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에세이의 태반은 글쓴이의 엉터리 기억 혹은 날조된 픽션입니다.
중학생 시절, 정말 읽고 싶은 책이 있었다.
그 책은 동네 서점 소설 코너에 갈 때마다 매번 눈에 띄었다. 새카만 책등에 노란 글씨로 <은하영웅전설>(이하 <은영전>)이라는 제목이 크게 박힌 열권짜리 대하소설. 각권의 부제도 너무 멋있었다. 여명편, 야망편, 자복편, 책모편, 풍운편…. 표지와 제목만으로 내 혼을 사로잡은 열권의 책은 보무도 당당히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퇴마록>과 <이문열 삼국지>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진 않았고, 사실은 평매대 아래쪽 구석에 <듄> 해적판과 함께 꽂혀 있었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이기에 책은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휙 팔려버릴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법. 나는 서점에 들를 때마다 책이 그대로 남아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매대로 달려갔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일인데, 당시의 나는 서점 사장님에게 책을 주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멍하니 <은영전>과 <듄>을 번갈아 바라보며 용돈이 생기면 무얼 먼저 사서 읽어야 하나 행복한 고민을 했다. 실제로 받는 용돈이라 해봐야 책을 구입하긴커녕 대여점에서 <드래곤 라자> 빌려 읽기에도 모자랐지만. 나는 고작 중학생이었고, 당시는 IMF 금융 위기의 먹구름이 드리우던 시절이었다.
안달이 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켰다. 아니, 어쩌면 인터넷이 아니라 새롬 데이터맨으로 나우누리에 접속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곳에선 이미 <은영전>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게시판마다 “나는 이미 <은영전>을 읽어봤다!”라며 믿을 수 없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책을 어제 샀다면서 어떻게 벌써 열권을? (가능하다. <은영전>이니까.)
그들이 어찌나 뜨겁게 작품을 찬양하던지 나는 아직 읽지도 않은 소설을 마음속 명예의 전당 꼭대기에 올려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터넷에 떠도는 풍문이 사실이라면 이제 <이문열 삼국지>는 저무는 태양이요, <은영전>이야말로 떠오르는 샛별이니, <은영전>은 우주의 <삼국지>, 새 시대의 <삼국지>가 될 운명이었다.
참다못한 나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동네에 있는 대여점이란 대여점은 다 뒤지고 옆 동네까지 돌아보았지만, <이문열 삼국지>는 어디나 있어도 우주의 <삼국지>는 없었다. 나는 화가 났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저 시대에 뒤처진 사장들은 미닫이식 빌트인 책장 사이에 틀어박혀 <이문열 삼국지>가 죽었다는 소문을 아직도 듣지 못했단 말인가!라고 호통을 치진 못했고, 저어 사장님… 혹시 은하영웅… 아, 아닙니다라며 조용히 뒷걸음칠 뿐이었다.
그 후로 나는 게임 잡지에 실린 <은영전> 게임 광고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쪽글들을 읽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에 빠졌다. ‘대체 양 웬리는 얼마나 천재일까?’, ‘라인하르트가 그렇게 건방진 애송이야?’ 따위의 망상을 거듭하다 결국 혼자 팬픽을 쓰기까지 했다. 오 마이 갓. 심지어 그걸 엄마에게 읽히기까지 했던 것 같다. 잊고 있던 기억인데, 갑자기 울고 싶어진다.
오매불망 <은영전> 바라기로 살아가길 수개월. 어느 날 나는 천상의 계시를 받았다. 우연한 계기로 <은영전>이 KAIST 도서관 대출 순위 1위에 올랐다는 기사를 발견한 거였다. 나는 그 기사를 프린트해 부모님에게 내밀며 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부모님은 흔쾌히 한방에 책을 구입해주셨고. 물론 이 책이 학업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 사주신 건 아닐 것이다. 그냥 하도 졸라대니 안타까워 그러셨겠지. 이유야 어쨌건 해피엔딩. 기쁨에 흠뻑 잠긴 나는 침대 머리맡에 신줏단지처럼 열권을 모셔두고 매일 밤 한권씩 순서대로 책을 읽어나가다 8권에서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읽어보신 분들은 그 이유를 아시리라.
