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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학교는', 장르와 정점과 패턴의 함정 사이
송경원 2022-02-16

지금 K좀비는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보자마자 ‘이건 먹힌다’라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아마도 넷플릭스 시청자들의 관심을 손쉽게 사로잡을 것이다. <부산행> <킹덤>에서 이어진 K좀비 불패 신화를 쓸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징어 게임>이 그랬듯) 흥행과 작품성, 완성도는 대부분 별개의 그래프를 그린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개별 작품으로서보다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훨씬 흥미롭고 유효하다. K좀비는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현상과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목만 보고 깜박 속았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은 당연히 학교를 무대로 벌어지는 좀비물일 거라 생각했다.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지우학>에선 학교 바깥 이야기도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학생들이 편으로 뭉쳐 탈출을 도모하는 사이 바깥에선 자식들을 걱정하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벌어진다. 좀비 바이러스는 학교 바깥에도 퍼져 효산시 전체를 공황 상태에 빠트리고 카메라는 병원, 국회, 광장과 골목 등을 보여주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덕분에 꽤 빠른 전개처럼 다가왔던 속도가 종종 발을 잡히기도 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입체적으로 다양한 사연을 보여준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반대로 서사가 산만하게 흩어지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산만하고 다양하게. 하이틴물과 좀비를 결합한 <지우학>의 톤은 자신이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대상을 닮았다.

학교 안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일 거라는 착각은 장르에 대한 선입견 탓이다. <부산행>이 기차 안으로 무대를 좁혔던 것처럼 크리처 장르는 대개 공간을 축소, 한정하는 걸 선호한다. 제작비 등 여러 현실적인 여건이 제일 큰 이유겠지만 의도와 무관하게 최소한 두 가지 정도는 눈여겨봄직한 결과로 이어진다. 우선 축소, 선택된 무대 자체가 곧 현실을 압축한 상징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SF나 판타지, 크리처물처럼 상상을 기반으로 한 장르의 경우 이야기의 무대 혹은 무대의 구성이 곧 메시지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산행>을 예로 든다면 칸칸이 나뉜 열차의 구조는 한국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다. <#살아있다>의 고립된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상징성이 곧 메시지라고 해도 좋겠다. 다음으로 이렇게 선택된 무대를 폐쇄시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격리된 공간에서 행동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비유하자면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가 된다. 주인공 무리의 구성은 사회의 압축이며 각 인물들은 개인적인 특성보다 집단의 대표성을 우선한다. 중립적인 주인공, 전형적인 나쁜 놈, 이기적인 인물, 조력자, 사회적 약자와 희생양 등 특정 집단의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개성(혹은 복잡한 변화의 여지)은 옅어지고 스테레오타입으로 정착하는 경우가 많다. <지우학>도 마찬가지다.

스테레오타입은 승리한다

<지우학>의 캐릭터들은 식상하다 못해 정직하다. 좀비가 나타난 뒤 집단은 크게 세 그룹으로 갈린다. 메인 그룹은 온조(박지후)와 청산(윤찬영) 그룹이다. 대체로 이야기는 이 그룹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청산은 모든 면에서 평균적인 인물이다. 눈에 띄는 요소는 그다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모자란 것도 없는, 막상 닥치면 뭐든 나름 해나가는 캐릭터. 평균 지향적인 인물은 대부분 관객의 감정이입을 위한 ‘적당히’의 포지션을 점한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우유부단하고, 적당히 답답하며, 적당히 행동력 있는 인물. 온조도 기본적으로는 청산과 유사한 역할이지만 여기에 약간의 민폐 성향이 탑재된다.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고 상식적인 인물이지만 극한상황에서 종종 고구마 역할을 수행한다. 친구 이삭(김주아)이 감염되어 집단에서 탈락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차마 친구를 버리지 못하고 좀비가 된 이삭을 붙잡는 온조의 행동은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또 다른 이들(대표적으로 청산)에게는 잠재적인 위기를 불러온다.

