‘변신술’에 이어, 이번에도 치밀하게 디자인한 연기를 보여준다. 혹자는 인물의 감정보다 배우의 기예를 감상하도록 주의를 끄는 레드메인의 연기를 2급으로 간주하지만, 나는 이 배우의 성실한 캐릭터 해석과 구현을 구경하는 일이 아주 즐겁다. 뉴트 스캐맨더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네 기숙사 중 성실과 페어플레이, 포용력을 숭상하는 후플푸프 출신답게, 영웅심 없이 영웅적인 행동을 ‘저질러버리는’ 유형의 히어로다. 여기서 영웅심이란, 어렵지만 옳은 일을 한다는 비장한 의무감은 물론 대를 위해 개인적 행복을 희생하는 고뇌를 포함한다. 뉴트는 본능적으로 우선 필요한 곳에 몸부터 던지고 나중에 그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사람이다.

알려진 대로 에디 레드메인은 <사랑에 대한 모든 것>부터 함께한 안무가 알렉산드라 레이놀즈의 조력을 얻어, 뉴트의 천성과 직업적 습관이 반영된 매너리즘을 꼼꼼히 고안했다. J. K. 롤링의 매우 묘사적인 시나리오 첫장에는 “뉴트가 버스터 키튼 같은 걸음걸이로 뉴욕에 도착한다”라는 문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캐릭터 세공을 즐기는 에디 레드메인의 의욕이 꿈틀한 순간이라 짐작할 수 있다(마법사가 순간이동, 포트키, 플루 가루 등을 두고 왜 굳이 배를 타는지는 캐묻지 않기로 한다). 나아가 CG 마법동물의 종과 크기, 촉감에 따라 다양한 마임 연기를 펼쳐야 한다니, 금광에 굴러 떨어진 니플러 같은 기분 아니었을까? 레드메인의 뉴트는 항상 고개를 기울여 사람의 시선은 회피하고 문제점을 지적받을 때도 야단맞는 강아지처럼 슬쩍 모르는 척한다. 한쪽 다리를 바깥쪽으로 내려놓는 기우뚱한 걸음걸이는, 야생동물에게 접근할 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체중을 분산하는 습관에서 왔다. 그런 뉴트는 동물을 마주하면 갑자기 두눈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목소리가 커진다. 낯선 사람들과 저녁을 먹느니 사자 입에 머리를 통째로 집어넣는 편을 택할 위인이다. 에디 레드메인의 뉴트는 사회화가 완료되지 않은 10대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무성애자처럼 보인다. 티나(캐서린 워터스턴)의 얼굴에 뭐가 묻은 걸 보자마자 뉴트는 유치원 아동처럼 주저 없이 손을 뻗쳐 닦아주려 한다. <신비한 동물사전>의 로맨스가 좀처럼 와닿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이 애초에 그린 뉴트는 레드메인의 해석보다 훨씬 보편적인 영웅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만약 <신비한 동물사전>이 한편으로 완결되는 영화였다면 지금과 같은 남성주인공 캐릭터가 과연 허락될 수 있었을까? 나는 연기력과 인기 면에서 1순위로 인정받아온 남성 스타 가운데 에디 레드메인과 비슷한 유형을 떠올려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레드메인이 신기한 비스트임은 확실하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입증했듯 J. K. 롤링의 펜 끝에서 창조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염려는 접어둬도 좋다. 제작진은 뉴트의 파트너로 신장이 180cm에 달하는 캐서린 워터스턴을 캐스팅했다. 극중 티나의 제1 관심사는 오러로서 능력과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녀는 바지를 입고 뉴욕 곳곳을 뛰어다니고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는 “싸움은 내가 할 테니 아이를 구해요!”라고 뉴트를 떠민다. 티나의 동생 퀴니(앨리슨 수돌)는 언니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부드럽게 녹여버리는 그녀는 샴페인을 의인화한 듯하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딴판인 자매는 인생관이 다를 뿐 경쟁하는 라이벌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두 여성 캐릭터의 최대 약점은 남성 동료들과의 로맨스다. 자매는 둘 다 먼저 남자들에게 다가서지만 마음의 흐름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시나리오의 포석으로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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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유니버스 안에서 <신비한 동물사전>이 차지하는 좌표를 암시하는 조각들을 주섬주섬 모아보자. <신비한 동물사전> 5부작은 1926년- 이해 12월31일에 볼드모트가 태어난다- 에 시작해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대결투가 벌어지는 1945년- 머글들의 2차대전이 끝난 해- 에 마무리되는 것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 또한 대결의 결말도 원작의 성실한 팬들에게는 이미 알려진 역사다. 따라서 큰 그림으로 보면 <신비한 동물사전> 5부작은 한때 특별한 친구 관계였던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투쟁사가 될 공산이 크다. 여기에 옵스큐러스라는 어두운 힘의 특성상 1편 말미에서 완전히 죽었다고 단정할 수 없는 크리덴스(에즈라 밀러)의 역할과 뉴트 스캐맨더의 동물 탐험이 어떻게 엮일지가 관건이다(우리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볼드모트가 여러 이름으로 등장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린델왈드는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덤블도어가 뉴트를 아꼈다는 사실을 알고 비상한 관심을 표한다. “네가 뭔데 그에게 특별하지?”라고 추궁하는 투다. 젊은 덤블도어의 캐스팅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 없지만, 게이로서의 성 정체성은 분명히 표현될 예정이라고 제작진은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한편 억압당한 마법사의 어두운 파워 옵스큐러스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온 덤블도어의 동생 아리아나의 비극적 사건과도 관련돼 보인다. 1편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은 뉴트의 과거에 관해서는 미국 마법의회 장면에서 언급된 전쟁영웅인 친형 테세우스가 실마리가 될 법하다. 테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소 형상의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은 인물의 이름인 바, 형제의 성격과 철학을 대립시키는 설정도 출현할 법하다. 2편의 무대가 프랑스라는 소식을 단서로 삼는다면 5부작이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의 트리위저드 게임에서 선보였던 더 넓고 다채로운 마법 세계의 투어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1편의 4인조는 계속 활약할까? 아마 지금처럼은 아닐 것이다. 퀴니와 제이콥 커플의 이야기에 굳이 에필로그를 할애한 1편의 마무리는 장차 이 캐릭터들이 중심 서사에서는 비껴나 있다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12/01

