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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너머에' 리얼함의 형식이 우리를 기만할 때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비평 너머에] 비평을 쓰기 위해 가능하다면 영화를 두번 정도 본다. 새로운 발견을 기다릴 때도 있지만, 기억의 오류가 없는지 점검하기 위해서다. 마음만 먹으면 같은 영화를 손쉽게 돌려 볼 수 있게 되면서 영화를 본다는 의미가 점점 퇴색된다고 느낀다. 신선한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의 오류를 용기 있게 드러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무모한 생각도 든다. 물론 이는 이어지는 글의 오류를 대비한 밑밥이다. 글을 마감한 시점은 개봉 전이며 영화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불안하게 기억을 더듬는 상태가 이 영화를 말하기에는 퍽 적절하리라는 위안도 해본다.

존재 너머 자동기계의 세계

<그대 너머에>는 감독이자 시나리오작가인 박홍민의 자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다. 주인공은 감독이며, 그는 작품을 위한 시나리오를 쓴다(정확하게는 시나리오가 스스로 쓰이고 있다).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말은 이런 방식의 영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데우스엑스마키나 같은 말이다. 이것이 시나리오인지 현실인지, 그렇다면 둘의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뒤섞는 방식으로 영화 만들기를 은유하는 방식은 흔하다. 시나리오에 쓰인 글과 그것의 구현 사이 유비와 뒤섞임은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를 질문하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극중 시나리오가 감독의 삶을 반영한다면 감독의 삶과 시나리오의 내용, 그것의 구현으로서의 영화 등 적어도 세개의 층위가 맞물린다. 그중 실제 삶의 영역에 위치한 감독의 삶은 관객이 의지할 기준이 된다. 그러나 <그대 너머에>가 그렇듯 실제의 자리에 놓인 인물의 삶이 무엇보다 미스터리한 것으로 드러날 때 관객은 초조해진다. <그대 너머에>에서 실제와 그것의 구현은 이음매 없이 뒤섞이고 우리에겐 그것을 분리할 권한이 없다. 그것이 박홍민 감독의 영화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곤 하는 ‘미로’에 빠졌다는 자각으로 곧장 관객을 데려간다.

그런데 ‘미로’라는 정의 속에는 해결이나 해석의 중단이나 포기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 배어든다. 미로라는 말은 미로를 풀이하기 위한 동력마저 앗아간 영화를 마주했을 때 내뱉게 되는 사실상 포기 선언이다. 영화 속 구조와 비밀을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일 뿐 아니라 불필요해 보인다. 영화가 요구하는 것은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관객이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미로 속에서 헤매게 하는 것, 혹은 헤매던 감각을 기억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이 미로 속에 관객을 던져두고는 무책임하게 발을 빼는 것과는 다르다. 영화는 무엇보다 상실에 관한 영화이며, 우리가 상실한 것이 바로 헤매는 것 자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로가 의도되었음을 보여주는 장치는 영화 속 공간인데,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낮은 주택가가 픽션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양상이 흥미롭다. 공간이 가장 인상적으로 활용된 장면은 인숙(오민애)이 딸 지연(윤혜리)을 찾던 모습을 극부감으로 보여주는 롱테이크숏이다. 이때 이미지는 한없이 먼 반면 목소리는 가깝다. 주택들 사이로 인숙의 가려진 몸이 이따금 드러나는데, 이미지를 통해 가늠되는 배우의 이동이 지나치게 빠르다고 느껴진다. 고정된 부감숏은 이것이 편집되지 않은 실제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배우의 몸을 통해 감각되는 시간 속에선 점프와 생략이 감지된다. 이 때문에 실제의 공간과 움직임 속에서 마치 마술적 이미지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인숙의 목소리 역시 주목할 요소인데, 영화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누군가를 소리내어 부르는 것에 대한 향수와 그것의 상실을 자각하게 한다. 오늘날 누군가를 찾을 때 주로 휴대폰을 사용한다. 인숙은 휴대폰이라는 도구를 망각한 것일까. 영화에서 휴대폰이 등장하는 장면은 손에 꼽힌다. 휴대폰이 명확히 각인되는 순간 중 하나는 박 대표(이주원)가 경호(김권후)의 부고 기사를 확인할 때인데, 누군가의 죽음을 실어나르는 방식으로 휴대폰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것 같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인숙의 병증은 단지 기억과 망각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통로다. 망각은 되찾음을 동반한다. 이때 되찾음은 인간의 기억이 지금보다 더 유용했을 시기의 매체의 회복을 동반한다.

