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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

The Night Before Strike

1990 한국 12세이상관람가

드라마 상영시간 : 107분

개봉일 : 2019-05-01

감독 : 장동홍 이은기 이재구 장윤현

출연 : 홍석연 엄경환 more

  • 씨네217.67
  • 네티즌8.11
동성 금속의 생산 현장에는 가난에 찌든 200여 명의 노동자가 있다. 동성금속의 단조반에는 주완익(임영구 분)이라는 신입을 소개하고 단조반원들은 막걸리와 함께 마시며 그를 환영한다. 단조반원인 한수는 어떻게든 혐오스러운 가난을 벗어버리고 싶어하는 노동자다. 참고 일하며 절약해서 결국 부자가 되는 것이 꼭 이루고야 말 그의 꿈이다. 관리자들에게 있어 노동자는 고장 잘 나는 기계에 불과했다. 김전무(왕태언 분)는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노조건설 움직임에 대해 치밀한 사전 준비를 해나가고, 한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주임에게 회사 편에서 선 노동자로 포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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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별점 (6명참여)

  • 7
    송형국2019년 전국 곳곳의 사업장에서 유효한 이야기
  • 7
    박평식장산곶매처럼 찍고 싸웠노라
  • 8
    이용철시작부터 전설이었던 작품
  • 8
    이화정시대의 억압에 맞선 기념비적 작품. 영화의 안과 밖 모두가 투쟁
  • 8
    김성훈메이데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 8
    임수연제작과 상영 투쟁, 그 내용이 완벽한 혼연일체
제작 노트
상영전야

장동홍 (책임연출)
* 이 글은 1990년 개봉과 동시에 발간된 팸플릿에 “파업전야는 이렇게 만들어졌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글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제목만 바꾸고 내용은 원문 그대로 게재합니다. (편집부)

우리는 일단 이 작업의 착수에 앞서 나름대로 이 영화에 임하는 원칙과 방법에 대해 수차례 토론을 했다. 우리들에게 어쩌면 낯설지도 모르는 노동자의 생활을 형상화하는데 있어 최대한의 준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1차적인 결론이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수개월에 걸친 현장취재를 진행했다. 세창물산 깡순이들, 남일금속, 한독금속을 비롯한 경인 지역 노동자들과의 만남은 시나리오 구성 과정에 있어서의 사실성 획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체 구성원의 토론에 의한 줄거리 구성에 이어 취재와 집필에 이르는 시나리오 탈고 과정에만 9개월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영화의 배역을 정하기 위하여 수많은 연기자를 만나야 했다. 일천한 우리의 작업 경험과 비례하여 확보 가능한 연기자의 절대수도 부족했거니와 특히 장년의 배역을 선정하는 데에는 더욱 어려움이 많았다. 충무로의 영화배우, 방송국 탤런트, 진보적 연극운동판의 배우들, 기성연극인들, 대학연극반원들을 수없이 만났으며 결국 우리의 영화작업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배우들만으로 배역이 완결되었다.


1990

드디어 89년 12월, 회사측의 일방적인 휴업에 대하여 노조간부를 중심으로 정상조업재개 투쟁 중인 인천 한독금속 사업장에서 합숙촬영이 시작되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농성투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독금속 노동형제들은 수개월간 멈추었던 기계를 밤새워 보수해가며 이 촬영에 뜨겁게 함께하였다. 처음, 우리들은 노조원들의 도움에 송구스러웠고, 노조에서도 ‘영화인’들에 대하여 생경하게 느꼈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합숙촬영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도움과 협조의 관계는 이 땅의 노동자가 잘사는 사회, 노동해방의 긴 노정 속에서의 동지적 관계로 바뀌었다. 이제 모든 작업을 마치고 이번 작업의 평가와 보급을 모색해야 하는 지금, 역사를 거스르려는 독점 재벌과 민자당의 만민중적 책략이 난무하고 있다. 1년이 넘게 걸린 제작기간은 이 땅의 첨예한 모순의 형상화와 관련하여 분명 지나치게 긴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긴 시간과 시행착오 모두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영화 예술을 모색해 나가려는 우리들 내부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는다. 영화 <파업전야>는 영화적 실천에 동의하는 동료, 후배, 선배님들의 후원금을 통하여 제작되었다. 우리는 이 영화가 이 영화를 만들고 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바람처럼 삶의 현장에서 활발히 상영되어 내일의 노동과 투쟁에 새로운 힘을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 독립영화사 속의 <파업전야>
*이글은 독립영화...... 에 실렸던 “파업전야”를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편집부)