온조와 청산의 절친 포지션에 각각 인물들이 배치된다. 온조의 절친 이삭과 청산의 절친 경수(함성민)는 기능적인 캐릭터다. 이들 역시 주인공의 친구라는 사람 좋은 캐릭터 이상의 개성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들의 탈락은 주인공들을 성장, 각성시키는 방아쇠인 까닭에 기능적이고 필연적이다. 다만 경수의 경우 대척점에 있는 나연(이유미) 덕분에 좀더 선명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고급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기적인 나연과 사람 좋고 구김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 경수는 개별 캐릭터의 성격보다는 집단의 특성을 대변한다. 경수의 이타적이고 살짝 가벼우면서도 서글서글한 성격은 자기만 아는 나연의 대척점에 자리하면서 부여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경제적 계급 차를 대변하는 동시에 양산된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를 복제한다. 가난하지만 착한 집단과 (적당히) 부자라서 더 이기적인 집단.

스테레오타입은 더 있다. 수혁(로몬)은 전형적인 체육 계열의 올곧은 캐릭터, 그 짝인 남라(조이현)는 폐쇄적이지만 속은 착한 냉미녀 계열이다. 온조, 청산 그룹에는 적당히 똑똑해 보이는 지능형 캐릭터, 힘은 센 파워형 캐릭터 등이 추가로 배치된다. 마치 롤플레잉 게임 속 파티처럼 외부의 적에 맞설 적당한 구성원으로 꾸려졌다고 봐도 좋겠다. 두 번째 그룹은 특수 기능을 가진 인물이다. 양궁부의 하리(하승리)와 불량 소녀 미진(이은샘)은 여자화장실에서 만나 원치 않은 동행을 한다. 세 번째 그룹은 단독 행동하는 부외자들이다. 괴롭힘에 힘들어하는 은지(오혜수)와 철수(안지호)는 자살 시도를 하려다 학교 옥상에서 전지적 관찰자의 역할을 획득한다. 아무도 모르게 임신을 한 희수(이채은)는 몸이 좋지 않아 학교 밖으로 일찍 나갔다가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다. 여기에 학교 폭력을 주도한 불량 양아치 그룹의 귀남(유인수)이 홀로 살아남아 예기치 않은(혹은 완벽히 예정된) 빌런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고 보면 장르는 전염과 변이를 반복하는 바이러스를 닮았다. <지우학>은 좀비물과 학원물을 이종 교배한 장르다. 아포칼립스 상황을 기반으로 한 이런 장르 믹싱은 진즉에 이뤄졌다. <지우학>이 직접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일본 라이트노벨이나 코믹스에서 유행했던 학원 좀비물(대표적으로 <학원묵시록>)의 자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사실 그건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반복 변주는 장르의 숙명이고 일본의 ‘배틀로얄물’과 닮았다고 해서 <오징어 게임>의 성취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지우학>도 마찬가지다. 무난하고 행동력 있는데 수더분한 남주인공, 착하지만 답답한 민폐 여주인공, 밝은 길로 돌아온 체육 계열 쿨남과 속은 따뜻한 쿨녀, 이기적인 애정 결핍녀와 구김살 없는 착한 친구a와 착한 친구b 등 그야말로 스테레오타입 캐릭터를 수집한 양산형 구성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른바 K좀비 맥락에서 특수한 것들이 추가될 때 기묘한 흐름으로 꺾인다.

K좀비, ‘무엇을’보다 ‘어디서’

현재 한국에서 제작한 OTT 시리즈의 대세는 두 가지 장르로 요약된다. 앞으로 계속될 <오징어 게임>류의 배틀로얄물, 그리고 좀비물이다. 왜 이 소재들이 유행하는지 이유를 분석하는 건 쓸모없는 짓이다. 이유는 언제나 사후적인 꼬리표에 불과하니까. <지우학>이 정밀한 분석과 독해를 요구하는 수작도 아니다. 좋은 의미에서 익숙하고 잘 팔릴 것 같은 요소들을 적당히 조합한, 굳이 칭찬을 보탠다면 상업적으로 잘 조율된 영리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편이 좀더 솔직한 감상이다. <지우학>에서는 일본 학원물, 아포칼립스 장르물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그와 별개로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언젠가부터 한국의 대표 장르 중 하나가 된 좀비물 계열에서의 변화다. 한국의 스토리텔링 영상 콘텐츠에서 좀비물이 대세가 된 건 아마도 <부산행>부터일 것이다. <부산행>은 이제는 끝자락이다 싶은 좀비물에서 여전히 뭔가 더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시각적으로 두드러지는 건 좀비의 특성에 관한 부분이고, 드라마적으로는 이른바 신파로 폄하되는 감정적 과잉 상태를 지향한다.