불균형의 복원

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매체인 편지를 떠올렸다. 경호의 존재를 기억하는 인숙, 인숙과의 기억을 잊은 경호, 그 사이를 잇는 존재이자 인숙에게 잊힌 지연의 관계는 편지의 생리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편지는 수신자와 송신자가 존재한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할 때, 각자가 쓴 편지는 서로에게 저장된다. 영화가 보여준 것처럼 존재가 매체 속에 잠재된다면 편지는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위탁하는 매체다. 상대방이 보낸 편지 속에 내가 쓴 글이 어느 정도 유추되지만, 따로 복사하거나 캡처해두지 않는 이상 정확한 내용은 잊힌다. 편지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각자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이 적힌 편지를 보며 투명한 자신과 과대화된 상대방을 보게 된다.

이것은 전자메일이나 메신저, SNS와 같은 오늘날 주류 매체의 속성과 대비된다. 전자매체 속에서 나의 말과 너의 말은 명확히 분리된 채 공존하며 내가 보는 것을 상대방도 볼 수 있다. 경호를 기억하고 지연을 망각한 인숙의 존재는 단지 누군가의 기억의 불완전함 혹은 불공평함을 표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공평함이 매체와 관련된 것임을 인식하게 하며 그로 인해 불공평하기 그지없는 올드 미디어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만들기에 논쟁적이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다루는 매체는 사진이다. 오늘날 사진은 디지털의 형식으로 컴퓨터나 휴대폰에 저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인숙의 집에는 출력된 일상 사진들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인숙의 머릿속에 들어간 경호의 시각에서 이 사진 속 지연의 얼굴 부분은 얼룩진 채 형체만 남아 있다. 인숙의 사진은 불가항력에 의해 손상되었지만, 헤어진 연인의 사진이라면 의지적으로 훼손된다. 상대방을 향한 감정이나 마음은 사라지거나 변했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당시 자신의 모습까지 부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럴 때 어떤 사진들은 종종 반쪽으로 남는다. 니키 리의 사진 프로젝트 <부분들>은 남성 파트너와 함께인 니키 리를 보여주는데, 그녀의 남성 파트너는 니키 리의 신체와 닿은 신체 일부분만 제외하고는 모두 잘린 채다. 이를 기억과 망각, 우연과 의지에 관한 작업으로 해석할 때 영화의 내용과 일정 부분 통한다. <그대 너머에>의 사진은 일부가 잘린 대신, 누군가의 존재가 얼룩처럼 남아 자신의 부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흡사 유령이 찍힌 사진처럼 보인다.

경호와 인숙이 함께했던 순간이 보존된 매체는 지금은 쇠락한 비디오테이프 영상이다. 두 사람이 과거의 영상을 함께 보는 장면에서 비디오 내부 재생 시 드러나는 표시 항목이 그대로 노출된 화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이 장면을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사운드다. 경호와 인숙의 대화 내용은 비디오를 발견한 현재 시점에 있는데, 이들의 목소리는 비디오테이프 내부에서 녹음된 소리로 들려온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미지와 사운드는 불화하는 듯싶지만, 현재 시점에서 말하는 이들의 대화에 따라 이미지가 재구성되기라도 하는 듯 사운드와 이미지가 동조되고 이들의 말에 반응하듯 카메라는 움직인다. 카메라에 포착된 지금보다 젊은 경호의 얼굴이 흐릿해지면서 경호는 인숙의 기억에서 퇴장한다. 기억의 소진은 쇠락한 매체를 경유하여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시간에 침식된 매체와 기억 사이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