‘파업전야’라는 사건

<파업전야>를 ‘기념비적’이라고 회고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부 당국의 혹독한 검열과 헬기까지 동원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상영 운동’을 일으킨 결과, 놀라운 숫자의 관객을 동원(비공식 30만)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는 것, 다른 하나는 <파업전야>를 진정한 리얼리즘 계열의 민족영화, 나아가 독립영화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방식이다. 이때의 민족영화라는 것은 ‘민족영화’ 대 ‘할리우드 영화’, 혹은 ‘민족영화’ 대 ‘상업주의영화’라는 도식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선정성을 배제하고 노동자의 계급성을 드러내는 영화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고 <파업전야>는 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파업전야>를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민족주의적 리얼리티” “작품구조의 상투성”, “도식적인 남성 노동자 중심의 영웅되기 플롯”으로 평가하는 비판적 시각이 있으나, 당시의 독립영화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실천적으로 다가가는 것이었으므로 이때의 미학적 기준은 선동, 선전성 2) 이고 <파업전야> 또한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화제작의 물적 기반

<파업전야>를 만든 ‘영화제작소 장산곶매’는 영화제작의 ‘전문화’, ‘과학화’, ‘민주화’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바 있는데 이것이 한국 상업영화의 제작관행을 문제시하는 것이었다면, 16mm 필름의 사용은 35mm 필름의 자본 종속성과 극장상영 독과점을 비판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16mm 영사기는 이동의 편리성으로 대학, 노동 현장, 시위 현장 등, 모든 곳을 상영장으로 만들 수 있었고 당시 영화법에 규정된 검열을 피해가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또한 6mm 필름은 <파업전야> 결말 부분에서 현장성을 높인 푸티지 필름을 사용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 카메라 워크를 이용한, 심도 있는 연출을 가능하게 했다.


노동자영화로서의 <파업전야>

영화는 “1987년 가을” 이라는 자막이 뜨고 동성금속의 구내식당에서 한 노동자가 식판을 엎으며 열악한 노동현실에 대해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선동자는 이내 관리자들에 의해 끌려 나가고 잠시 술렁이던 식당 안의 노동자들이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사를 계속한다. 검은 화면에 타이틀이 뜨고, 1988년, 평화로운 공장에 아침이 밝아온다. <파업전야>는 이처럼 ‘정-반-합’의 꾸준한 반복, 즉 ‘노동자들의 산발적인 투쟁-진압-더 큰 물결로 향해 가리라는 믿음’을 담아낸다. ‘기계’는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계부품처럼 이용되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기계를 멈추는 존재로서의 노동자, 기계를 장악하는 존재로서의 노동자는 수없이 반복되어온 노동운동의 테제다. <파업전야> 또한 금속공장이라는 배경 속에서 철, 기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성화된 노동 운동의 방식을 강조한다. 용광로에서 담금질되는 철, 쉼 없이 움직이는 기계를 보여주는 인서트 쇼트들, 기계와 노동자들의 유대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각성한 한수가 기계를 꺼버리는 장면은 ‘기계’라는 하드웨어로 대변되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중요한 은유이자 남성화된 노동운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한수를 비롯하여 재필, 춘섭과 같은 남성들이 노동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에서 번민하는 반면, 여성 등장인물들은 처음부터 확고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숙희는 야학을 통해, 미자는 노조를 통해 교육되고 각성한 인물이다. 흔들리지 않는 존재이자 남성들을 각성하도록 이끄는 여성은 노동자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애정의 대상인 동시에 숭고하고 강인한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라는 신화를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산곶매가 지향하는 ‘민주화’ 내지 ‘정치적 올바름’에 준하여 여성노동자들을 재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일종의 ‘자기검열’은 ‘바리터’와 같은 여성주의 영화인들과의 연대에서 오는 영향력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교화와 각성의 언어들이 영화 속에서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조설립의 이유와 준비 과정에 대한 직접적 내용은 많은 부분 묵음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조를 탄압하려는 사측의 은밀한 계획, 그리고 노동자와 회사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수의 말들은 구체적인 언어로 오랫동안 묘사되고 있다. 왜 저항의 언어는 감춰지고 탄압과 번뇌의 언어가 드러나는 것일까? 이것은 영화가 선전, 선동의 목적을 취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방식은 설명적 교화가 아니라 감정의 이입과 고조를 이용한다. 감성에 대한 지속적인 호소는 마지막 장면에서 한수가 기계를 멈추고 멍키스패너를 드는 순간, 기립박수를 끌어낼 만큼의 강력한 힘 5) 으로 나타난다. 안치환의 음악 ‘철의 동자’를 배경으로 한 마지막 시퀀스, 실제 시위현장의 푸티지. 그리고 멍키스패너를 높이 든 채 프리즈 프레임 된 한수의 주먹은 그 어느 것보다 강력한 선동의 언어이다. <파업전야> 이후 영화의 성공적인 흥행 이후 <닫힌 교문을 열며>(1992) 등을 제작한 장산곶매의 회원들은, 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대기업 자본에 의해 재편되고 있던 충무로 영화판 안으로 들어가거나, 독자적인 행보를 걸으며 독립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자본과 검열을 거부했던 장산곶매의 회원들이 거대 자본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변절이나 단절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영화판에 유입된 자본은 전문성, 합리성,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는 기존 한국 상업영화의 권위주의와 비전문성을 비판하던 장산곶매의 창립 취지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독립영화사의 전설처럼 남았던 장산곶매는 젊은 작가, 감독, 제작자를 배출하며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각인시키게 되었다.


