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INTERVIEW
'원 세컨드' 장이머우 감독 인터뷰
김소미 2022-02-10

쏟아지는 빛 속에서 우리가 꾸었던 꿈

이것은 장이머우의 영화관으로 가는 길, 필름캔 속의 동화다. 장이머우 감독은 2020년대 필모그래피를 열며 자기 영화의 정수인 1980~90년대 작품들의 토대로 돌아갔다. <귀주 이야기> <인생> <책상 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 등이 품은 미덕으로 언제든 회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의 발로이면서, 시네마의 역동기 앞에 선 쓸쓸함의 고백인 <원 세컨드>는 적임자가 적시에 소화해낸 과업처럼 알맞고 자연스럽다. 19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 둔황, 고비사막을 건너온 정체불명의 남자 장주성(장역)이 농장 마을에 나타난다. 그가 갈증 속에서 애타게 찾는 오아시스는 오래전 헤어진 딸의 모습이 담긴 뉴스 필름이다. 본편 상영 전 뉴스를 틀어준다는 영화관까지 어렵게 찾아왔건만 흙바닥에 필름통이 쏟아져버려 장주성은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 모두 비상이 걸린다. 딸이 등장하는 시간은 겨우 1초. 찰나를 위해 필름을 닦고 말리고 되감기 시작한 남자에겐 그사이 가난한 10대 소녀 류가녀(류하오춘)와 우정을 쌓을 기회도 주어진다. ‘장이머우의 <시네마 천국>’이라 곧잘 수식되어온 <원 세컨드>는 2019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 직전 출품을 철회했던 의아한 이력을 뒤로한 채 다시 세상에 나왔다. 장이머우 감독은 중국 정부의 정치적 간섭을 묻는 질문에 끝까지 말을 아끼는 대신, <원 세컨드>에 담긴 아득한 시네마의 운명에 관해서는 다 추리기 힘들 만큼 긴긴 답변을 보내왔다.

- 디지털이 아니라 물리적인 셀룰로이드 조각으로 존재하는 ‘단 1초’의 영상 이미지에 목숨 거는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다. 필름의 물성에 대한 애호는 촬영감독으로 활동한 젊은 시절부터 삶에 스민 감각이었을까.

= 어린 시절부터 필름 현상 과정에 관한 추억이 참 많다. 처음 촬영을 배울 땐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기구로 기술을 연마해야 했다. 그때부터 나중에 감독이 된다면 꼭 필름에 관한 이야기를 찍고 싶었다. 필름 작업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전부 디지털화되면서 그런 바람은 더욱 강해졌다. 다행스럽게도 2018년 무렵 <원 세컨드>를 시작하면서 이 소망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도망자가 필름에 담긴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애쓴다’는 로그라인은 그토록 힘들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품었던 영화를 향한 갈망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설정이다.

- 거대한 사막 지대로 둘러싸인 간쑤성의 둔황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다. 고비사막의 이미지가 최초의 중요한 영감이었나.

= 사막 위에 있는 노동교화소에서 탈출한다는 설정이 중요했다. 며칠씩 걷고 또 걸어도 멀리 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막 주변을 맴도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중국 문화대혁명(1966~76) 때 유일한 오락 거리로서 영화를 즐기는 농장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순수하고 향토적인 감수성으로 그려진다.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에 얽힌 노스탤지어를 읽을 수 있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영화가 상영되기 전 영사실에서 스크린에 빛을 내뿜자 어른과 아이들이 한데 모여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는 순간이다. 옛날에 우리는 모두 이런 경험을 했다. 야외 상영이 열리면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스크린의 앞뒤를 가득 채웠다. 곧 장내가 후끈 달아올랐고 흥분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스크린에 그림자놀이를 하곤 했다. 쏟아지는 빛 속에서 닭, 고양이, 개의 그림자를 비추었고 자전거를 들어올리기도 했는데 나 역시 그 속에서 무척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모두 내가 어렸을 때 직접 보고 경험한 것들이다.

- 집단적 행위로서의 영화 보기가 갖는 프로파간다적 측면도 함께 존재한다. 선전영화의 내용이 관객에게 끼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극중에서 상영되는 <영웅아녀>(1963)는 한국전쟁을 중국의 시선에서 그린 애국주의 선전영화로 무척 유명하다. 특별히 <영웅아녀>를 택한 이유가 있나.

= <영웅아녀>의 귀중한 지점은 개인의 감정에 집중한 드라마라는 거다. 그 당시의 영화 대부분은 사적인 감정보다는 오로지 집단주의만을 이야기했다. <영웅아녀>의 주인공이 자신의 친딸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물론 혁명이 명분이었다고 해도 그 시절로서는 매우 드문 행동이었다(<영웅아녀>는 한국전쟁에 동원된 남매가 장교로 참전한 생부를 전선에서 극적으로 만나는 이야기다.-편집자). 마침 서사 또한 부녀 구도를 다루는 <원 세컨드>와 잘 어울려 이 영화를 택했다.