크리처 장르의 재미난 점은 장르가 변주를 시도할 때 크리처를 중심에 둔다는 것이다. 느리게 걸어다니던 좀비에서 빠르게 뛰는 좀비(<28일 후…>)나 집단으로 뭉쳐 마치 해일처럼 덮쳐오기도 하는 좀비(<월드워Z>)까지 계속 업그레이드하며 전에 보지 못한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러다보면 가끔 말도 안되는 조합(<웜 바디스>)이 나오기도 한다. <부산행>이 특이했던 건 관절 운동을 하는 것 같은 좀비의 물리적 특성에 있지 않다(물론 기발한 동작들도 재미있긴 했지만). 좀비 자체보다 공간, 그리고 드라마에 좀더 집중했다는 게 <부산행> 이후 한국 좀비물이 택한 길이다. 가령 <월드워Z>만 해도 대전제는 어디까지나 좀비다. <월드워Z>는 원인 모를 감염이 확산되자 그 원인을 찾아나가야 하는 남자의 행보를 따른다. 반면 <부산행> 이후 한국 좀비물의 대전제는 휴먼 드라마다. <부산행>에서 좀비는 차라리 배경에 가깝다. 좀비라는 익숙하고도 공포스러운 상황이 닥쳤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집중한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리액션에 집중하는 연상호 감독의 세계관 때문이었지만 이런 태도와 패턴은 이후 한국의 좀비물에 의도치 않게 확산, 반복된다. 좀비는 단지 재난 상황을 제시하는 배경일 뿐(물론 배경 자체가 기발하고 흥미로울수록 더 재밌겠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 안에서 굴러가는 드라마들이다. 강화된 드라마에 감정적인 요소가 더해지면 그게 신파로 받아들여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킹덤> <반도> <#살아있다>는 물론 최근 방영된 드라마 <해피니스>까지 이러한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좀비는 거들 뿐 초점은 공간(과거 조선, 황폐화된 도시, 아파트)과 그 속에 버티고 선 인물이다. 요컨대 ‘무엇을’보다 ‘어디서’를 통해 정체성을 확보한다.

덧붙여 ‘어떻게’도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다. 이 부분에서 K좀비물은 다시금 패턴에 기댄다. 패턴에는 두 가지 이름표가 있다. 하나는 신파, 다른 하나는 풍자. <지우학>은 의도적으로 패턴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건 잘 팔리는, 검증된 이야기란 말이니까. 흔히 말하는 감정적 과잉으로서의 신파도 마찬가지다. 익숙해서 질리지만, 그만큼 적재적소에 쓰면 맛을 보장하는 조미료라고 봐도 무방하다. <오징어 게임>을 비롯한 K콘텐츠의 흥행 요소로 신파를 들먹이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크리처 등 특정 장르와 뒤섞일 때 어디까지나 인물 관계에 바탕을 둔 드라마를 중심에 두는 건 패턴에 따른 당연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익숙한 것이 외부에선 낯설고 기발한 조합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파라는 패턴 자체는 중립적이다. 또 하나의 패턴인 풍자의 경우 <지우학>의 재현 방식은 일차원적이다. 학교 폭력, 왕따 문제, 빈부 갈등 등이 캐릭터화해 직관적이고 얄팍하게 배치된다.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집단극으로 볼륨을 늘린 순간 단일 캐릭터의 복잡다단한 내면이나 상황을 파고들 여지가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장르에서 인물들은 개별의 살아 있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특정 현상이나 집단을 대변하는 대표자로서 기능한다. 당연히 평면적, 일차원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변화(를 통한 성장)를 허락받는 건 비중 있는 주인공 정도겠지만 인물도, 보여줄 것도 너무 많은 <지우학>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다시 돌아가 ‘K좀비’라고 부를 만한 경향이 존재한다면 그 중심에는 크리처보다 캐릭터간의 드라마와 배경 공간에 바탕을 둔 구조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우학>이 택한 학교라는 공간은 의미심장하다. 좀비라는 불가항력의 재난 상황에 10대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본격적으로 시선을 돌렸다는 점에서 이건 (상업적으로) 당연한 수순인 동시에 하나의 현상으로서 이채롭다. 방점을 좀비가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에 찍는다면 <보건교사 안은영>과 같은 시리즈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을 붙여보자면 ‘학교는 어떻게 이상한 나라가 되어가는가’ 정도가 될까. 2010년대 독립영화를 관통하는 학교 폭력에 대한 사실적인 재현은 이제 상업적인 포장을 더해 귀신, 좀비 같은 비현실의 영역에서 다채롭게 피어난다. 다만 무대가 색다르게 바뀔수록(혹은 무대가 곧 메시지가 될수록) 역설적으로 드라마는 익숙하고 안전하며 식상하게 바뀌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다. 언젠가부터 K좀비물의 방점은 ‘어떻게’나 ‘누가’가 아니라 ‘어디서’에 찍혔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라는 무대가 어떻게 비틀리고 변형되는지가 곧 <지우학>의 메시지이자 정체성이라 해도 좋겠다.