<파업전야> 상영과 표현의 자유
이 용 배 (당시 ‘장산곶매’ 대표/현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1990년대 상업영화는 대개 35mm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대신 16mm 필름은 주로 대학 영화과 실습작품이나 영화동아리 워크숍 등 아마추어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작은 영화’였다. 비디오와 영화 매체가 문화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시대였고 이런 단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부당한 현실과 열악한 삶이 비디오로 기록되고 단편영화로 제작되곤 했다. 말은 ‘작은’ 영화였지만 민주사회를 향한 ‘큰’ 힘이었다. 당연히 권위적인 정권과도 부닥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국적 차원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1990년 4월, 16mm장편 극영화 <파업전야>가 대학가 상영을 시작하면서다. 1988년, 여러 대학 영화동아리 출신들이 뭉쳐 의미 있는 공동창작을 해보자는 취지 ‘장산곶매’라는 영화운동단체를 결성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만든 작품이 <오! 꿈의 나라> (16mm, 1988년,90분)인데, 이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첫 장편 독립영화로 기록된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이 영화 상영에 당황했다. 대중적 공개를 막고자 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되는 바람에 검찰은 대표(고홍기선 감독)를 불구속 기소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오! 꿈의 나라>는 전국 대학가에서 공개적으로 상영될 수 있었다. <파업전야>의 경우는 달랐다. 시사회 소식이 알려지면서 검찰은 “일부 운동권이 노동자 파업을 부추기는 영화로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대표는 지명 수배되었다. 혜화동 예술극장한마당 상영 이틀째, 필름에 대한 압수 수색영장도 집행되었다. “계급의식 고취” “노동쟁의 정법상 제3자 개입금지 위반”이라는 혐의였다. 상영장마다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전국적으로 상영장 봉쇄와 관람객 연행이 계속되었다. 상영장의 공연장 허가마저 취소되었고 영화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노동자가 해고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표현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대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장산곶매는 <오! 꿈의 나라>에서 얻은 교훈으로 그를 넘어서는 대응에 나섰다. 우선 ‘<파업전야> 탄압 분쇄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가 꾸려졌다. 한국독립영화협의회 등 영화단체들이 연대했다. 여기에 민예총을 포함한 11개 지역문화예술단체와 함께 전국적인 상영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학 내 상영을 위해 학생들은 ‘사수대’를 만들어 상영장을 지켰다. 민중연대도 공고하게 확장되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현 민주노총 전신)는 <파업전야>를 101주년 노동절 기념영화로 지정하며 성원했다. 방송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KBS 노조집회에서도 영화가 상영되었다. 민변 변호사들마저 호응하였다. 국가보안법까지 들먹이며 겁박했지만 결국 <파업전야>도 단지 ‘영화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영화제작 신고 조항과 심의(사전검열) 조항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오! 꿈의 나라>를 포함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소조항이었다. 더구나 8mm나 16mm 필름으로 만든 소형영화를 (상업)영화법으로 재단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장산곶매는 헌법소원을 신청하며 맞섰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6년10월4일. 헌법재판소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영화사전심의’가 ‘위헌’임을 판결했다. 지금도 판결문 낭독 소리가 생생하다. “영화법 제12조 영화의 사전심의제도는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사전검열 제도로, 이는 헌법에 위배된다.” 며칠 후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노천 상영회가 열렸다. ‘영화검열 위헌 결정 환영 및 표현의 자유 완전쟁취를 위한 결의대회’였다. 급조된 천막 스크린에는 <파업전야>가 당당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돌아보면 <파업전야>는 제 몫을 넘치게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출연진과 제작 스텝들만으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었고, 촬영지였던 한독금속(부평공단)과 폐업철회 투쟁 중이던 노동자들이 큰 힘이었다. 영화제작과 배급이라는 ‘노동’이 헌신적 지원과 연대로 숨 쉰다는 점을 깨우쳤다. 그리고, 영화관람마저 ‘상영투쟁’이어야 했던 시절 <파업전야>의 삼십만(비공식 집계) 관객들! 그들은 영화를 지켜낸, 표현의 자유를 지켜낸 함성이자 물결이었다.


