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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로 끌고 가는 멜로영화, <연풍연가>
조종국 1999-02-09

운명적인 사랑이란 없다. 적당한 우연과 강철 같은 의지와 끈질긴 노력으로 사랑은 만들어진다. 사랑의 완성이란 곧 거듭되는 노력의 결과다. 그 짜릿한 사랑의 느낌이 그렇게 공들여 만들어낸 것이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운명처럼 온 것이라고 그냥 속고 마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그렇게들 산다.

영서는 운명 같은 사랑을 점지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동전을 떨어뜨리지만 웬걸, 사랑은 고사하고 헛웃음만 흘린다. 하지만 그에게도 ‘예정대로’ 우연은 찾아온다. 관광 안내를 맡았던 손님이 지갑을 도둑맞고, 그 소매치기는 ‘하필이면’ 태희쪽으로 도망친다. 태희는 소매치기의 칼에 손가락을 다쳐 영서의 치료를 받게 되고, 영서는 컵라면을 먹고 있는 태희를, 태희는 교통경찰과 승강이하는 영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제주도라는 관광지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실제로 몇번씩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태희를 영서가 버스에 태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태희는 휴대폰을 버스에 두고 내리는 실수까지 한다.

우연은 여기까지다. 이제 남은 것은 두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 태희는 휴대폰을 전해주러 온 영서에게 다음날 일일 관광 안내를 부탁하고 ‘사건’은 시작한다. 앞오름 고목나무 밑에서부터는 서로의 ‘비밀’도 털어놓는다. 영서는 첫키스 경험을 이야기하고, 송악산 동굴 가는 길에서 태희는 흠모한 은행원 이야기며 ‘다른 사람하고 좀 다른’ 아버지 이야기를 흘리기도 한다. 태희는 마지막 연애이야기를 하고, 깡통이 거꾸로 올라가는 도깨비고개에서는 영서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두사람은 치열한 ‘상호침투’를 시작한 것이다.

<연풍연가>는 멜로영화지만 격정적인 러브스토리나 최루성 비극에 기댄 영화가 아니다. 아물지 않은 가슴의 생채기를 안고 제주도에 흘러든 태희와, 여행온 육지 남자는 늘 떠날 궁리만 한다고 어른들로부터 세뇌당하면서 자란 영서라는 두 주인공의 캐릭터로 끌고 가는 멜로영화라는 점은 일단 진부하지 않다. 그렇다면 승부처는 명확하다. 흔히 말하는 ‘디테일’이다. 드라마를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은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떠받쳐주어야 하고, 작은 이끌림부터 느낌의 교류 등 미세한 감정선을 치밀하게 끌고 가야 한다. 하지만 투박한 상황들이 인물과 설핏설핏 부딪치면서 영화가 균형을 잃고 흔들리고 만다. 추자도 가는 배에서 만나는 태희의 옛애인이나, 불쑥 영서 엄마가 털어놓는 아버지의 행적 등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도입부의 공항 장면, 송악산 계단 장면, 고목나무 밑 등에서 롱테이크를 구사한다든지, 신의 첫 커트들을 대체적으로 길게 가져간 것은 영화의 색깔을 지키기 위한 과감한 시도로 보인다. 후반부로 갈수록 커트가 줄어들고 ‘원신 원커트’까지 등장하는 것은 감독의 계산에 따른 것이지만 의도만큼 효과가 살지는 않았다. 이는 태희가 서울로 떠난 이후 마치 영화가 1, 2부로 나뉘듯 전반부의 흐름을 이어가지 못한 탓이 크다.

<연풍연가>는 한국영화사상 첫 여성촬영감독으로 등재된 김윤희씨가 카메라를 잡았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하다. 제주도 풍치를 부드럽게 잘 담아낸 김윤희씨의 카메라는 영서와 태희를 한번에 잡는 식의 풀 쇼트에서 빛을 발한다. 또 상황을 살려 찍어내는 색감은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을 보여준다.

<연풍연가>는 90% 제주도 로케 화면이다. 산등성이가 노릇노릇해지고 귤이 익은 가을의 풍광은 영화를 보는 1시간36분동안 제주도로 소풍온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연풍연가>는 지난 2년간 활기차게 가동해온 충무로 멜로영화 생산라인이 내놓은 규격상품에 해당한다. <접속>을 감독한 뒤 영화사를 차린 장윤현 감독의 쿠앤씨필름 창립작품이고, 역시 <접속>의 각본가 조명주씨가 쓴 두번째 시나리오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과 <패자부활전>에서 각기 일정한 관객동원력을 과시했던 고소영과 장동건이 합류했다.

<연풍연가>로 데뷔한 박대영 감독도 또 한마리의 ‘장산곶매’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를 만들던 시절 장산곶매의 막내둥이였던 박대영 감독은 KBS 대하드라마 <김구> 조연출, <정글스토리> <접속> <조용한 가족> 조감독을 거쳤다. 시네마서비스에서 8억원의 제작비를 대 만들었고, 직배사 20세기폭스에서 배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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