<부산행>

지금 우리 학교’에는 보름달이 뜬 걸까

<지우학>의 중심은 학교다. 당연히 학원물의 패턴을 따른다. 예를 들면 오랜 친구와 사랑과 우정 사이, 솔직하지 못한 모범생과 개과천선한 체육 계열 남학생의 솔직하지 못한 연애 등 닮고 닳은 구도가 여기서도 반복된다. 학원물의 반복과 좀비물의 반복. 여기에 새로운 건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촘촘히 개별 장면을 보면 더하다. 이건 거의 클리셰 모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기시감 있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반복된다. 그런데 반복과 반복이 겹칠 때 의도치 않은 실패가 시작된다. 그 사이에서 미묘한 균열 같은 것들이 발생한다고 할까. <지우학>의 경우 산만함과 다양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 빤한 시리즈의 속도는 약간 이상하다. <지우학>은 빠르고 가볍고 경쾌한 걸 추구한다. 물리자마자 빠르게 변하는 좀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별 에피소드의 전개 속도, 인물의 탈락과 합류 등 구성의 변화도 꽤 빠른 편이다. 학생들이 좀비와 싸울 때 나오는 음악도 긴장감을 더하는 것보다는 장난스러운 톤에 가깝다. 마치 흥분되는 모험을 하는 것마냥.

하지만 의도와 달리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빠르다는 인상을 받지 못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에피소드들이 산만하게 흩어진 탓이다. 온조와 청산 그룹 이야기를 하다가 하리와 미진 그룹, 귀남의 사정도 짧게라도 보여줘야 한다. 게다가 학교 바깥의 사정, 부모들의 에피소드도 빠지지 않는다. 공간을 분리, 차단시키는 건 긴장감을 집중시키는 요소이기도 한데 <지우학>은 그 지점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와 공간을 담으려 하다가 밀도가 흩어진다. 상업적 완성도 측면에서 이건 실패에 가깝지만 하나의 현상으로서는 흥미롭다. ‘우리 학교’의 이야기면서도 ‘우리 학교’만의 이야기로 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우학>은 학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좀비라는 외부의 충격 덕분에 친구들 사이 희미한 관계들, 애정과 우정, 폭력과 계급성 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괴롭힘에 자살을 결심한 은지의 대사를 빌리자면 “원래 지옥이었는데 (좀비 덕분에) 진짜 지옥이 됐다”. 동시에 이건 학교 바깥에서 본 학교의 (겉)모습이기도 하다. <지우학>에서 폐쇄되는 공간은 학교가 아니다. 차라리 효산시를 폐쇄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학교 바깥에서 바라본, 학교 안의 사정. 그 때문인지 <지우학>이 보여주는 학교 내부의 에피소드는 어딘지 피상적이고 일차원적이며 패턴화된 선입견에 기반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장르물의 패턴을 반복하면서 서사, 캐릭터, (그나마 특색 있던) 공간마저 점점 더 단순화된다. 그 결과 <지우학>에서는 의외로 (한국의) 학교라는 공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게 의도일 수도 있다. 1화에서 남라가 해석하는 영어 문장을 빌리자면 “사실 우리 중 누구도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원래 장르는 선입견을 가지고 노는 게임이고, <지우학>의 선택은 K좀비물의 연장에서 (먹히는) 패턴만을 추출한 전략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모두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도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르는 항상 그런 식으로 정점을 찍고 쇠락해왔다. 지금 저쪽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수없이 반복된 예정된 길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충분히 재밌기도 하지만 문득 이게 보름달의 밝음이 아닐까 싶어 살짝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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