셰익스피어 400주기의 마지막 달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로키가 주연한 연극 <햄릿>과 <코리올라누스>가 영상물로 개봉하는 것을 계기로 셰익스피어 영화를 뒤적여볼 기회가 생겼다. 분류해보자면, 첫째 셰익스피어의 오리지널 희곡을 대사를 그대로 살리고 재편집하는 정도로 각색해 영화로 옮기는 스트레이트한 작품군이 있다. 셰익스피어 전문가 출신인 로렌스 올리비에나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가 속한다. 오슨 웰스의 <맥베스>나 <오셀로>도 함께 묶어도 될 것이다. 나 역시 브래너 감독의 <헨리 5세>나 <헛소동>으로 셰익스피어가 비영어권 독자로서는 실감할 수 없는 ‘언어의 연금술사’일 뿐 아니라, 캐릭터와 플롯의 귀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관객 중 한명이다. 브래너의 셰익스피어 영화가 대중화를 위해 대사가 설명한 바를 재차 영상으로 반복하는 바람에 둔탁하고 따분하다는 평을 들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다음으로는 다른 언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자유롭게 각색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들이나 대사는 원작을 살리면서 현대적 장르를 도입한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와 줄리엣>, 리처드 론크레인의 <리처드 3세> 같은 예가 있다. 셰익스피어 극에 내재된 관능성, 외설성, 폭력성을 현대 관객이 체감하기에는 이 부류의 영화들이 효과적인 것 같다. 그다음으로는 모티브를 셰익스피어의 플롯에서 따온 영화들이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일찍이 있었고 <헨리 5세>를 삽입한 <아이다호>,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과 <십이야>에다가 셰익스피어의 전기를 버무려 칵테일 기술을 뽐낸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대표적이다. <햄릿>을 가져온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도 엄연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비유가 화려하고 이미지즘이 강력한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어보면, 더 많은 셰익스피어 장편애니메이션이 나오지 않은 점이 의아하다는 생각도 든다. <코리올라누스>와 <햄릿>은 이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녹화된 연극이다. 영화 발명 초기에도 ‘통조림 연극’(Canned Play)이라 불리던, 무대를 촬영한 영화들이 있었다. 물론 카메라를 세워두고 롱숏으로 연극을 통째로 찍었던 100년 전과는 다르게 요즘의 연극 녹화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와 편집이 동원된다. 모르긴 해도 내러티브와 연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콘서트 실황과는 다른 기술을 요하는 전문 분야일 것이다. 그래도 이 영상들을 한편의 영화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다만, 학교 문학 수업의 결과로 셰익스피어를 장황하고 지루한 작가로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번역만 뒷받침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입문 경로가 없을 법하다. 지난해 이언 매켈런이 스마트 기기용 앱까지 개발한 것도, “셰익스피어는 어디까지나 낭독이 아니라 공연을 위한 텍스트, 읽기가 아니라 듣기로 즐겨야 하는 작가”임을 널리 알리자는 의도였다.