매체의 탐험이 이루어지는 주된 장소가 장충단공원, 대한극장 앞 거리 등 충무로 일대라는 사실은 그곳이 과거 영화의 중심지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충무로가 영화를 상징하는 지역이었다는 사실이 희미해진 현재를 생각할 때 <그대 너머에>는 훗날 이를 기억하기 위해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처럼 보인다. 특히 세개의 시간대가 겹치는 대한극장 앞 장면은 최첨단 카메라 기술이 투입된 결과물이지만, 그 카메라를 통해 구현된 이미지가 연상시키는 것은 철 지난 촬영 기법이다.

주인공 경호의 느린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과 대조되고 중첩되는데,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그들이 점액질처럼 남기고 간 시간의 흔적을 카메라 위에 새기는 방식은 <중경삼림> <타락천사> 등 왕가위의 영화의 인장이었던 스텝프린팅 기법을 연상시킨다. 더 거슬러 가보면 이것은 사진이 탄생할 무렵 초기 사진 촬영 방식과 관련된다. 초기에 이미지를 착상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사진이 찍히기 위해서 피사체는 몇 시간이고 고정된 채 같은 자리에 있어야 했다. 실제로 이 장면은 고전적 방식으로 카메라를 오랫동안 한자리에 고정해 촬영한 결과물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한 화면에 공존한 흔적 뒤엔 카메라의 시간과 그 옆을 지켜야 했던 스탭의 기다림이 깃들어 있다.

카메라 너머의 유령들

롱테이크 핸드헬드숏이 영화의 리얼리티나 진실성을 보증한다면 그것은 영화 내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촬영 현장에 관해서다. 끊이지 않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도리어 카메라와 배우 및 스탭의 동선이 철저히 계산되었음을 보여주면서 촬영 당시의 현장성을 드러내는 대신 내부의 리얼리티를 탈각할 위험을 감수한다. 이때 촬영자는 배우와 호흡을 맞춰 약속된 동선을 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역시 배우다. 가령 공포영화를 연상시키는 실내 촬영 장면을 보자. 경호는 현관문 밖 지연을 무시하고 좁은 화장실 안에 들어와 문을 닫는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 지연이 기척도 없이 욕조 안에서 나타난다. 이 장면이 어떻게 찍혔는지 확언하긴 힘들지만, 트릭이 아니라면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배우가 카메라와 일치해 움직이는, 조금 더 인간적인 방식의 트릭을 상상해볼 수 있다. 연기를 중단하고 동선을 위해 재빠르게 이동한 뒤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연기를 이어가는 배우의 동선을 상상하는 것은 <그대 너머에>의 감상을 해치는 일이 결코 아니다. 경호 곁에 카메라가 늘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배우의 형상은 관객이 절대 볼 수 없는 존재인 카메라의 위치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면서 영화 내부로 포섭한다.

갑작스럽게 위치를 바꾼 지연의 존재가 보여준 것을 일종의 분신술로 이해할 때, 영화 초반에 등장한 두 남자의 기이한 형상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 하나에 두 남자가 앞뒤로 나눠 앉은 모양이 원경에서 보인다. 카메라가 가까워질수록 기이한 형체는 점점 뚜렷해진다. 겹쳐졌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모습은 연극에서 분신을 표현할 때 등장할 만한 표현법이다. 예를 들어 작가 이만희의 희곡 <불 좀 꺼주세요>(배우 오민애가 출연했던 작품이기도 하다)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각각의 분신이 등장한다. 분신은 남성과 여성, 인물의 행동과 속내 사이의 분화를 보여주는 매개였다. <그대 너머에>에서 분신처럼 보이는 인물은 경호다. 경호는 우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위아래로 떠는 기이한 모습으로 그가 관객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임을 짐작하게 한다. 분신의 주인처럼 보이는 배우 박노식은 얼마 후 화면 오른쪽으로 퇴장한 뒤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남자가 퇴장하면서 경호 역시 우는 시늉을 그치고 평범한 얼굴로 돌아온다.