- 오염된 필름을 증류수로 닦고 펴는 일, 영사실에서 필름을 상영하는 과정, 반복 재생을 위해 필름을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설치하는 독특한 기술들을 소묘하듯 자세히 그렸다. 현장의 그 누구보다도 감독 자신이 이 분야의 전문가였으리라 추측되는데.

= 전세계 많은 감독이 있지만 이제는 나만큼 필름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나는 어린 시절에 사진 촬영, 현상, 인화, 약품 처리까지 모든 것을 재래식 설비를 통해 혼자 연구하고 배웠다. 영화처럼 이미 현상된 필름이 더러워졌을 때 어떻게 해야 물에 씻어도 물 얼룩 없이 깨끗하게 말릴 수 있는지, 몇번 닦아야 할지, 거의 다 말랐을 때 또다시 닦아내야 할지, 약품 처리한 표면이 상하지 않을지 등등 모두 내가 직접 고민했던 디테일이다.

- 간단한 줄거리와 스틸컷 일부만 보았을 때는 슬프고 비정한 작품일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하자면 서정적이고 정감 어린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 축에 속한다. 꽤나 유머를 가미한 점이 흥미로웠다.

= 전체적으로 좀 슬픈 주제를 담고 있지만 코믹한 장면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근본적으로는 허탈함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요소를 통해 관객이 너무 지치지 않았으면 했다. 내 생각에 중국인이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관념은 ‘함축’이다. 모든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보다 ‘한끗의 여운을 남기는 것’이 예술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본다. <원 세컨드>를 작업할 때 이 ‘한끗’의 경지를 염두에 두었다.

- 공산당 선전 뉴스 속에는 곡물 포대를 어깨에 이고 나르는 어린 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영사기사(범위)는 기특하다고 칭찬하지만 장주성은 어린 아이가 얼마나 힘들겠냐며 눈물 흘린다. 당대 청소년들이 노동에 동원된 역사에 대해 짚어서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장주성의 딸과 동년배인 류가녀는 그보다 더 가난하고 위태롭지만 훨씬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 그 시대는 집단주의를 강조하던 시기였고 사람들은 누구나 살기 위해 집단 속에 녹아들어야 했다. 장주성의 딸은 어린 나이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 변화를 찾으려고 했다. 반면 류가녀는 시대와 호응하지 않는 유별난 인간형이다. 이들은 사회의 변방을 떠돌아다니며 남다른 부류로 취급되곤 했는데, 어쩌면 장주성은 류가녀로부터 자기 딸의 또 다른 그림자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딸에 대한 그리움을 류가녀에게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 부모 없이 남동생을 지켜야 하는 류가녀를 연기한 신인배우 류하오춘의 존재가 감탄스럽다. 맑은 발성과 애처로운 눈물 연기, 말괄량이 같은 표정이 어린 시절의 저우동위를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만났나.

= 류하오춘이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처음 만났다. 어린 나이에도 특별히 총명해 보였다. <삼국: 무영자>(2018)에 캐스팅하고 싶어 오디션을 봤는데 시나리오가 바뀌면서 나이대가 맞지 않아 함께할 수 없었다. 헤어질 때 류하오춘에게 대학 입학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라고, 이후에 내가 다시 꼭 캐스팅하겠다고 약속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원 세컨드>를 준비하며 류하오춘을 찾았더니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 광고 작업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라. 무척 감동받았다. 류하오춘은 그 뒤로도 반년간의 긴 트레이닝을 거쳤고 많은 후보자들과 함께 오디션까지 치른 다음 <원 세컨드>에 합류했다.

- 류하오춘 이전에 공리, 장쯔이, 저우동위 등 중국영화를 이끄는 여성배우들을 발굴해왔다. 캐스팅에 있어 대가의 안목과 요령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 감독들에게 특별한 배우를 찾아내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을 거라고들 기대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오히려 매우 과학적인 과정이다. 류하오춘의 경우 여러 체계적인 선별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마지막까지 남은 단 한 사람이었다. 이후에야 류하오춘을 만난 것이 운명이라 느꼈고 나 역시 류하오춘이 저우동위를 잇는 중국영화의 새 후계자가 되리라 본다.