머릿속 환상을 걷어내고 실제로 내가 마주하게 된 <은영전>은…. 음, 일단 우주의 <삼국지>는 맞다. 우주가 배경이고, 나라가 셋 나온다. 광활한 은하계를 배경으로 하는 열권짜리 작품에 국가가 딱 셋밖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세 나라를 오갈 수 있는 통로는 전 우주에 두개뿐인데, 심지어 그중 한쪽 통로는 이젤론이라는 요새행성 하나로 틀어막을 수 있단다. 기대했던 우주 전쟁 장면들도 어딘가 이상하다. 어쩐지 삽화에 그려진 사람들이 전부 납작한 2D 캐릭터들이더라니, 우주의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우주선을 위아래로 움직일 줄 모른다. 은하계 반대편까지 도약할 수 있는 우주선을 갖고도 마케도니아 밀집 방진 수준의 전술로 일관한다. 양 진영의 주인공 격인 라인하르트와 양 웬리가 전쟁 천재로 칭송받는 이유는 우주의 나머지 모두가 바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권력 투쟁을 다루는 정치물이라고 하기에도 왠지 좀 아쉽다. 황제가 지배하는 은하제국과 공화정으로 운영되는 자유행성동맹의 대립을 통해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나름의 냉소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좀 고개가 갸웃해지는 면이 있다.만약 당신이 <은영전>의 책장을 펼치며 치밀한 전략 전술로 채워진 밀리터리 서사를 기대했다거나,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식견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그런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은영전>은 <삼국지>다. <삼국지>는 영웅담이고. <은영전>의 매력 역시 ‘영웅’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전장을 수놓는 보석 같은 미남들과 그 미남들 사이에 오가는 농밀한 감정들. 영웅담으로서 <은영전>은 분명 <삼국지>에 비견할 만하다. 그림 같은 미모를 뽐내는 라인하르트와 절친 키르히아이스, 매번 나른하고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백전무패인 전략가 양 웬리, 미터마이어와 로이엔탈의 불꽃같은 케미, 강대국 사이를 줄타기하는 약소국 페잔의 모략가 루빈스키 등 하나같이 강렬한 캐릭터성을 자랑한다. 심지어 이 작품은 악역도 제대로 악역이다. 삼류 악당 욥 트류니히트는 등장하는 장면마다 짜증이 솟구쳐서 도무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욥 트류니히트 같은 어려운 철자를 찾아보지도 않고 바로 기억해서 쓸 수 있을 정도다.
이토록 매력적인 영웅들이 때로는 전우로서, 때로는 적으로서, 때로는 라이벌이나 부모자식으로서, 적이자 가족으로서, 충직한 부하이자 친구로서 격정을 주고받는 모습이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지. 이런 맛깔난 캐릭터들이 우주의 별처럼 잔뜩 등장했다 먼지처럼 죽어나가니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가히 우주의 <삼국지>다.
게다가 그들은 우주의 맹장이라는 사실. 무대가 우주로 바뀐 덕분에 우리는 수염 숭숭 배불뚝이 아저씨의 힘자랑 대신 매끈한 군복을 차려입은 인텔리 장군들의 꽃처럼 세련된 미모를 맘 편히 즐길 수 있다. 이 또한 얼마나 축복인지.
<삼국지>에서 뭘 배우자는 사람들의 말은 대개 허무맹랑한 장삿속이며, <삼국지>는 그냥 재미있는 소설일 뿐이듯, <은영전>에서 뭘 배우거나 인생의 깊이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미리부터 접어두는 편이 낫다. 하지만 <은영전>은 정말 재미있다. 하루에 열권을 내리읽는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거면 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