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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슈퍼히어로에서 '슈퍼'를 빼면
이경희(SF 작가) 2022-01-06

<스타게이트 유니버스>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스핀오프 시리즈였다. 당대 최고 인기 SF 시리즈인 <로스트>와 <배틀스타 갤럭티카>(2004)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기존 <스타게이트> 시리즈의 검증된 흥행 공식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은하에서 수십억 광년 떨어진 우주선 ‘데스티니’에 고립된 사람들의 생존 이야기를 다룬다. <스타게이트 SG-1>이 <스타워즈>풍의 유쾌한 활극이었다면, <스타게이트 유니버스> 속 인물들의 생존기에는 처절함과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좋게 말하면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시도고, 나쁘게 말하면 기존 작품과 접점을 찾기 어려운 괴상한 스핀오프인 셈이다.

등장인물들의 면면도 상대적으로 평범하다. ‘SG-1’의 주인공들은 총 한 자루와 플라스틱 폭탄만 갖고도 농담 따먹기를 주고받으며 외계 제국의 함대를 침몰시키는 <스타워즈>식 슈퍼 영웅이었다. 반면 ‘유니버스’ 속 주인공들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겁다. 전쟁은커녕 당장 내일 먹을 식량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 슈퍼히어로도 슈퍼지니어스도 아닌 그들은 우주선을 조종하긴커녕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정처 없이 우주를 표류할 뿐이다.

하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성향을 지녔다. 능력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를 돌보고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은 동일한 것이다. 때문에 ‘유니버스’ 속 주인공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고단하고 처연하다. 히어로지만 슈퍼는 아니기에 그들은 매번 성공으로부터 미끄러진다. 모두를 구원하진 못한다. 군인들은 부상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과학자들은 불완전한 가설과 추측에 파묻혀 괴로워한다. 정치가는 사람들을 규합하긴커녕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킨다. 선장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선원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무력감과 상실로 채워져 있다.

기존 시리즈와 모든 면에서 괴리된 탓에 <스타게이트 유니버스>는 시리즈 팬들로부터 외면당했고, 줄거리를 마무리짓지 못한 채 두 시즌 만에 조기 종영되었다.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스핀오프인 <스타게이트 아틀란티스>마저 종영을 선언하면서 <스타게이트> 프랜차이즈는 결국 끝을 맞이하게 된다. 씁쓸한 결말이다.

그 후로 몇년간은 꽤 암울한 시기였던 것 같다. 더는 챙겨볼 만한 SF 시리즈를 찾기 어려웠으니까. 더는 <스타트렉> 신작이 나오지 않았고, <로스트>와 <배틀스타 갤럭티카>도 끝나버렸다. <닥터 후>는 이상하게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챙겨본 작품을 꼽자면 <프린지> 정도? 지루한 몇년을 버틴 끝에, 나는 오랜만에 흥미로운 TV 시리즈와 만나게 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에이전트 오브 쉴드>. ‘어벤져스’ 붐을 타고 본격적으로 TV에까지 마블 세계관의 확장을 시도한 작품이다.

<에이전트 오브 쉴드>는 초창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영화들의 중심축이었던 비밀 조직 ‘쉴드’와 그 요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페이즈1의 감초 조역이었던 ‘필 콜슨’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벤져스 영웅들의 활약에 가려진 뒷이야기와 쉴드 요원들의 애환을 그린다는 기획… 이었을 텐데, 무슨 사정인지 영화쪽과 연계되는 접점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작품은 오히려 <X파일>이나 <프린지>식의 수사물에 가깝다. 코드명 0-8-4라 불리는 초자연현상의 미스터리를 추적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옴니버스 에피소드가 초반 줄거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만 팀 구성이 조금 특이하다. 남녀 한쌍의 수사관이 아니라 군인과 과학자가 반씩 어우러진 여섯 멤버가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앙상블을 이루는 것이다. 마치 <스타게이트>처럼.

적당히 마블 영화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무난히 첫 시즌을 마친 <에이전트 오브 쉴드>는 두 번째 시즌에서 ‘인휴먼즈’라는 초능력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토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여전히 수사물의 구성을 따르기는 하지만 서서히 진상이 밝혀지는 사건의 스케일은 시즌1보다 한층 거대하다.

과도기인 시즌3는 솔직히 조금 애처롭다. 어벤져스가 먹다버린 하이드라 설정으로 연명하며 지루한 인휴먼즈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에이전트 오브 쉴드>가 본격적으로 MCU 영화와 작별하고 독립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시즌이기도 하다.

깔끔하게 MCU와의 관계를 털어버리고 나자 작품은 놀라운 생명력을 얻기 시작한다. 시즌3 이후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시리즈가 매 시즌 완전히 새로운 장르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시즌4에선 ‘고스트 라이더’를 통해 오컬트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휴머노이드와 평행 우주를 중심 소재로 내세우며 흥미로운 진짜, 가짜 놀이도 시도한다. 시즌5에선 시간 여행 소재를 적극적으로 다루는가 싶더니 마지막엔 외계인 침공 이야기로 변해버리고, 시즌6에선 아예 우주를 배경으로 활극을 벌이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된다. 마지막 시즌인 시즌7에선 시대를 넘나들며 온갖 고전 SF 클리셰를 끌어다 비틀고 패러디하며 자유를 만끽하는데, 제작진의 낄낄거리는 즐거움이 화면을 뚫고 전해질 정도다. 개인적으론 비슷한 컨셉을 내세운 <완다비전>보다도 흥미롭게 보았다. 만약 이 작품이 MCU가 아닌 오리지널 시리즈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흥미로운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이전트 오브 쉴드>는 어벤져스 세계에 속한 시리즈고, 작품 속 세계는 어느 정도 슈퍼히어로 이야기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슈퍼 위기를 겪으며 슈퍼 악당들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벤져스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야 출중하지만 그렇다고 슈퍼히어로는 아닌, 어중간한 능력을 지닌 요원들일 뿐이다. 어쩌면 어벤져스보다도 숭고한 히어로 타입의 성품을 지녔지만 능력은 그렇지 못한 탓에 이들은 매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만다.

‘슈퍼’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이들의 싸움은 당연하게도 슈퍼히어로의 싸움과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 함께 팀을 이루고, 협동하고, 서로의 부족한 능력을 메워가며 겨우겨우 슈퍼 위기에 맞서지만, 그럼에도 매번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몸과 마음의 어딘가가 망가지고 상실과 트라우마에 고통받은 후에야 겨우 자그마한 평화를 쟁취한다. 슈퍼히어로에게 결핍은 초능력의 원천이지만 이들에게 결핍은 오롯이 짊어지고 살아내야 할 상처일 뿐이다.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가족이 된다.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힘을 모아 함께 맞서는 것. 어쩌면 그게 현실의 우리가 직면하게 될 싸움의 진짜 모습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