경호가 분신이라면 왜 그는 남자를 따라가지 않았을까. 어쩌면 경호는 자신이 누군가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경호의 기억에 남은 껍데기이며, 실제의 자리에 놓일 만한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억의 껍질과 또 다른 껍질이 만나는 양상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 지연의 첫 등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연이 먼저 경호에게 연락을 취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지연을 화면 내부에 불러들이는 것은 경호다. 프레임 안에서 경호가 ‘이지연씨’라고 부르자 지연은 ‘네’라고 대답하며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경호는 지연의 동선을 좇는 무력한 추격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억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주체이기도 하다. 경호는 기억에서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는 인숙과 대조적으로 기억을 끌어들이는 운동을 보여준다.

한편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박노식 배우가 퇴장하는 순간, 카메라는 원경에서 시작해 경호의 코앞까지 따라붙었고 그 순간 주인의 자리는 카메라로 변경되었다고 말이다. 분신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방식은 배우가 1인2역을 맡거나 2인1역을 맡아 둘로 분화되는 것이다. 만약 그중 한명의 자리가 카메라가 되어 보이지 않게 된다면, 남은 존재의 자리 역시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런 위태로움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사유하려 한다. 카메라의 분신으로서 경호는 자신의 부재한 자리를 살피는 가운데 카메라가 부재한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축소된 ‘나’의 자리에서 ‘너(들)’의 자리는 증폭된다.

영화에서 몇몇 상황은 경호가 상황 안에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뉘어 반복된다. 경호는 박 대표가 자신과 만났던 자리에 여전히 남아 보이지 않는 나와 대화하는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신과 시나리오 관련해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던 김 작가(강은진)가 빈 의자를 마주 보고 대화하는 장면을 창밖에서 목격하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은 과거에서 떨어져 나온 자동기계적인 세계이며, 경호는 ‘나’가 부재한 상태에서 작동하는 세계를 목격한다. 한편 이 장면은 배우의 리허설 장면을 상기시킨다. 다른 배우와의 연기를 상상하며 개인 리허설을 하는 장면을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 할 때 이는 촬영 현장 바깥을 보여주는 극사실적인 장면이 된다.

만약 경호를 따라가던 카메라 역시 누군가의 분신일 수 있다면 누군가의 자리에 놓이는 이는 한 사람의 명백한 주체로서 감독이 아니라 불균질하며 알 수 없는 미래의 존재로서의 분열하는 관객이다. 배우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카메라는 궁극적으로는 관객의 신체를 대리한 보이지 않는 배우다. 유령의 자리에 놓이는 것은 영화 속 어떤 인물보다 카메라이고, 카메라보다 관객이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여정의 연루자로 초대된다. <그대 너머에>를 두고 영화에 관한 영화라고 정의할 때 영화의 구성 물질로서의 관객 역시 포함해야 한다.

그 이유는 영화가 증폭되는 이미지를 외부로 투사하는 대신, 그 내부에서 무수히 분할하는 만화경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는 아주 오랫동안 가장 미약한 존재의 비유를 떠맡아온 개미다. 개미가 움직이면서 내는 마찰음은 타자기 소리를 연상시키며 육체가 생략된 몸에 의해 자동 기입되는 시나리오의 글자들은 다시 개미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사운드와 이미지, 시나리오와 개미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한 연속체를 그리며 순환한다. 개미는 그 자체로 현존하는 물질이면서도 이미지에 검은 얼룩을 그리며 지속해서 구멍을 낸다. 영화의 미로는 실체를 부정할 수 없는 현존하는 것과 그것이 가능케 한 무한한 공백 그 사이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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