민중 OST ‘철의 노동자’
강헌 (당시 장산곶매 회원 / 음악평론가, 현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어떤 곳에서, 어떤 시점에서 새로운 물결이 기존의 질서를 뒤엎을지 미리 예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술사가 특히 그러하다. 사회적 파문은 일으켰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아쉬움이 많은 장산곶매의 첫 영화 <오! 꿈의 나라>(1989)의 상영을 마치고 새해를 맞이한 열 명 내외의 동료들이 눈 덮인 설악산에 엠티를 갔을 때도 우리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했다.술판을 벌이며 다음 작품의 주제를 결정하는 밤샘 난상토론을 벌일 때도 두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는 비교적 안전한(?) ‘학생운동’을 소재로 하자는 비교적 단순한 합의에 도달했다. 하지만 <오! 꿈의 나라>의 시작 시점에 같이 있지 않았던 소수파 두 사람은 (그 중 한 명인 나는 후반 작업에서나 참여했고, 다른 한 사람 변영주 감독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막 장산곶매에 들어온 새내기였다.) 다음날내내, 아직 술에 깨지 않은 기존의 멤버들을 회유하고 윽박지르고 간청하며 ‘노동운동’을 소재로 해야 된다고 강변해댔고 이들의 고집에 귀찮아진 나머지 멤버들이 마지못해 설득당해주는 모양새로 일단 ‘노동자 투쟁’을 다루기로 어정쩡하게 합의했다.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멤버들 중 아무도 공장 비슷한 곳에 가본 적이 없었고, 더군다나 삼엄한 공안정국에서 ‘공장 영화’를 찍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노동운동을 하는 분들을 모셔 학습을 하고 조를 짜서 구로공단과 부평공단, 인천공단의 투쟁 현장을 답사하면서부터 우리가 얼마나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지만...... 우리들에겐 무모한 젊음이 있었다. 내가 속한 조가 처음 현장 취재를 나간 공장은 인노협 의장이 계시던 부평의 ‘한독금속’. 방위산업체인 그 공장에서 불법 영화라니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와 동료들은 삼사십 년이 넘은 독일제용광로의 위용에 단숨에 맛이 갔다. 그러나 육 개월 후 그 공장이 위장 폐업하게 되고 노조원들이 공장을 사수하는 투쟁을 벌이게 되면서 장산곶매는 공장 자체가 거대한 세트장인 한독금속에서 마음껏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를 붙잡게 된다. ‘기적’은 또 있다. 우리는 영화음악을 막 노찾사에서 솔로로 독립한 안치환에게 맡겼다. 계약서도, 개런티에 대한 구두 언급도 없이 막무가내로. 안치환은 영화음악가가 아니라 싱어송라이터일 뿐이었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세 곡의 노래를 포함한 배경음악을 만들어 우리에게 제공했는데 영화의 서주와 초중반, 그리고 마지막 엔딩 시퀀스에 들어가는 세 노래들이 마치 맞춤옷과 같이 딱 맞았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나중에 영화를 몇 편 더 해보고서야 알았다. 안치환은 노찾사에 의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위시한 서정적인 노래에 강하다. 노동자노래단 김호철 류의 격렬한 투쟁가에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마지막 주제가인 <철의 노동자>는 단지 영화의 주제가로 그치지 않고 198~90년대 한국 노동자 노래운동사에서 <단결투쟁가>와 거의 쌍벽을 이루며 혁혁히 빛나는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에게 이런 류의 노래는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철의 노동자>는, 노동자의 집회라면 빠지지 않는, ‘OST출신’의 대표적 민중가요가 되어 있다. 녹음과 편집이 끝난 뒤 스튜디오에서, 나는 이십만 원을 담은 봉투를 치환에게 건네며 ‘너무너무너무’ 고맙다는 말 말곤 할 말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치환이는 봉투 속에 든 돈의 규모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봉투를 받지 않고 명예를 택했다. 삼십 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미안하고 고맙고 소중하다.