12/02

2013년 톰 히들스턴 주연으로 런던에서 공연된 <코리올라누스>는 셰익스피어의 더 잘 알려진 로마극 <줄리어스 시저>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보다 앞선 시대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작가의 다른 ‘로마극’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영역본을 원안으로 취하고 있다. 탁월한 군인 카시우스 마르시우스(톰 히들스턴)는 군신을 방불케 하는 활약으로 코리올라이를 함락시키고 집정관에 추대되지만, 뼛속 깊은 엘리트주의와 대중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 추방당한다. 일단 이 대목에서 현대 관객들은 어리둥절해진다. 정치가의 속마음이 무슨 상관이람. 국민과 연애를 할 것도 아니고 청렴하고 유능하게 맡은 일만 잘하면 그만이지.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는 정치인의 ‘진정성’이니 ‘충심’이라는 수사에 우리는 질릴 만큼 질린 것이다. 고대 공화국의 시민들이 정치인에게 거는 기대는 훨씬 낭만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낭인이 된 카시우스 마르시우스는 대담하게도 본인이 패퇴시킨 볼사이의 장군 아우피디어스를 찾아가 몸을 맡기고 거꾸로 고국 로마 공격의 선봉에 선다.

파시즘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에 셰익스피어가 그린 카시우스 마르시우스 코리올라누스는 파시스트의 원형이다. 그럼에도 그가 연구할 만한 인물로 보이는 까닭은, 그의 오만이 범용한 오만이 아니라 기념비적 오만이기 때문이다. 코리올라누스는 민중의 비판을 무시하지만 동시에 다수의 환호에도 무관심하다. 어리석고 비본질적이라고 본인이 판단하는 모든 것을 경멸하는 인간이다. 그의 교만은 약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연극에는 “그는 신 앞에서도 아첨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거대 권력을 쥐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코리올라누스는 20세기 파시스트들과 달리 국가주의자가 아니다. 로마가 그를 내쳤을 때 그는 “다른 곳에도 세계는 많으니까!”라고 내뱉으며 적국으로 투항한다. 그의 윤리와 충성은, 오직 본인의 명예율을 향한다.

재미있는 점은 <코리올라누스>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독일, 프랑스에서는 파시즘의 영웅 드라마 취급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민중의 승리를 기리는 연극으로 상연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심지어 상반된 해석이 대두되는 일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관해 별스런 사례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도중에 말장난 코미디를 경유하고 희극도 진중한 주제를 파고든다. 인물의 나이나 음악이 지정되지 않은 작품도 있다. 대체로 셰익스피어 희곡은 배우의 연기를 지시하는 지문은 대충대충이고 종종 퇴장 시점도 명시하지 않아 연출의 재량이 개입할 여지도 많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정치극으로서 <코리올라누스>가 대립된 정파로부터 공히 환대받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셰익스피어가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인물에게 유려한 대사를 부여해서일 것이다. 왕과 귀족이라고 해서 달변이고 농민이라고 어휘가 빈곤하지 않다는 뜻이다. 모든 인물은 직업을 막론하고 본인이 바라보는 세계와 인생의 이치에 관해 풍성한 예시와 비유로 설파하며 견해를 멋지게 논증한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화자가 바뀔 때마다 설득당할 수밖에 없고,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판단하기 이전에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코리올라누스>

좋아요

소극장 에픽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햄릿>과 톰 히들스턴 주연의 <코리올라누스>를 녹화한 NT라이브(National Theatre Live)가 국내 개봉했다. 유서 깊은 극장 돈마 웨어하우스에서 공연된 <코리올라누스>의 무대는, 좁은 공간을 추상화해서 활용한 미술이 돋보인다. 고대 이탈리아의 전장과 광장은 벽과 사다리, 의자 그리고 무대 바닥에 배우가 직접 그은 금으로 표현된다. 현대 도시의 그것처럼 성벽에 휘갈겨진 그래피티는, 무대 바깥에 존재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극중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은 최소한의 구조물과 구획으로부터 도시와 벌판을 상상한다. 단조로운 무채색 배경으로 인해 영웅 코리올라누스의 상처 입은 육체는 더욱 붉게 돋보인다. 스타의 클로즈업과 큰 세트를 보여주느라 카메라가 분주한 <햄릿>에 비해 <코리올라누스>는 훨씬 보기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