- 촬영에 있어 중요한 모티프는 무엇이었을까. 태양 아래 비춰보는 셀룰로이드 조각, 필름을 이어 붙여 만든 전등갓, 어둠 속에 설치된 간이 극장의 모습 등 빛의 작용이 일관적으로 시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 많은 매체들이 <원 세컨드>를 <시네마 천국>(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 1988)에 비유하며 과거에 영화가 사람들에게 주는 즐거움과 희망을 표현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거의 흑백에 가까운 톤으로 빛과 그림자, 이미지를 표현했고 보다 개인적인 영화에 대한 열정과 갈망을 담았다.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와중에 영화는 앞으로 어떻게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 계속 존재하긴 할까?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처럼 함께 영화를 보는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젠 사라지게 될까? 처음에 우리는 영화를 ‘빛의 예술’이라고 불렀는데 디지털화 이후로는 더이상 그런 수식을 잘 쓰지 않는다. 그 영롱한 ‘빛의 반짝임’이 어쩌면 점차 멀어져가는 아름다움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촬영했다.

- 장주성이 그토록 애타게 갈구했던 딸의 모습이 담긴 필름 조각은 결국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 필름을 감싸고 있던 흰 종이만 겨우 붙잡은 류가녀가 영문을 모른 채 장주성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는 장면의 아이러니가 강렬했다. 뉴스 릴에 잠깐 등장한 그 소녀가 정말 주인공의 딸이 맞기는 할까, 생각하게 된다. 필름 속에 딸이 있다는 믿음, 영화의 환상이 장주성을 살게 했다는 것만 분명하다.

= 삶이 종종 그렇다. 우리 마음속에 희망이 정말 존재하는지? 혹 무언가를 두고 그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영화를 만들 때의 내 관점에서는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자신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어떤 형태의 용기가 존재하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 사막에서 필름을 잃어버리고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는 장주성의 모습에서 영화를 끝낼 법도 한데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한 에필로그를 더했다.

= 사실 나만의 이상적인 결말은 사막에 잠긴 필름 두 조각이 아득한 모래바람 속에 사라지는 모습과 함께 영화가 끝나는 것이었다. 앞서 나눈 삶의 아이러니한 의미와 더불어 거기엔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서글픔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결말은 많은 관객에게 슬픔을 남길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 장주성의 삶이 점차 정상 궤도에 들어서는 시점까지 보여줌으로써 보다 희망적인 엔딩이 되도록 바꿨다. 물론 사라진 필름 두 조각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 디지털영화의 도래를 받아들였고 이제는 OTT를 비롯한 새로운 플랫폼의 대두를 실시간으로 마주하고 있을 테다. <원 세컨드> 속의 ‘필름 복원 작업’은 그래서 직접적이리만치 감독의 향수와 염려를 내비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시네마의 새로운 운명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 요즘 관객에게 한 영화의 생명력은 3~4주인 것 같다. 그래서 영화는 어느 때보다도 계절성이 있는 상품이 되었다. 솔직히 감독으로서 이시대를 따라가려 노력하고 새로운 기술과 관념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영화는 본래 기술과 함께 나아간 매체이므로 보수적인 태도는 유용하지 않다. 특히 특수효과, 가상현실, 음악 등의 영역에서 공부가 필요하다. 가끔이지만 쇼츠를 보고 인터넷 쇼핑도 하고 화제가 되는 이슈를 따라잡으면서 젊은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역동에 적응하는 가운데서도 지키고 싶은 영화관이 있다면.

= 20년 전의 어떤 영화를 떠올린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그 영화는 좋은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를 다시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 전공자나 시네필이 아니라면 일반 관객이 20~30년 전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영화가 좋은 인상을 남기고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결국 영화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감정이다. 영화적 감성, 사람, 인생과 같은 주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많은 영상들이 범람하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새 기술에 무뎌지는 이런 때일수록 변화를 받아들이되 각자가 원하는 신념을 지킬 필요가 있다. 대체 뭘 표현하고 싶은가? 그것이 핵심이다. 멋진 기술로 잘 찍은 영화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가장 감동을 주는 것은 내가 보기에 감정적인 것들이다.

- 문화대혁명의 영향권 아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데뷔작 <붉은 수수밭>(1989)부터 장이머우 영화의 근원으로 자리 잡았다. 시대적 정서에 천착하고 이를 반복하는 작업이 감독 자신에게 어떤 효과나 의미를 가질까. 계속해서 더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고 느끼나.

= 누구에게나 자기 청춘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내게 특별했던 시기는 18살에서 28살까지의 10년이다. 이 일부분의 기억을 가지고 영화를 찍어왔다. 사실 이제는 이런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개인적으로 아쉽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서겠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영화를 찍어야 하지 않을까.

-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에 이어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았다. 신작 준비와 병행 중인가.

= 요즘은 아무래도 올림픽 개폐막식 준비로 바쁘게 보내고 있다. 영광스럽게도 하계와 동계, 두번이나 감독의 기회가 주어져 중국 매체에서는 나를 ‘쌍올림픽 감독’이라 부르더라. 다가오는 2월4일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색다르고 예술적인 연출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다. 신작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새 영화는 2022년 7월에 촬영을 시작한다. <원 세컨드>와는 전혀 다른 장르지만 역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사진제공 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