파업전야 늬우스

커플 탄생

영화 중 ‘숙희’ 역을 맡은 이은희 배우와 ‘석구’ 역의 조현모 배우가 촬영 기간 중 눈이 맞아 결국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두 배우는 춥고 배고픈, 한겨울 냉방완비의 촬영 현장에서 남몰래 따뜻한 시간을 즐겼다고 하는데요. 결국 영화가 완성된 뒤 결혼에 성공, 파업전야를 만든 동료들로부터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 하는 질시를 한몸에 받았지만 현재까지 정말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장편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

<파업전야>가 공안당국의 협조(?)로 뜻밖의 성과를 거둔 뒤, 장산곶매는 얼떨떨한 성공의 기분 속에서 세 번째 작품에 착수, 내부의 기획 공모를 통해 이재구 감독 팀의 <닫힌 교문을 열며>를 후속작으로 결정했습니다. 어느 고등학교의 비교육적인 현실에 저항하는 학생과 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1992년 완성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비록 <파업전야>만큼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비 오는 날 교사(정진영 배우)와 학생들이 닫힌 교문을 바라보며 울던 장면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저장돼 있다고 합니다.

<파업전야>는 아직도 진행 중 - 마침내 극장 개봉!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영화 100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파업전야>는 2008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으로 서플먼트를 보완하여 DVD로 출시되었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색보정과 일부 오디오 수정 작업을 거쳤고, 4K 리마스터링하여 곧 블루레이로 출시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2019년 5월, <파업전야>가 제작된 지 무려 30년 만에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됩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뒤의 <파업전야>가 관객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들

파업전야 제작과 상영에 함께 해주셨던 우리의 벗, 동료 중에 네 분이, 그동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일 먼저, 연출부 일원이었던 (고) 이은기 님. 갑작스런 심장질환으로 20대의 나이에 고인이 되셨습니다. 2013년에는 기획팀에서 함께 일했던 (고) 이장길 님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018년, 장산곶매의 창립멤버이자 영원한 선배인 (고) 홍기선 감독님이 영화 <1급기밀>의 촬영을 마친 뒤, 수면 중에 돌연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2019년 3월, 영화 속에서 춘섭 역을 맡아 열연하셨던 (고) 엄경환 님이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뜨거운 열정과 헌신을 기억하며 늘 그리워합니다.

‘장산곶매’는 지금.......

