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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길 잘했어' 최진영 감독
이지현(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22-04-21

프레임 안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주인공의 힘

처음에는 환상이 많이 가미된 영화라고 생각했다. 최진영 감독은 2007년에 낮잠 자던 중 꾼 꿈에서 <태어나길 잘했어>의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벼락에 맞았고, 자신의 몸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남성 자아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묘한 꿈을 꾼 후에 서사를 완성하고 싶단 욕망이 생겼고, 그렇게 초고가 작성됐다.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이 영화는 무척 ‘현실적으로’ 구상된 결과물이었다. 단순히 동화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대사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사회적 메시지가 감추어져 있었다. 소품 설정부터 미장센에 대한 고민까지, 감독의 입을 통해 영화의 제작 과정을 들었다.

- 독특한 왕자가 등장하는 ‘역전된 동화’ 같단 인상을 받았다. 마사이신발은 살짝 ‘신데렐라’ 분위기도 났다.

= 동화보다는 현실에서 소재를 빌렸던 것 같다. 예전에 학원 강사를 주인공으로 단편영화를 쓴 적 있다. 2008년에 잠깐 학원에서 일했는데, 그때 겪은 일이 출발점이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한국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수강료가 없는 학생들이 학원비 대신 과일 상자나 세차권을 가져오는 일이 생겼다. 속상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시를 생각하면 ‘신발’이 떠오른다. 이후로 소품으로 마사이신발을 선호하게 된 것 같다. 단편에도 썼고, 이번 영화에도 나온다. 어릴 적 읽은 메르헨 전집을 좋아했지만,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 현실의 모티브를 시나리오로 발전시킨 과정을 듣고 싶다.

= 2007년 꿈에는 남성인 자아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그저 꿈을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성애적 사랑’을 통해 주인공을 구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반추했다. 스스로에게 자기혐오나 공포의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되물었다.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그건 아마도 1990년대 후반이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들었다. IMF 직후였고,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 수학여행을 못 간 친구들도 있었다. 힘겨웠던 시기를 꺼내 영화를 통해 바라보고자 했다. 말하자면 과거가 모티브가 아니라, 그 시기를 다루려고 한 결과물이 바로 이 영화인 셈이다.

- 시나리오와 비교해서 최종 편집본의 순서가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대사는 어떻게 작성했는지 궁금하다.

= 2019년에 13회차로 촬영을 마무리했다. 2020년 1월에 컷 편집을 끝냈는데, 빈틈이 보여서 추가촬영이 필요했다. 당시 코로나19가 시작된 즈음이었는데, 2020년 3월에 하루를 더 찍게 됐다. 이때 찍은 장면들이 처음의 시나리오와 다르다. 그렇다고 아주 많이 수정된 것은 아니다. 대사를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춘희가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어린 춘희에게 “너 왜 살아남았니?” 묻는 부분과, 사촌 오빠에게 “왜 날 미워했냐?”고 따지는 부분은 정말 쓰기 힘들었다. 사실 이전까지 춘희는 거의 듣는 편이었다. 한데 이 부분에서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강진아 배우와 대화를 자주 했다. 심지어 촬영 전날 숙소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배우와 합의가 안되는 모진 대사들의 경우에는 순전히 관객의 입장에서 결과 중심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 연출의 입장에서 시각화에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 이 영화는 내가 직접 편집했다. 화면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두명의 춘희를 어떻게 나타낼까였다. 10대의 춘희가 불쑥 나타날 때 ‘단독자’ 느낌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영화 속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기능하지 않고, 관객이 현재 이야기처럼 보길 바랐다. 성인이 된 춘희가 과거의 자신을 진짜 넘어서는 것처럼 찍고 싶었다. 그래서 ‘거울’ 보듯 상황을 진행시키려고 마음먹었다. 촬영감독과 상의해서 화면비는 2:1로 세팅했다. 콘티도 오버 더 숄더 없이 그렸다. 신 배치와 편집점에도 신경을 썼다. 만약에 춘희에게 3초를 주면, 다음 컷에서 10대 춘희에게도 3초를 주는 식으로 똑같이 맞췄다.

- 사촌 두명이 등장한다. 처음엔 사촌 동생이 주가 되고, 중반 이후로 사촌 오빠가 더 중요해진다. 그런데 둘은 함께 등장하지 않는다.

= 물리적으로 모든 인물들을 한꺼번에 등장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독립영화니까. 그 이유가 가장 크다. 여자 사촌의 경우는 어릴 적 경험이 투영돼 있다. 친척 언니와 함께 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많이 모질었다. 성인이 된 나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싶지 않아서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사로 잠깐 “걔는 영화감독이 되었어”라고만 언급된다. 일종의 자아비판이다. 본질적으로는 사촌 오빠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캐릭터는 운동권 출신이다. 그는 주인공에게 “너만은 변하지 마라”고 말한다. 지극히 소시민적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도 속물이 된다. 불륜을 저지르고, 집을 팔아 위자료를 마련한다. 어쩌면 내가 많이 봐온 어른의 모습을 사촌 오빠 캐릭터에 반영한 것 같다.

- 개인적으로 ‘슬픈데 아름다운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지 않고 복잡미묘했다. 관객이 어떻게 보아주길 바라나.

=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진아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란 생각이 들어서 함께 울었다. 스크립터가 말릴 정도였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상업영화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프레임 안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인다. 기능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처음에 글을 쓰면서는 ‘투박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탓에 대사가 좀 직접적인 편이다. 만약 슬프게 느낀다면 아마도 대사 때문일 거다. 지금 생각에는 영화가 전혀 슬프지 않다. 따뜻하거나 서늘하지도 않다.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빛깔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관객이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여유’를 얻으면 기쁠 것이다. 나 역시 이 영화를 통해 배우와 스탭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모두를 사랑한다. 관객에게 이 영화가 하나의 감정이나 정서로 이야기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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