장산곶매는 1993년 이후 공식적인 활동이 없으나 공식적으로 해체한 적도 없어서, 회원들은 각자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연말모임을 갖는 정도의 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장산곶매는 이번 <파업전야> 개봉과 블루레이 출시를 통해 약간의 수입이 생길 것이라고 야무진 꿈을 꾸면서 그것을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해마다 ‘장산곶매 인물’을 선정하여 작은 행사를 가지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파업전야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 배우들 출연료는 얼마였나?
배우, 스태프 모두 개런티 없이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니 캐스팅이 어려웠지 그러나 상영 중에 팸플릿 판매 수입이 발생하자, 그것으로 (장산곶매 회원 제외하고) 배우, 스태프, 직책, 배역, 경력 구분 없이 똑같이 20만 원씩 지급했다. 그걸 지금 돈으로 환산해 봐야 얼마 안 될 것 같다.

● <파업전야>라는 제목이 나오기까지
처음의 제목은 “강철..... ”류의 다소 거칠고 과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정한 이 제목에 대해 누군가 뒤늦게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또다시 토의를 해야 했다. 그 누군가는 욕을 엄청 먹었다. 다시 시작된 토의에서 쉽게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심지어 ‘배고파서 울었다.’라는 아이디어까지 나오는 단계에서 누군가가 ‘파업전야’를 제안하였고 절대 다수의 지지 속에서 결정되었다.

● <한마당> 에서 압수당한 릴의 비밀
상영초기인 혜화동 <한마당 소극장> 상영 중, 경찰이 압수수색영장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다. 비싼 영사기와 릴을 빼앗길 수 없었던 상영팀은 낡은 영사기와 가짜 릴을 준비해 두었다가 경찰이 들이닥치자 순순히 압수를 당하고 말았는데, 그 릴에는 <파업전야> 대신 <오! 꿈의 나라> 자투리 필름이 감겨 있었다고. 준비된 압수를 당하고도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 그 자리에서 통곡한 회원이 있는데 누군지는 본인이 알것.....

●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주연배우의 고충
대학 연극반 출신으로 영화 속 ‘한수’를 맡은 김동범 배우는 <파업전야> 상영 후에 ‘눈을 떠보니 유명인이 돼 있더라’ 는, 말로만 듣던 일을 직접 겪었다. 등산을 가도, 군 훈련소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 강남의 카페에 들어가도 “한수....”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셀 수 없이 많은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영화 중 개성 강한 노동자 역할을 했던 ‘재만’ 역의 신종태 배우와 ‘재필’역의 홍석연 배우 역시 상영장을 함께 돌며 ‘운동권 아이돌’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는데. 김동범 배우의 말에 따르면 그런 유명세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앞으로의 삶이 영화의 정신에 위배될까 하는 부담과 갈등 때문에 이후의 진로가 많이 힘들었다고. 그래서인지 김 배우는 대학로에서 짧은 연극 활동 뒤에 한동안 잠수를 탔고 지금은 전혀 다른 분야의 사업가로 변신....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전국 동시상영’ 작전
<파업전야> 상영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공안검찰은 상영 시 엄벌에 처하겠다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1989년 <오! 꿈의 나라> 상영의 경험을 갖고 있던 장산곶매는 쫄지 않고 경찰력을 분산 시키는 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그 방법으로 전국 각지에서 같은 시간에 동시상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지금의 멀티플렉스보다 더 멋진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전국의 문화운동 단체들과 이에 대해 논의했고 경기, 강원, 제주까지 권역별로 운동권 조직이
전부 서울로 올라와서 장산곶매가 제공하는 영사기와 필름을 가져갔다. 그게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멀티플렉스 시스템보다 더 멋지다는 말은 당장 취소해야. 주말 단위로 전국적인 상영이 이루어졌다. 일부지역에서는 경찰과 관람객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고 상영팀은 미리 도주할 동선을 면밀히 준비하는 등 상영장 분위기는 비장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경찰은 상영장에 최루탄을 터뜨리고 헬기까지 동원하는 스펙터클을 제공, 혹시 4D 영화나 증강현실 게임 시초가 아닐까? 그 덕분에 <파업전야> 사태는 한 달 이상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핫한 이슈에 올라 있었고 현재까지도 독립영화의 레전드로 남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준 검,경에 뒤늦게나마 Thank you!

●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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